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4 | [사람과사람]
갑오년에 모둔 30년, 그 지난한 세월
정읍문화원 최현식원장
원도연 문화저널 편집장
(2004-02-05 15:17:44)
정읍을 달려가는 그 길은 언제나 싱싱한 봄날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읍을 달려갈때면 언제나 그 싱싱한 에 걸맞는 일감들로 나는 부풀고 들뜨곤 했었다. 대학시절 맨처음 정읍 너른 들판의 답사길에서 나는 백여년전에 이곳은 참으로 젊고 왕성한 고을이겠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이 고을의 역사적 나이는 몇 살쯤일까. 천년을 한결같이 지켜내면서 전라도를 먹여 살리고 나아가 한나라를 먹여 살렸던 이 고장의 무서이 그 많은 젊음들을 혁명의 열정으로 달구어냈을까...
그랬다. 내 뇌리속에 박혀있던 동학의 젊은 지도자들은 한세대를 뛰어넘어 80년대를 그저 부대끼며 살아내야 했던 바로 이 땅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른ㄹ 그 80년대를 건너서, 그리고 바로 작년의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짚어 오면서 다시 정읍으로 향하고 있다. 그 정읍의 역사에 청진기를 들익대고 너에게 역사란 무어냐고, 너에게 80년대는 무엇이었냐고 끊임없이 물어오는 한 지적 장인(匠人)을 만나러 나는 가고 있었다.
<들어라 양키들아>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는 이르기를 생활과 지적작업의 끊임없는 결합만이 지적 장인을 성장시킨다고 했다던가. 그런 의미에서 최현식 선생은 분명 누구도 뒤따르지 못할 훌륭한 지적 장인이라고 부르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어렴풋이 존함 석자만을 흘려 듣곤 했던 내가 선생을 처음 뵈었던은 92년 막 창립작업에 들어서고 있었던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을때였다.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농민전쟁을 기념하는 단체에서 일하면서, 더구나 이 지역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내가 선생을 그렇게 뵈었다는 것은 결코 자랑이 아니었다. 그때 선생을 처음 뵈면서 나는 깜짝 놀랬었다. 아니 이제 일흔의 연세를 눈앞에 둔 어른이 저토록 늙지 않으셨을까!선생의 일흔의 연세를 목전에 두면서도 결코 늙지 않고 계셨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당당한 못짓은 선생의 살아온 흔적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쌀쌀한 초봄의 날씨를 완연히 걷어들인 토요일 한낮의 정읍문화원은, 푸르게 돋아나는 새싹을 움켜쥔채 천변을 가로지른 수양버들을 마주하면서 아듬하게 서 있었다.
"아아 자네였구만..."
다행히도 선생은 나를 바로 알아봐 주신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건네지고 나는 곧바로 선생께 작년의 백주년에 대해서 여쭤보았다. 기실 94년을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 작년의 백주년은 가뿐함보다는 아쉬움으로 남아 이썬 않던가. "아쉬웠재. 아 생각혀봐 우리가 일제시대부터 언제 한번 제대로된 민족 교육을 해봤느냐 이거여, 역대로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은 민족의식을 마취시켜 버렸어, 이것이 백년을 흘러 왔는디 어째서 아직도 동학군이 비도요 역적이냐 그말이여! 그래서 이제 백주년이 되었기에 그것을 바로 잡자했는디 그것을 못혔어. 동학도들이 교조신원운동을 하듯이 뭣보다도 먼저 갑오선열들의 신원운동을 하고 그방법으로 각 계층별로 서명을 받아서 국회에 청원을 했어야 했어. 그렇게 몇만명이고 몇십만명이고 해가지고 국회에 제출을 하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어. 그러면 상황이 달라지잖여, 역사라는 것은 사실을 명명백백 밝힐 때 가치가 있는 것인디 공연히 이런저런 행사 한번으로 끝나버렸은께."
