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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5 | [세대횡단 문화읽기]
뛰어난 회화적 안목을 읽을 수 있다. 허련의 「모악산 금산사도」
이철량 전북대교수·미술교육과 (2004-02-05 15:38:04)
소치(小痴) 허련(許鍊)은 전북출신의 작가는 아니다. 그는 전남 진도에서 출생하고 향리에서 말년을 보내며 이땅에 본격적인 중국 남종화를 토착화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행적중에서 특별히 이지역 화단과 어떤 연관을 확인할 길은 없으나 다만 「모악산 금산사도」를 남겨 흥미를 끈다. 금산사도는 이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명찰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100여년전의 금산사를 확인하는 즐거움을 준다. 또한 이 무렵 이지역은 중국남종화의 영향이 스며들 때이며 허련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남종화가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게 한다. 허련은 1809년에 나서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의 화가로서의 업적은 오늘날 소위 남도화풍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적 남종 산수화의 씨를 뿌린데 있다. 오늘날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는 남종산수화는 허련에서 비롯되어지고, 그의 후손들인 미한 허형, 의제 허백련, 남농 허건등의 우리나라의 대표적 화가들을 배출해내며 이어져 내려왔다. 허련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이남에서 제일 가는 화가"라는 칭찬을 들으며 총애를 받았던 추사의 제자였다 따라서 스승의 회화관을 그대로 수용하며 발전시킨 대표적 추사파 계열의 작가이다. 허련은 중국남종 화가중 특히 황공상과 예찬의 화풍을 따랐다. 그의 호가 소치인 것은 대치 황공망의 호에서 비롯되었고, 진도에 남아 있는 그의 거처 「운림산방」이라는 당호는 예찬의 호에서 따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字)를 마힐(摩詰)이라 하였는데 이는 중국 남종화의 시조로 불려지는 왕유의 호에서 빌려왔다. 이러한 예는 허련이 얼마나 철저히 중국남종화에 심취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화풍에 있어서는 상당히 독자적 양식과 특징을 이룩해내었다. 절묘한 시·서·화가 어울리는 공간구성이라든지 거칠고 짧은 필치, 대담한 묵법등은 허련의 비범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소개되는 「모악산 금산사도」는 허련이 얼마나 중국남종화의 기본을 철저히 공부하고 소화해 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보는 금산사의 모습은 오늘날의 모습과 다소 다르게 보인다. 금산사는 599년 백제 법왕때 창건되었으나 몇차례 중수와 복원 등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가람의 배치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때 거의 대부분의 전각등이 소실된 이후 1601년 수문대사(守文大師)가 복원하기 시작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1635년에 대사구(大寺區)지역만 복원되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아 허련이 그린 금산사의 모습이 이때의 모습이라고 보여진다. 대체적인 가람의 배치는 오늘날의 모습과 쉽게 비교하여 볼 수 있으나 몇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우선 입구에 서있는 석조로 축조된 돔형의 문이 헐어져 형태만 남아 있으나 옛날에는 그 위에 번듯한 누각(樓閣)이 올려져 있음이 눈에 띤다. 그리고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 모양이 지금의 수편으로된 다리 형태가 아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달라진 모습은 본전인 대적광전(大寂光殿) 뜰안으로 들어서는 중간문격인 선제루(善濟樓)가 오늘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은 2층누각으로 되어있고 누각밑으로 본전뜰에 들어서게 되어있으나 본그림에서는 선제루가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서 아마도 사천왕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는 작은 전각을 지나 들어서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곳을 통과하면 널찍한 본전뜰이 펼쳐지며 두 개의 석등이 맞이한다. 그러나 이 석등도 지금은 자리가 바뀌어있다. 