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5.5 | [문화가 정보]
유채꽃반 사세요, 오백원짜리-.
곽병창 연극연출가·「창작극회」 대표 (2004-02-05 15:36:27)
제주도는 참 아름답다. 그림처럼-. 그림은 원래 현실을 모방한 것인데, 우리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그림같다고 말한다. 그렇게 뒤바뀌어 있는 아름다움처럼, 삶도, 죽음도 사랑마저도 원래의 가치와 자리를 떠나서 유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쨌거나 문화저널 덕분에 사삼항쟁의 자취를 찾으려 떠났던 그 때, 아름다운 섬 제주의 봄은 색깔이 또렷했다. 유채꽃의 샛노랑, 밭둑마다 둘러친 돌담의 검정 띠, 봄 햇살을 맞아 일제히 아우성치며 돋아오르는 시퍼런 보리, 바람에 일렁이며 모든 푸른 색을 일제히 실험하고 있는 듯한 바다, 그리고 작은 산(오름)들의 꼭대기를 향해 길길이 날뛰며 달려 올라가는 바람 맞은 갈대들. 그뿐이랴? 이것들을 키우고 있는 게 그 숱한 항쟁의 와중에 죽어간 사람들의 살점이라며, 이건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 그대로라며 눈시울을 붉히던 소설가의 흰 구렛나루에 이르기까지, 사월의 제주도는 이런 선명한 색깔들과 함께 떠 있었다. 우리를 반긴 제주도의 사람들은, 불과 오십 년도 되지 않은 그 참혹한 기억을 고통스럽게 말로 옮기며, 그 벌판과 굴 속, 오름과 웅덩이를 안내해 주고 있었다. 표지판 하나 없는 그 참혹한 기억의 흔적들을 손금 보듯 훤하게 꿰어 알고서, 진종일 멈추지 않고 불어대는 바닷바람 속을 야생의 짐승처럼 헤집고 있었다. 그들은 그 외롭고 처절했던 항쟁의 후예들답게 씩씩하고 당당했으며, 풀 한 포기 돌 한 덩이 빼지 않고, 제주도의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는 우리가 정말 무념무상의 심미안을 발동해서 유채꽃밭의 고운 색에 취하자, 우리를 단체로 사진찍게도 해 주었다. 단체로 싸게-. '싸게-'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랬다. 유채꽃밭의 주인 할머니에게는 그 이름다운 꽃밭이 주된 생계의 수단이었다. 과거 한때는 평화롭게 곡식을 부쳐먹었던 땅, 또 한때쯤은 생존을 위해 총을 들고 나선 전사들의 발자국이 우루루 찍혔을 그 땅. 그래서 그들의 피와 눈물이 스켜 었을 그 땅 위에 샛노란 꽃이 피었다. 그 땅에 그대로 죽어서 묻힌, 이름 모를 억울한 육신들이 그대로 썩어서, 양질의 유기질 비료가 되어 키운 유채꽃이, 노랗게 피었다. 그리고는 그당시에는 아마 꽃보다도 더 젊고 예뻤을 처녀가 이제는 검게 그을린 주름투성이의 할머니가 되어 꽃밭을 팔고 있는 것이다. 손님이 뜸할 때는 자그마한 나무의자에 몸을 얹어 쉬면서 먼 바다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할까? 그 해 사월 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삼 만 명이라니까 한 집에 한 사람 이상은 희생자가 있었던 셈이다. 저 선연한 봄기운의 한 복판에 앉아서 내리쪼이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앉아있는 노파의 포오즈는 참으로 초현실적이다. 날아갈 듯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그 유채꽃과 경쟁이라도 하듯 화들짝 웃으며 포오즈를 취한다. 유채꽃을 배경으로 한 장 찍는 데 오백원이므로, 너댓장쯤 찍고 적당히 할인 받는다. 행여 그 사진의 한귀퉁이에 보자기를 둘러쓴 남루한 차림의 그 할머니가 찍힐까봐 요리조리 조심하며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그 사진은 아무래도 돈 내고 찍은 귀한 것이므로 다른 사진들보다 더 각광을 받을 것이고, 따라서 작은 액자에 넣어서 호사한 신혼 가구의 어디쯤에 요요하게 올려질 것이다. 그 할머니는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음 속에서도-, '사진 한 장 찍어요, 오백 원이예요. 이 노오란 유채가 탐스럽지 않나요?' 하며 호객하던 그 할머니를 기억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신혼부부들은 깔깔깔 웃음을 남기며 하나 둘 사라져가고, 그리고 해가 지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면, 그 할머니는 돈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가락 끝으로 하루의 수입을 셈해보며, 귀가길을 서두를 것이다. 그 기이한 하루벌이를 마치고, 유채꽃 밭둑을 따라 긴 벌판을 가로질러 귀소할 것이다. 어두운 기억이 서려 있는 마을을 향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잠시도 가만 두지 않는 아름다움에의 충동은 과연 무엇인가? 현상계의 아름다움이란, 곧 이상 세계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철학자는, 그런 이유로 해서 현상의 아름다움을 모방하려는 예술가들을 비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상국가에서는 그들을 가차없이 추방할 것이라고 외쳤다. 허상을 모방한 그 알량한 예술품을 가지고, 헛된 정열을 부추긴다는 죄목이었다. 그 사람 말대로라면 우리는 저 풍경에 주석을 달지 않아야 한다. 대상은 다만 대상일 뿐. 그 견고한 물자체의 엄숙함 앞에서 상념에 빠지는 것은 불경스런 짓인 것이다. 그래서인가? 오늘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에 세워두고, 숱하게 셔터를 눌러대면서 현실의 시름을 잊는다. 아름다운 정지 장면 하나 건지기 위해서, 그 순간 시름도 잊고 갈등도 잊으며 좋은 세상 만들자던 맹세도 잠시 잊는다. 그 풍경의 갈피갈피에 스미어 있는 서러운 역사도, 시퍼렇게 풀리지 않은 응어리도 보려 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란 본래 그런 것인가? 우리를 휴식하게 하며, 잠잠히 대상을 바라보고 즐기게 하며, 진공의 영혼이 되어 잠시 이 세상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인간의 삶을 배제한 자연이란, 말 그대로의 이상향일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싸여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생활 아닐까? 우리들 삶의 소중한 도구요 동반자이기에, 아름다운 풍경도 반가운 것 아닐까? 자연 속에 숨겨져 있는 역사의 문맥을 복원해서 알아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상춘(賞春)의 계절에, 그런 눈으로 풍경을 바라본다면, 그림 같이 아름다운 전군가도의 벚꽃도, 지리산의 철쭉도 지금처럼 넋놓고 즐길 일은 아마 아닐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