선생은 여전히 젊은이였다. 몇만명이고 몇십만명이고 조곤조곤 서명을 받아서 그 힘으로 국가가 동학군들의 억울함을 살피고 신원을 선언했어야 했다고 선생은 아쉬워 하신다. 이름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선생을 찾는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 이름을 찾아달라고
"내가 작년에 그랬어. 어리가 가차운 것 하나 합시다. 원평 가면 동학무명군의 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거기서 기념사업 하나 해서 위령탑이라도 하나 세우고 11월25일날 원평싸움에 사람들이 죽어서 이곳에 묘가 있다. 천하 알기 쉽고, 하기 쉽고, 눈앞에 있는 일들 하나 하자. 그랬는디 이것을 못해, 역사교육이 없는 민조이라, 역사의식이 없어서 그래"
아, 역사의식 없는 민족... 선생의 말씀에 곪은채 부기만 가라앉아 버려 이제는 만성이 되버린 가슴의 상처 하나가 아려온다. 80년대에 그당차게 변혁을 꿈꾸던 날밤을 새우던 오늘의 30대는 다 어디에 가있는가. 민주화 운동과 컴퓨터를 동시에 겸헌 첫 세대 근 날고 기던 30대들은 너무 쉽게 타협해 버리고 않았나? 심지어는 어느 한켠에 비켜서서 저네들이 살아냈던 그 80년대를 또 조롱마저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살았던 80년대가 어땠는지 알아!' 역사를 다 아는체 하고 있는 이 삼십대의 애늙은이는 일흔셋의 젊은이에게 다시 또 혼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동학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선생에게 있어서 동학은 삶 그 자체였다. 그누구 한사람 거들떠 보지 않던 시절에 선생은 동학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천리길을 마다 하지 않았다. 선생의 반편생이 동학과 함께 흘러온 것이다.
1923년 고창군 아산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당시 아산 석곡국민학교를 늦깍기로 마치고 41년 18살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했다. 그러나 2차대전의 와중에서 고향으로부터 날라드는 귀국 도촉전보에 못이겨 선생은 3년여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주위에서 선생을 아껴주던 선배들은 선생에게 대학에 가서 좀더 공부할 것을 권했지만 돌아온 조국은 여전히 세상 시끄러웠고 서울의 대학들은 영시원찮게 보였다. 그래서 선생은 고향땅에 들어낮아 보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으며 농사 짓고 살겠다는 스스로 묻혀 버렸다. 그러다가 선생에계도 예외없이 날라든 징용에 몸을 피했고 이듬해인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 선생에게도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주위에서는 이제라도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고 선생역시 한동안 서울을 오가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눈길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는 이 순백한 청년서생에게 웬지 모를 허전함과 부질없음의 느낌만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후 한국전쟁을 만나면선 선생은 역사와의 길고 긴 대회를 시작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52년 서울로 올라가는데 필요한 도강증을 구하러 나섰다가 선생은 마침내 정읍에 주저앉아버렸던 것이다. 이 시절에 선생님은 역사에 남다른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애초에 뜻을 두었던 문학보다는 웬일인지 역사책에 훨씬 더 빠져들었다. 그 시절에 읽었던 최남선의 <고사통(故事通)>,<대한역사>등과 역사책들은 선생의 인생에 길잡이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선생은 마침내 동학에 운명처럼 빠져들기 시작했다. 선생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던 책은 장봉선(張奉善)이 1936년 정읍군지에 수록한 책이였다. 사실 선생에게 전봉준은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선생의 외조부가 바로 전봉준 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있었고, 증조부가 때때로 이야기하곤 하던 전녹두, 손화중 등의 이름은 선생의 어린 시절 기억속에 아련히 남아 있었다. 더욱이 선생의 증조부는 생전에 당신이 동학군과 싸우로 홍덕접전에나갔다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곤 했었다. 그 세상 어지럽던 시절, 이제 갓 서른을 넘어선 젊은이는 「전봉준실기」를 읽으면서 홍덕에서는 싸움이 없었다는 신기한 사실을 발견해 내고 그 역사속으로 몰입해 갔다. 1963년 지금 황토제에 전적비가 세워지면서 선생의 지적 호기심은 극도로 발동되었다. 「전봉준실기」를 수도 없이 읽었고 59년에 발간된 「동학란기록」을 낱낱이 읽어가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지명들을 직접 답사하고 취재하면서 하나하나 확인해 갔다. 그 시절에 교통인들 어땠겠으며, 하물며 통신이나 복사시설인들 어땠겠는가. 더욱이 새벽 눈뜨면서 '새벽 종이 울렸네'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던 근대화 지상주의 시대에 누가 선생을 고단한 작업에 눈길이나 주었겠는가.
