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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5 | [문화비평]
日帝의 유물을 남겨 두어야 할 역설적인 이유
정회선 전주신흥중학교 교사 (2004-02-05 15:53:35)
해방 5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한 각종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가 이 땅에 남견호은 외형적인 흔적들을 쓸어내려는 노력도 여기저기에서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경복궁 터에 자리잡고 있는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한 데서 고조되었다. 그 건물의 철거에 대해 찬반논쟁이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일제의 유물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 결과 각 지역에 남아있던 일제의 유물들에 대해서도 이 기회에 철거해버리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의 잔존물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군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산시를 방문하는 이방인들은 이 도시의 요소요소에 박혀 있는 일본식 목조건물에 호기심어린 눈길을 보내며 그 내력을 더듬곤 한다. 주지하다시키 군산은 1899년 개항하면서 비로소 도시로 발달하였다. 이전까지는 조용한 어촌에 불과했던 이 곳이 개항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운명의 도시로 변해간 것이었다. 이 무렵의 개항지는 곧 제국주의적 침략 세력의 출입구를 뜻하는 것이었고, 이 곳을 통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친 나라는 단연코 일본이었다. 그리하여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군산에도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그들 방식의 집을 지으며 거류하게 되었다. 아마도 당시의 일본식 건물을 우리의 초라한 초가집 사이에서 기세등등하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중의 일부가 지금도 현대식 건축물들 사이에서 허름해진 상태로나마 존속하며 군산의 슬픈 역사를 말해 주는듯하다. 호남지방에 대한 수탈의 근거지이자 창구였던 이 군산에는 그 당시 일본인들의 위세와 오만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여러 개의 조형문들이 군산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월명공원의 산 위에 자리잡고서 군산시를 굽어보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 저들 조형물이 심히 거슬러 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러한 지역 정서를 반영한 듯 군산시청에서는 월명공원에 있는 '개항35주년기념비(開港35周年記念碑)' '자우혜민비(慈雨惠民碑)' '보국탑(報國塔)' '삼성각(三聖閣)' 등 4개의 일제 잔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그 예산까지 확보하였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지난 3월 초 한 TV의 지역방송 중에서 공개되었다. 그와 같은 결정은, 어떠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내려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일면 정당한 조치이고 오히려 때늦은 감도 없지 않다. 해방과 함께 청산되었어야 할 일제의 잔재들 중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이 어디 하나 둘 뿐인가. 그것들은 마치도 일제의 식민지 시대를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역사의 그림자인 듯 도처에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친일파들을 주축으로 한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친일파의 재산은 법적으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고, 친일 혐의자가 독립운동가로 둔갑되어 명예를 누린 경우조차 보고되었다. 따라서 도처에서 일고 있는 일제의 잔영을 거두는 일들은 크게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 3자와 같은 입장에서 일제유물 청산 작업을 냉정하게 돌아보면 반드시 고무적인 현상만은 아닌 듯하다. 지금의 일제유물 철거 계획들은 치열한 역사의식의 발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단지 해방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즉 하나의 일과성 행사를 위한 관료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든다. 이것이 나만의 우려이기를 바라지만, 어쨌든 지금에 와서 일제의 유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녀 사냥하듯 그것들을 남김없이 소제해 버리는 것이 민족적 차원에서나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인지 그 득실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그 일은 마치 범죄의 현장에서 범인의 증거물을 모두 없애고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은 행위일 수 있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벌써 역사 속에 묻어버려야 할 만큼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경제적·문화적으로 일본을 더욱 경계해야만 할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런 까닭으로 필자는 군산 시민의 양해를 구하면서 군산시의 그 결정에 재고를 요청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일제시대의 것이면 무엇이나 다 남겨 놓자는 것은 아니다.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더욱 심했던 이 지방의 일제 수탈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리고 그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얻어 낼 수 있는 흐런 흔적이면 하나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필자는 그 댓아으로 보국탑(報國塔)을 꼽고 싶다. 이 탑은 군산 지역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삼국오량(森菊五良)이라는 자가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자 우리나라의 국보 제 9호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칫수까지 똑같게 모방하여 1935년에 만든 것이다. 필자가 이 탑을 남기자고 제안하는 까닭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고려한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인즉 이 탑의 1층 탑신부 앞면과 뒷면에 700여자의 글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 바, 그 명문을 통하여 군산에서 행해진 수탈의 역사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명문에 의하면, 삼국오량(森菊五良)은 일본을 일으키고 그 백성을 이롭게 하려면 먼제 좃너을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상자국 흥국이민 이개발조선위선 嘗自謂 興國利民 以開發朝鮮爲先)1896년경 부산으로 들어왔으며, 러·일전쟁(1904-1905) 후 군산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무역과 정미업에도 관여하였지만 농장 경영과 미곡 수출에 주력하였다. 그는 도선인을 독려하여 산을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마련하는 등 쌀 생산의 증대에 힘썼다. 그리하여 (이 명문의 표현대로 소개하면) 궁핍한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을 넉넉히 먹이고 남은 곡식을 일본으로 수출하여 일본과 그 국민을 부강하고 이롭게 하였다는 것이다(양선민 유여수우내지 시이 국부인리 養鮮民 有餘輸于內地 是以 國富人利). 한편 큰 재물을 모아 조선 남부 지역에서 제일 유력한 갑부 중의 한사람이 된 그는 도회의원(道會議員), 선미조사위원(鮮米調査委員), 군산미곡취인소(群山米穀取引所) 이사장, 조선미곡창고회사 감사역(朝鮮米穀倉庫會社 監査役)등 10여개의 경제적 수탈기관에서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비록 이 명문이 그의 행적을 미화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지만, 위의 발췌한 부분으로써 우리는 일제시대에 생계조차 꾸려갈 수 없을 정도로 식량을 수탈당했던 호남평야 소작농민들의 슬픔과 그 쌀을 배에 실어올렸을 군산부두 노동자들의 고통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도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우리나라가 다시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심히 종속되어가고, 여기에 더하여 조만간 허용될 일본의 문화적 진출에 직면한 이 시점에서 일본의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나라의 미래를 담당할 청소년층에서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마저 희박한 상태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제시대는 역사책 속의 한 페이지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들은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알게 되는 일제시대와 그 당시 선조들이 당했던 고난의 역사를 실감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일본을 바로 알고 일본의 침투를 염려해야 하는 것이 기성세대만의 문제가 아니요 후세까지 동참시켜야 할 과업임을 인식한다면 교과서의 한계를 보완할 교육자료로서 일제의 잔존물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역설적이지만 이것들은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그 어떤 조형물보다 더 절실하게 자유와 민족의 소중함을 우리의 가슴에 심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 건물 터가 민족 감정상 용납될 수 없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론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군산의 경우 월명공원에 있는 유물 중 나머지를 모두 제거해버리더라도 보국탑 하나만은 존속시키자고 제안하는 것도 바로 그런 교육적 가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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