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5 | [문화비평]
체험의 동질성, 허약한 연극성
전주시립극단의 『어라하』공연을 보고
김길수 연극평론가·순천대학교 교수
(2004-02-05 15:39:10)
안상철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노란 개나리 사이로 꿩들이 짝짓기에 열을 올리는 난봉산 기슭, 그 기슭을 바라보는 연구실입니다. 열악해져가는 연극 제작환경, 그 악조건 속에서 삶의 모든 것을 바치시는 안선생님과 전주시립극단 연극 동지들, 진정 어둠속에서 꿈틀대는 작업 하나 하나가 전라도 사람들의 심령에 반드시 빛을 발하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수 백 시간을 투자하여 수 백 머리와 지적 탐색을 통하여, 산모의 가슴과 배가 갈라지는 고통을 통하여 연극동연이 이루어지건만 단순한 인상비평 몇마디로 제단하지 않나 하여 경건한 자세로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있습니다. 항상 겸손하되 애정과 도움을 드리는 비평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신조로 전주행 기차에 몸을 싣지만 연극적 환타지가 몸과 마음을 휘감을 땐 전혀 피곤한 줄도 모르겠더군요! 우리다운 삶, 우리다운 삶의 터전, 전라도 고유의 역사와 그 진원지에 대한 끈질긴 추적, 탐색의지, 이를 연극무대에서 접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수많은 자료 부재, 고증부재, 언어 생활문화양식에 관한 자료 부재, 이 악조건의 상황에서 과감히 백제얼 찾기 일환으로 『어라하』를 제작하신 선배님의 작업 정신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중요 연극공연사의 자료로 평가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이번 연극은 질펀한 기층민들의 놀이와 익살, 건강하면서도 생명감이 넘치는 집단구문, 전라도 사투리의 음색의 자연스런 끼어들기, 한인물의 내적고뇌, 이를 독백으로, 혹은 여러 인물들의 따라읽기식의 독백과 절규로 처리한 부분, 인물들이 처한 딜레마와 그 상황들이 주변 인물들에 의해 자연스레 보고되는 형식, 주인공의 딜레마를 적시에 일깨우기 위한 선율 처방, 위기상황과 놀이상황의 적절한 순환과정등이 좋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연극적 흡인력이 창출되었느냐에 대해선 긍정하기 힘들 듯 싶습니다.
소서노, 그녀가 만나고 부딪치는 사건, 어려운 여건 속에서 민족고유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사건, 사건이 구체적으로 떠받쳐 주어야 할텐데 주변 반동 인물들의 캐릭터가 너무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임을 부인할 길 없습니다. 구체적 사건과의 만남이 기승전결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단순한 삽화로 처리되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소서노와 마가 일당의 대립이 기본 축으로 설정된다면 그와 관련된 보조 모티브들이 몇 개의 상황을 통해 만들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랬을 때 마가 일당의 행위가 단조롭지 않고 또 그 역할의 배우들 역시 병정놀이식의 짓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주인공 소서노가 겪는 사건, 주변의 반동적 상황이 점차 다양하게 축적되고 증폭되어야 할 여건, 동시에 그녀의 내적 갈등이 관객 모두의 딜레마로 전이되기 위한 처방, 주몽과의 만남과정, 그의 본처의 등장, 태자 책봉의 사건, 그렇지만 부부간의 끊어질 수 없는 정리, 본처와의 갈등, 태자 책봉으로 인한 주몽과의 갈등, 이런 부분들은 어느정도 극의 전개 과정에서 상당한 위기 창출의 조요 성분이 아닐까 여겨봅니다.(따라서 비중있게 처리하면 어떨는지요…) 아울런 남쪽 마한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는 여건, 즉 가족간의 갈등 선분 이외에 사회, 정치, 문화적인 측면에서 백제의 태동 배경의 설득력 있는 요소들이 뒤따랐다면 좋지 않았을까 여겨 봅니다.
물론 이 부분들이 순탄하여 엮어져선 안되고 고구려의 창업 작업, 내지 고구려의 발전 과정과 상호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두 좋은 길 중에서 어느 한 길을 선택했을 때 다른 한길을 가지 못해 고통을 느껴야 하듯이…
연극의 내적 충돌, 백제 성립을 위한 이미지,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구체적 사건 전개 작업 이를 위한 사료, 사건을 상상력 동원하여 만들어 내야 하는 책무, 이는 철저히 극작 과정의 책무이지 않나 여겨봅니다. 주인공 소서노의 갈등이 후반부에서 충분히 증폭될 소지가 있었는데도 구성력의 약화로 그렇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유소의 노래, 이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있었던 듯 싶습니다. 노래, 선율, 이는 들을거리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백제인의 동질성을, 이들의 정감을 그리고 이들 자신의 참 고향을 되찾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유소의 춤사위, 참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해줄수 있도록 유도하는 심미적 감흥 유발 여부가 중요관건입니다. 유서와 소서노는 노래와 춤을 통해 상호 합일(合一)됨을 느끼며, 이는 극무대 전개에서 마한행을 결행하게 되는 당위성을 낳게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착상이 좋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확실한 심미적 처방, 보조 모티브나 보조 사건 첨가가 뒤따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출산행위 및 의식은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그 어떤 상징이나 비유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마가 일당의 위협행동, 너무 유아기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며, 이를 춘산과정과 병행한 의도는 산고의 고통과 졸볼의 위기상황을 연결지으려는 시도로 보여집니다. 이는 너무 산술적이고 작위적입니다. 좀더 관객을 압도할 수 있는, 그리고 관객의 일상적 가늠자를 뛰어넘는 상징적 무대양식이 요구되는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안선생님도 잘아시다시피, 연극은 상상력을 기본 바탕으로 꾸며지는 그리고 비유와 우의, 상지의 힘이 살아나는 창조의 총화임을 상기할 때 이 장면에선 특히 상징과 우의는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칼싸움 장면, 고도의 싸움 테크닉을 관객은수많은 무협영화에서 익히 보아왔기에, 보기에 불편한 싸움장면, 대결 장면은 재고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양식성이 가미된 무대미학, 표현주의극적 움직임,(특히 결투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체험케 해줄 이런점을 검토해 보셨으면 어떨는지요…)
백성들의 보고 형식이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철저히 보고를 위해 모였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사건을 접하면서 보고하도록 유도할 수는 없는지요…. 다시말해 구체적 사건만 첨가되었다면 그리고 그 사건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더라면 무대그림의 단순성은 제거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의위 활력, 신명, 열린 공동체를 향한 난장의 에너지가 물씬 풍기는 부분들은 그것들이 다양한 놀이 양식, 전투양식, 더불어 사는 삶의 양식으로 변용되었는 점에서 이 공연의 주요 덕목이었다고 봅니다.
역사속에 묻힐 뻔 했던 소서노를 특히 백제 건국을 향한 그의 행적을 발굴하였음도 그리고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음도 큰 성과이구요! 욕심을 부리자면 이런 무대 작업 모두가 연극적 감동으로 이어졌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동안 무의 상태에서 엄청난 우리얼 찾기 작업을 해오신 안선생님의 성실한 작업의 깊은 감명과 교훈을 받았으며 오늘도 이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기도 하였습니다. 재 창조 공연과정이 있으시다 하셨기에 부족한 입장에서 욕심을 부린 것 만 같습니다. 더욱 건승하시길 빌며 전주시립극단의 발전을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