그 바로 오른편에 지금 국보 62호로 지정된 3층 법당인 미륵전이 웅장하게 서있고 그 앞에 약간 비껴서있는 작은 전각이 하나 있다. 이것이 아마 대장전이 아닌가 싶은데 이 대장전은 지금 본전(本殿) 왼편으로 옮겨져 있고 그앞에 석등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석련대, 6각다층석탑, 또는 노주등 사소한 경물등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두 개의 석등은 그렸으면서 그보다 규모가 작지 않은 석련대나 6각다층석탑등을 빠뜨렸다는 점이다. 혹시 후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는지 모르겠다. 그러한 의문은 지금의 본당인 대적광전이 그 위치를 본래의 자리에서 옮겨져서 세워졌는데 본래의 자리라면 보물로 지정된 석련대나 6각다층석탑의 위치가 맞지않다. 그리고 가람의 배치가 그림에서 보다도 지금의 모습이 훨씬 웅장하고 규모가 확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금산사에서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미륵전과 그 위로 보이는 언덕위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5층탑과 석종이 있다. 그 오른편에 적멸보궁과 삼성각이 옛 형태로 자리하고 있으나 옛건물은 아니다. 이외의 다른 건물들은 이후에 새로이 축조된 것들이며 그 배치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선제루 오른편으로 이어지며 몇채의 전각들이 있으나 지금은 산실되고 비슷한 자리에 적묵당, 보현당등이 새롭게 구성되어 세워져 있다. 지금은 많이 달리진 금산사의 옛모습이 흥미롭다. 소치 허련은 앞ㅅ 언급한대로 대표적인 남종화가인데 이 금산사도를 통해보면 그가 남종화의 제반양식을 매우 철저하게 공부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 그림이 사실을 직접 보고 묘사한 실경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필치는 전적으로 남종화법을 구사하고 있다. 금산사를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본 부감법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산세의 위치와 흐름 그리고 경물의 배치등이 사실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둥근 원형으로 짜여진 구도속에 작은 필치로 처리되었으나 웅장한 대찰의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전체적으로 산세의 표현은 완전한 피마준(皮麻준)에 미점(米点)을 찍어 처리하고 있다. 이 피마준과 미점법은 남종화풍의 대표적 기법인데 허련은 매우 능란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매우 속도감이 넘치는 필치로 죽죽 그어내린 산세가 생동감이 넘친다. 모악산 주봉에서 흘러내리는 산의 기운이 가람을 좌우로 감싸고 있고 한구석도 빈틈없이 화명전체를 살아나게 처리한 허련의 구성력이 돋보인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도 완벽하게 처리하여 숲을 이루고내고 있는데 그러한 기법은 아마도 그가 화본을 통해 공부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추정은 수목처리에 있어서 개자점(介字点)이나 호숙점등의 기법이 주로 사용되고 있고, 그 기법뿐만 아니라 필치의 감각으로 보아 개자원 화보등에서 공부하였으리라는 예상을 갖게한다. 그리고 군데군데 쌍구법(雙句法)으로 잎을 그리고 색을 넣어 녹음이 울창한 여름의 기운을 복돋우었다. 왼편으로 둘러진 산과 사찰 튓편으로는 소미수법(小米樹法)으로 처리된 소나무숲을 그려 넣었는데 허련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찰의 배치뿐만아니라 주변 수목 하나하나도 정확히 관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열려진 대적광전의 가운데 문으로 본존불이 보이게 하고 채색으로 칠해 넣어 화면의 기운을 집중시킨 모습에서 허련이 얼마나 뛰어난 회화적 안목을 갖고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 그림은 여러장으로 된 회첩중에서 떼어낸 듯이 보이는데 다른 한쪽면에는 직접 쓴 금산사시(詩)가 있어 시·서·화 3절로 유명했던 허련의 면모를 읽게한다. 그리고 허련이 지 지역 미술과 어떤 특별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흔적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든지 당대 대표적 화가였던 허련의 화풍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다만 이작품을 퉁해 금산사의 옛모습과 전통 남종화를 바탕으로하여 한국풍경을 사생하고 있는 모습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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