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5 | [문화칼럼]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80년 광주'에 부치는 비망록
유 석 한국이동통신 연주 대리점
(2004-02-05 15:35:34)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때는 영원히 뇌리 속에 남을 만한 추억들도 기억속에서 가물거리고, 물흐르듯 세월만이 흘러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바뀌어져 갔다.
어렸을 때, 나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망각이라고 생각했었다. 우연히 한 노인을 만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을 물었을 때 그 노인은 서슴없이 망각이라고 대답했는데 자세한 뜻은 몰랐지만 망각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일꺼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그 망각과 만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 많은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고 또한 지나온 하찮은 일일지라도 몇 번이고 되씹곤 하였다.
이러한 습성은 살아가면서 나에게는 삶의 한 방편이 되었으며 주관이 되었다. 지금도 세상을 왈칵 뒤집을 듯한 큰 사건을 접하거나 혹은 인간의 상상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추잡스런 작태들이 우리나라 정치계에 벌어졌을 때는 나는 망각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세상을 바라볼 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자신이 하나의 사건만은 정말이지 이제는 망각의 늪 속에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것은 벌써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치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80년 오월 광주다.
80년 5월,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그러기에 세상의 흐름이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무지였고 단지 아는 것이라곤 집과 학교뿐이었다. 또한 정치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대로 위대한 사람이 정치를 잘하여 어느 나라보다 민주주의 국가였고 또한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했으며 배고프고 못산 사람은 단지 그 개인이 능력이 없거나 게으른 탓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비상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5월 18일 이후, 나의 이러한 생각은 한 순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오직 젊은 날의 분노와 세상에 대하여 속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세상에 대한 올바른 눈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일요일인 5월 18일 오전은 다른 어느 때의 공휴일처럼 시내의 풍경은 한산하였다. 비상 계엄령이 확대되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을 때도 그것이 우리 삶과 무관한 으레껏 정치계에서 해왔던 담화문이라고 생각했을뿐, 그것이 우리 많은 사람들 삶의 변화를 가져올 줄은, 또한 앞으로 전개될 무시무시한 살육과 피의 항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나는 5월 18일 오전 11시가 될 무렵 시내 금남로에서 데모 행렬을 처음 보았다. 이 행렬 또한 동안 계속되었던 대학생들의 시위처럼 삼삼오오 스크럼을 짜며 금남로를 거슬러 올라왔다. 이 행렬은 거의가 대학생 뿐 시민들의 동참은 없었다.
이들이 도청과 조금 떨어져 있는 금남로 카톨릭 센타 앞에서 경찰들의 제지를 받아 더는 전진하지 못하자 그들은 그 자리에 연좌농성을 벌이며 애국가를 부르고 울밑에 선 봉숭아를 부르며 그들이 요구하는 그 무엇을 강하게 외쳤다. 그들의 노래가 아직 끝나지 않을 무렵 무장한 경찰이 사면을 포위하더니 최루가스를 품으며 사방을 협공한 후 닥치는대로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남녀 가릴 것없이 닭잡듯 잡아 가지고 어디로 간 지 모르게 버스에 싣고 떠나보냈다.
연좌농성에서 겨우 빠져나온 대학생들은 동료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으며 산발적인 시위를 했었다. 아직은 손에 든 그 무엇도 없이 단순한 구호 외침으로 경찰이 최루탄을 뿌리면서 쫓아오면 그냥 흩어지고 마는 그러한 시위였다.
오후 1시 무렵, 경찰들은 갑자기 대열을 정비한 분수대로 빠져 나가더니 알록달록한 복장을 입은 공수부대가 아까의 경찰의 위치에 배치되었다. 그순간 나는 반갑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교과서에서 배웠던 군인은 정치에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니 이로써 더 이상 시위확산은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어리석은 기대를 불과 몇 분 후에 송두리 채 무너져 버렸다. 단순한 데모의 행렬에 갑자기 수류탄 비슷한 최루탄을 터트리더니 시위행렬로 쏜살같이 달려와 닥치는 대로 몽둥이로 휘둘기며 군화발로 사람을 짓밟은 것이었다.
이러한 공수부대의 행동에 처음에 시민들은 의아해 했었다. 빈손에 단순한 구호 외침의 행동에 비해 공수부대의 진압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만 했을 뿐 아직까지 시민의 참여나 혹은 시위 행렬의 손에 돌멩이 등의 어떠한 무기가 아직은 쥐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계속된 그러한 행동을 지켜보던 시위행렬은 단순하게 스크럼짜면서 구호만 외치는 식으로 해서는 아무 것도 알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산발적으로 당시 지하도 공수 때문에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는 돌멩이를 주어 들어 공수부대에게 던졌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진압 행동은 더욱 더 잔인해져 이제는 젊은 학생들만이 아니고 남녀노고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기만 하면 떼지어 달려들어와 몽둥이와 군화발을 휘갈겼다.
