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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5 | [문화와사람]
전북문화저널 시민문화강좌 세계영화사 80년대를 향한 90년대의 에필로그 《장미빛 인생》의 영화감독 김홍준과 함께
문화저널(2004-02-05 15:43:29)
전주의 여러분들을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이번 문화강좌의 개강인 셈인데 오늘은 좀더 자유롭게 여러분들과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처럼 영상문화나 영화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높았던 적이 없었고 또 영화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부끄러울 만큼 영화에 대해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분들도 자주 만나게 되는데, 그럼에도 막상 우리 주변에 범람하는 영상들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목마른 상활이 현재의 모습인 듯 합니다. 제가 처음 이번 기획을 듣고 일 강좌에 섭외를 받았을 때 '전주는 살아 있구나' 하고 생각을 했고 한편으로는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나 영화사보다는(제 능력밖의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는데)제가 만든 영화를 같이 보고 그 영화의 감독으로서 전주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되면 가겠다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어요. 제 자신이 한국영화에 대해서 개괄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듯하고 제 영화에 대해서 따끔한 비판이나 한국영화의 미래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었으면 합니다. 먼저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장미빛 인생》는 저의 데뷔작이고 기본적인 아이디어 역시 제가 냈습니다. 1993년 11월에 태홍영화사에서 촬영이 시작되서 7월에 완성, 8월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습니다. 3주동안 4만의 관객을 동원(동원이라는 말에 김감독은 왜 동원이냐고 한마디 덧붙였다)하고 그해 흥행실패작 리스트에 올랐다가 잊혀질때쯤 되어서 뜻하지 않게 벤쿠버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11월 프랑스 낭트영화제(3대륙 영화제(헐리우드와 유럽영화를 제외한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이른바 제3세계 영화들이 유럽에 소개되는 창구의 역할을 하는)에서 최명실씨가 여우주연상을 타면서 이른바 화제작이 되었던 영화였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8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4월 13일밤 전두환씨의 호헌조치가 있었고 당시 시국은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으로 한껏 어지러운 상황이었으며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머타임을 실시했던 때였습니다. 6월 항쟁의 직전의 뭔가 터질 것 같은, 그러나 막상 터지지는 않고 있는 웬지 답답하고 그랬던 그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저는 만화방이라는 주변(서울 변두리였던 가리봉동)과 그리고 그 주변에 모여드는 인물들을 통해서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심야'에 대한 것들이 특별히 많았고, 그런 시도돌을 일종의 도큐멘트적인 흐름으로 그려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로 그 시대를 직접 살아내고 체험했던 또는 그 시대를 약간 거리를 두고 간잡적으로 경험했던 지금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이나 정일성 기사님과 오랫동안 작업을 같이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그런 과정에서 정일성씨의 영상적인 기법들이 이번 영화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요. 이 영화의 영상을 굳이 분류하자면 리얼리즘 영상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는데요, 한편의 영화속에서 촬영기사와 감독은 그 영화의 시각적인 측면을 같이 분담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베테랑 촬영기사의 감각과 감독의 이론적 방향이 결합되는 과정이라고 하겠는데, 《장미빛 인생》의 경우 저로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의 범위안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카메라에 대한 이런저런 주문을 담지는 않았지만 그 영상이 저의 의사와 반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속에 한 시대가 있다고 말한다면 《장미빛 인생》에서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요. 그리고 《장미빛 인생》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였는지 궁금합니다. 영화란 이야기하고 설득하거나 메시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가상의 세계이건 아니면 다큐멘트처럼 현실 자체를 생생하게 담든 관객이 접하게 되는 것은 스크린을 통해 걸러진 그리고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진 하나의 우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영화야말로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가 있다고 말해지는데, 적어도 영상과 소리라는 가장 현실과 근접한 체험을 통해서 전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화면속에 만들어 낼 수 있고 그것에 자기대로의 법칙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보여주고 들려준다는 것이 사람의 작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 나름대로의 시각이라는 게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80년대를 다루고 있으며 또 남들은 화려하고 멋진 광고나 패션디자이너의 세계를 다루고 있을 때 왜 하필 만화방이냐는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저로서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적어도 영화에 있어서 80년대는 절대로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문학같은 장르에서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80년대는 어느정도 상업적으로 활용될 수 있지만 적어도 영화는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촌스러울 수 밖에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를 다룰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저 자신의 감수성이나 세상을 보는 눈에 80년대를 통과하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첫 영화에서 어쨌든 내가 그 80년대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점검하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가 처음 만들어졌던 93년은 문민시대의 원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두가지 느낌속에서 영화를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문민시대라는 한 시대의 변화속에서, 80년대에 우리사회가 부둥켜안고 씨름했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게 예전처럼 무자비하지는 않고 뭔가 장밋빛 미래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이야기들의 뒷면에는 사람들에게 어디선가 (TV모니터 뒷면에서) '잊어라 잊어라' 그것도 안되면 '80년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감독의 욕심으로는 사람들이 조금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통속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결국은 80년대를 잊으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래, 정말 잊어도 되느냐'는 질문을 되돌려보고 싶었지요.