분노는 서서히 점층적으로 확산되고 이제 시민은 단순한 구경을 넘어 참가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3시 무렵, 공수부대는 영문과 모르고 그 것을 지나가는 한 쌍의 젊은 연인을 붙잡았다. 그들은 여자를 골목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고 남자를 잡힌 그 자리에서 옷을 벗게 하더니 팬티만 입힌 채 끌어 앉게 하였다. 그리고는 예닐곱 정도의 공수부대 놈들이 달려들어 긴 군화발로 짓이기더니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무릎 꿇고 있는 그에게 한 놈이 세차게 달려들어 쇠몽둥이로 머리 한 가운데를 내리 쳤다. 피는 그의 머리에서 뽀글뽀글 솟아오르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주위 시민들에게 파고 들더니 다음 순간 그들은 사나이를 트럭에 싣고 도청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할아버지 아저씨는 물론 국민학교 어린 학생까지 야유와 함성을 지르며 손위 쥐어지는 대로 몰멩이건 철근 조각이건 집어 던졌다.
내가 보는 오월의 기폭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단순한 시위공방이었지만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시민의 가슴속에 치솟아 나오고 이제는 삶과 죽음이라는 갈림길에서 두려움과 공포도 잊어버리고 수많은 시민들은 도청으로 가기 위해 오직 투석만으로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계엄군의 진압은 상상을 넘어서 잔인한 살육의 유희로 더해갔다. 시민들은 오직 분노와 생존을 위한 처참한 항전을 해야했다. 밤이 깊어 간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오후에 접어 들면서 광주 시내 전역에 시위는 확산되고 곳곳마다 어지럽게 뒹구는 최루찬의 파편과 돌멩이, 깨진 블록, 그리고 곳곳에 쓰러지고 어디론지 모르게 끌려가는 사람들…
5월 18일 자정 넘어서까지 곳곳마다 시민과 계엄군은 충돌했지만 다음날이 되자 잠시 국면은 가라앉은 듯 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뿐, 간밤의 잔인한 살육에 대하여 강하게 행의하던 광주 시민들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어제 보였던 늑대 발톱을 다시 보여 대부분이 늙은 시민들이었던 항의행렬을 무자비하에 진압하였다. 어제만 해도 도심외에 이러한 사건이 벌어졌는지 몰랐던 시민들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계엄군의 잔혹함과 무자비한 진압에 고개를 흔들며 설마하던 변두리 시민들이 그 현장을 보자 그들은 하나같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위의 행렬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단순한 이합집산의 조직인데 비하여 그들은 조직적이고 특수훈련된 공수부대였으며 그들은 최루탄과 진압봉, 더더구나 M16과 그 총자루에 날카롭게 꽃힌 대검으루 무장했지만 시민들의 무기라고는 돌멩이 밖에 없었으니 더 이상의 전진과 분노의 삭임은 없었다.
내가 들은 최초의 총소리는 5월 19일 상무대와 공수부대가 주둔중인 전남대학교에서 울려 퍼졌다. 단순한 단발의 총소리가 아닌, 밤 새 콩볶듯 울려 퍼지는 총소리, 5월 21일에 접어 들면서 시민들은 아세아 자동차에서 빼앗은 장갑차와 시민들 스스로 지원한 트럭 버스에 올라 타 도청과 계엄군이 주둔한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12시가 되자 금남고 사거리는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 들어서 저마다 도청 앞으로 질주하고자 돌멩이와 자량 질주를 통한 계엄군의 벽을 뚫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계엄군들이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한 사격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남겨야 했다. 희생자 중 몇은 시민의 손에 의하여 리어카에 시려 후미로 빠져나왔다. 이제 시민들의 분노는 무서운 활화산처럼 터져 오르고 누구나 할 것없이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시민의 총이 쥐어지고 다이너마이트가 쥐어지자 시민들은 힘을 얻어 도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EO까지만 해도 총만 들었을 뿐 총알이 없는 단순한 보여줌을 위한 총이었다. 시민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총이 있으니 우리도 한 번 싸울만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결국은 도청을 접수하고 6일간의 해방 세상을 맞이하였다.