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영화가 한창 진행중이던 가운데 김일성주석의 급서가 전해지고 그 이후에 전개되는 일련의 상황(사회분위기)들이 아직 80년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럴 수 있는 때가 아니구나, 그리고 내가 90년대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결국 90년대에 대한 저의 시각이 제대로 서지 않았기 때문에 80년대를 다룬 것이 어떤 당시의 풍속도나 사회분위기를 세밀하게 다루는데는 일정하게 성공했지만 그러면 과연 이것이 무엇이었느냐 혹은 이 영화의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미완성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평자가 말했듯이 '서둘러서 영화를 끝내버리는' 이런 쪽으로 밖에는 해결되지 않았구나 하는 반성이 남아있습니다. 다음에 《장미빛 인생》이라는 제목은 제가 미국 유학중이던 87년에 잠시 한국에 들어온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서울거리마다 웬 '장미빛 인생' 이라는 까페가 그렇게 많았는지 몰라요. 바로 그 상황이 제겐 80년대의 하나의 화두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갑작스레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 상황을 놓고 '장미빛 인생' 이라는 어휘에 대한 몇가지 단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프랑스의 대중문화인 샹송이 한국에 오면서 뭔가 고급스러운 문화적 분위기를 가졌다가 그것이 80년대 싸구려 까페이름이 되면서 대단히 통속적으로 되었고 또 거기에 말 자체를 따져보면 장미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고상한 이미지와 또 이생이라는 말이 갖는 '촌스러움' , 바로 그것이 80년대가 아니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80년대적인 문화적 감수성과 보이지 않는 어떤 고상한 느낌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그런 시대가 80년대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장미빛 인생》은 동팔이가 장미문신을 하고 다녀서가 아니고 어쩌면 8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오던 사람들이 그 《장미빛 인생》이라는 단어에 더 매력을 느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영화의 장면을 보면 두 주인공이 시위현장을 지나치면서 최루탄 가스에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첫째는 경찰이 그들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또 영화에 등장하는 만화방의 주변인물들 등뒤로 TV뉴스가 그저 무심하게 지나가는 모습들도 나오는데 그런 장면들에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요. 또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부유층의 옷을 입은 마담(최명길 분)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요. 제 생각에 보통의 영화나 TV에서 80년대를 다룰 때 어떻게 보면 대단히 목이 힘주면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것을 조금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었습니다. 80년에 영화속의 그런 장면들은 무척 전형적인 모습이었지만 우리가 80년대를 다룰때는 것을 저는 좀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80년대라는 풍경속에 동팔과 마담에 스쳐지나가는 그런 모습을 스케치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두사람이 지하철을 걸으면서 연신 재채기를 해대는 모습이 나오는데 저는 그것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이 80년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TV뉴스 장면 역시 최루탄 사건과 같은 맥락인데, 그같은 설정 자체가 어떤 정치적 의미라든가 하나으 복선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변인물들은 유진과 기영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바깥 세상에 대해서 상관도 없고 상관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바깥 세상은 이 사람들의 주변을 항상 맴돌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시대에 대한 배경 자체일 수도 있고 그 의미를 관객들이 읽어준다면 그것도 맞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아이와 부유층의 옷을 입은 마담의 장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곧 '고난의 80년대가 가고 이제는 희망의 90년대가 왔다는 말이냐' 혹은 '그렇게 모여지는 것처럼 함으로써 야유하는 것이다' 라고 평하는 분도 계신데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 속에서 80년대와 90년대를 보는 시점에서 저 스스로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한데 아이는 반드시 동팔의 아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관객의 판단이 맡기고 싶었어요. 그리고 영화속에 어린아이가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희망일 수 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마담처럼 혼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아이가 삶에 있어서 짐일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그 대사에서 삼촌들이 온다고 그랬거든요. 유진과 기영을 어린아이가 삼촌이라고 부른다는 말이지요. 저는 그 영화에서 90년대에 대한 에필로그를 보여주면서 유진과 기영의 현재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풀리지 않는 거예요. 유진이나 기영의 현재 모습에 대해서 감이 안잡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현재 모습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지우고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 만나고 있다는 점만을 보여주고 싶었지요. 도큐멘트라고 보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또 80년대 중반 미국에 계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80년대를 재현했는지, 그리고 영화의 표현이나 기법(예컨대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가 등장하는 장면같은)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영향을 혹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영화감독은 물론 자기가 경험했거나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찍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변명일 수 있지만 80년대를 한국에서 살았느냐 혹은 운동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어떤 소재를 이야기거리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 얼마나 그 소재앞에 진지하고 겸손하게,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는데까지 열심히 연구하고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가능한 것을 제한된 조건속에서 도큐멘트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아이장면에 대한 대답인데, 제가 영화를 시작하면서 쭉 임감독님 아래서 있었는데 그런점에서 영향을 받았겠지만 의식적으로 임감독님 흉내를 내고 싶어했다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이럴 때 임감독님은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현장에서 결정을 내릴때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은 하지요. 