광주의 해방기간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나날들이었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자가 그리는 그 이상의 정치였다. 범죄는 몰론 이려니와 그 흔한 싸움조차 없었으며 잘 사는 사람이건 못 사는 사람이건 간에 서로 의자하며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고자 했다. 질서는 누가 강조하지 않아도 잘 지켜졌으며 서로의 고충을 물어가며 그것을 돕고자 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총을 맞아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병원에는 헌혈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행렬들로 끝이 안보였으며 심지어 어떤 할머니나 자기가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음이 안타까워 병원에서 자발적으로 뒤치다꺼리하고 싶다며 자원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많은 광주 시민이 힘을 합해 광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은 점령당하고 말았다.
당시 나는 어린 학생이었지만 그간의 목격했던 계엄군들의 만행과 또한 해방기간에 정말 맛볼 수 없는 세상을 적어도 저 잔인한 계엄군들에게 뺏기면 안될 것 같아 총을 들었다.
새벽 3시에 계엄군이 밀려온다는 사이렌 소리와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에 우리는 도청 맞은 편에 있는 YMCA에 자고 있다가 깨어 총을 들고 분수대앞에 배치를 받았다. 다행이었는지는 몰라도 직접 계엄군과 대치된 국면을 맞이하지 않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계엄군의 총과 수류탄에 죽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뿐만아니라 새벽내내 치열하게 도청 곳곳에서 싸웠던 광경이 생생하게 지금까지 살아있다.
나는 도청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제일 마지막에 잡혔다. 당시 어린 고등학생으로서 5월을 체험한 나는 크게 나누어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한가지는 오월 그 자체의 분노다. 어떠한 능력있는 영화감독이 영화를 통하여 시각적으로 있는 그 사실을 그대로 표현했다하나 시청자가 당시 광주시민이 하나같이 느꼈던 분노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며 슬로써 수많은 형용사를 앞세워 표현했다 하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분노의 알갱이는 세월속에서 굳어진 앙금으로 남아 있는 듯하고 그것이 직간접적으로 지역문화의 독특한 특수성으로 남은 것 같다. 즉 오월의 그 앙금이 아직까지 지역정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앙금이 풀어지지 않는 한 분노의 오월은 적어도 광주에서 만큼은 계속될 것이다.
또 하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참으로 민주적이고 참다운 인간세상을 해방기간에 맛보았던 우리들은 싸운만큼 스스로 노력한 만큼 이상적이고 동경하는 사회가 온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래서 그 뒤로도 많은 시람들이 불의에 대한 싸움들을 멈추지 않았으며 또한 지금도 참세상을 위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5월은 이러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지금은 커다란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도 오월에 대한 정확한 진상 규명과 당시의 살육을 지시한 사람들이 번연히 권자위에서 웃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이 5월을 이야기 하고 망월동에 참배한 후 마치 오월 영령과 그들이 서로 교감하는 민주 인사라고 허세를 부릴때면 배알이 뒤틀릴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5월이 지난뒤에 아무런 성과물 없이 이렇듯 세월만 보냈음이 한탄스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이는 생각할 뿐 나는 지금 현실속에서 터전을 잡고자 많은 시간을 그 속에 허비한다. 심지어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끈 한 사회의 가장으로 살아가기 위하여는 때로는 5월도 팔아먹을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뒤돌아서 후회를 해대지만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스스로 젓는다. 즉 아직까지 오월은 현실과 그 간격의 틈을 조금도 붙이질 않았다는 것이다.
한때는 오월 영령 앞에 산자의 몫으로 오월에 참다운 자리 매김을 하겠노라고 망월묘지 앞에 맹세하였건만 이제 그 신념은 서서히 현실속에서 나도 몰래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속에 오월은 나에게 있어서 언제나 무등산 만큼 무게있는 부담감을 준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고 남에게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해도 오월만 생각하면 그러한 욕심은 누그러진다. 그래서 그런지 가정을 가지고 있는 가장의 생계는 언제나 고달프기만 하다. 오늘 아침에도 마누라는 간 밤에 술에 취한 나의 모습을 보고 과거일은 잊고 현실을 똑바로 보랜다. 우리도 남들처럼 잘 살자는 이야기이다. 이럴 때면 정말이지 오월을 망각하고 시다. 정말이지 기억속에서 사라졌으면 싶을 때가 있다.
지우고 싶어도 지우지 못하는 그해 오월…
그러나 그 해 오월이 참 세상의 희망을 주었듯이 잔인한 살육의 현장같은 이 시대를 딛고 일어나 해방기간의 5월 광주가 다시 오리라 믿으며 오늘도 현실속에 위태롭게 남아있는 오월의 신념을 다시 한 번 정돈해보고 또 다른 총을 들기 위하여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해본다.
누가 뭐라든, 정치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든 시대가 변하든 간에 지금도 오월은 계속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