영화라는 것 또는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임감독님의 자세는 제가 배우고 싶어요.(사실은 영화학교를 다녔다거나 다른 감독님과 함께 작업을 해보았다던가 하는 경험이 없어서 아는 것이 그것밖에는 없는데) 그렇지만 이번 영화를 대하면서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보기에 편한 영화를 찍고 싶었고 특별하게 어떤 장르를 굳이 따라가지 않고, 차분하게 기교를 드러내지 않는 담담하고 묵직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요. 만화방이라는 공간이 주는 상징은 무엇인지 그리고 유진이라는 인물은 좀 뜻밖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영화란, 특히 일정한 네러티브가 있는 모든 영화는 각각의 장면이 몇 개의 층을 가지게 되요. 만화방이 주는 의미 자체도 반지하로 만든 것도 어떤 의미에서 맞고 또 잘 안맞는 부분도 있어요. 만화방을 반지하로 한 것은 변두리 주변 인생들의 어두운 모습이 시각적으로 더 맞겠다. 그리고 반지하라는 것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회색지대라는 점, 그리고 반지하에서 태양광선을 받으면서 색조를 달리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두루 고려되었던 것이지요. 또 질문해주신 유진이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대단히 문제적인 인물입니다. 유진의 데이트 장면은 너무 예쁘게 찍혔는데, 변두리 다방의 채송화 같은 아가씨와의 데이트 장면이든가 하는 등등이 유진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일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문학청년이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여성적이고 지적이고 그래서 저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영악한 지식인적인 모습이 있는데 저는 그런 복합적인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제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기영과 함께 유진이라는 인물이 80년대의 두 개의 아이러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유진처럼 전혀 특별한 의식이 없었던 사람마저도 국가보안법에 걸려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뭔가 엄청난 일을 한 것 같은 기영이지만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인물이거든요. 저는 기영이 마담과 대화하면서 어쩔줄 몰라하는 그런 인간적인 모습이 이 시대에 더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을까(끝내 변절하지 않을듯한) 그런 색악을 해보았어요. 감독님의 영화를 리얼리즘이라고 해석하는 평가도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예술의 창작에는 철저한 계획과 의도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감독께서는 그런 계획과 의도성과는 상반되는, 의도되지 않은 어떤 것이 이 영화속에 포함되지 않았는지요. 리얼리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만약 누군가가 제 영화를 리얼리즘이라고 평가해 준다면 저는 그것을 대단한 찬사와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 자신은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던가 라고 말할만한 입장과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하나의 감독입니다. 영화는 무척 어렵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영화는 대부분 상업자본으로 만들어 집니다. 일정한 자본과 테크놀러지 그리고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기 때문에 다른 장르에는 없는 감독이라는 위치가 필요하지요. 《장미빛 인생》은 상업자본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어떤 부당한 압력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었어요. 영화는 생각한 것이 그대로 관객들에게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비디오를 통해서 몇차례 걸리지면서 만들어집니다. 그런 과정에서 계획된 것이 어디로 계획되지 않은 부분은 어디냐는 문제는 늘 영화를 찍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지요. 똑같은 영화를 지금에 와서 다시 한번 찍어볼 생각은 없는지, 그래서 다시 80년대를 그려본다면 어떤 방향이 될는지 궁금한데요. 아무리 '만약'이라고 해도 다시 한번 같은 영화를 찍어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어요.. 지금에 와서 80년대를 생각해보면 만화방마저도 너무 크게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80년대를 잡는다면 더 좁게 잡고 싶어요. 예를 들어 한편의 노래라든지 한편의 시라든지 하룻밤의 사건이라든지 굉징히 미시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그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다 끌어내야지요. 만화방안에 동팔이 홍콩 느와르를 끌고 들어오고 유진ㅇ 인텔리겐차의 멜로드라마를 끌고 들어오고 기영이 사회파 드라마를 끌고 들어오고 하면서 만화방조차도 너무 커져 버렸지요. 80년대는 어쩌면 그런것들이 아닌 아주 작고 미시적인 것을 통해서 그 시대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광주항쟁같은 이런 테마는 버겁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저로서는 당분간은 80년대를 직접 영화로 다룰 수 있는 자격이 업고 그럴 기회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앞으로 감독께서 지향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어떤 자세로 영화를 하시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지요. 저도 이제 영화감독이 된지 얼마 안된 사람이고 한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다음엔 어떤 영화를 찍게 될지 아직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감독이란 직업이기는 하지만 직장은 아닌데 다만 저는 이것이 제가 가족을 부양하는 직업이자 평생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는 언제나 위기였지만 지금이야말로 위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전에 없었던 좋은 환경이 차츰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과, 상업적인 이해관계를 동시에 지면서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고, 그리고 한편에서는 나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가 같이 발전해야 한다는 어떤 사명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변하지 않고 영화를 찍을 것이고 커다란 대의명분보다는 한국영화의 현실에서 그리고 제가 서있는 위치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작은 것부터 고쳐 나가보자 하는 것입니다. 처의 첫 번째 영화가 단성사에 걸리던 날의 그 떨리고 두렵던 그때 그 심정으로 영화를 계속 찍어나갈 겁니다. 오늘 여러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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