사실을 명명백백 밝히겠다고 나선 선새의 일에 이렇다할 방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운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림들은 여전히 입을 열어 말하기를 두려워했고 굳이 물어보지 않는 한 누구도 먼저 말해주는 일은 없었다.
"내가 최경선을 찾는데 10여년을 두고도 못찾았어, 태인 최경선을 놓고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 그런데 얼마만인가 당시 서해방송에 있던 최경선 후손이라는 이를 만났어. 그래서 족보를 보자 그러니까 죽 나오는 거야.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 사람들이내가 다아는 사람들이야. 내가 물론 그 사람들한테 당신 할아버지가 최경선이요 하고 물은 적은 없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내가 정읍에서 동학관계일을 하는 것을 다 알아 알면서도 이야기를 안해준거야"
선생의 집요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동학군 지도자들이 모두 고창이나 정읍 등지로 흩어졌다가 잡혀오는데 왜 유독 최경선만은 전남 동북에 가서 잡혔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듯하는 그 사건을 두고 선생은 몇 년간을 또 찾아 헤맸고 마침내 최경선의 외척이 동북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를 확실하게 확인해 두었다.
동학에 대한 선생의 외롭고도 집요한 추적은 계속되었고, 농민전쟁이 역사의 긴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면서 이런저런 답사자들의 발길이 선생앞에 머물러갔다. 한국의 사학계를 한편에서 대표하고 있는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선생은 선생의 선구자적 노력에 대해서 두말할 것 없이 높은 평가를 내린다. "무엇보다도 인품이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학문적인 고집도 있고 이런 일을 하면서 명예를 탐하지도 않았지요. 우리 후배들에게는 참으로 귀감이 되는 분입니다. " 재야사학의 백전노장 이이화 선생은 "내가 깊히 존경하는 분"이라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하신다.
이런 선생의 연구가 집대성된 것이 1980년 초판을 낸 선생의 『갑오동학혁명사』라는 저술이다. 그리고 4월말경에는 선생이 다시 그동안의 자료를 추가하고 새롭게 보강한 개정판 이 낭올 것이라고 한다. 이번 개정판에서 선생은 무엇보다도 인물에 대해서 애정을 쏟았다.
백주년에 즈음해서 동학군의 후손이라고 하는 이들이 선대의 자취를 찾아 선생을 찾는 발기 부쩍늘었고, 그들은 거개가 50-69대의 어른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선생을 찾을때면 선생은 사료를 뒤져 가능한한 사실을 확인해주곤 하지만 어찌 그 일이 선생 혼자인 힘만으로 가능할 것인가. 더구나 이제 선생을 찾아오는 그 세대들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나마도 완전히 묻혀버릴 것이라고 선생은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작년 백주년 기념사업 가운데서 정읍의 젊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신중리에다 무명농민군의 위령탑을 세운 일을 가장 기특하게 여긴다고 하신다.
그렇듯 동학에 일생을 쏟아온 선생이지만 정읍 역사의 곳곳에는 선생의 흔적이 묻어있다. 몇해전 정읍이 정주시로 행정구역을 개편했을 때 선생은 '정주'라는 명칭이 못내 마땅치 않아 정읍문화원이라는 간판 마저 바꿔달지 않았던 것은 선생의 학문적인 고집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있다. 정읍은 그 옛날 신라 경덕왕때부더 불려오던 역사적인 지명인 것을 왜 뿌리도 없는 정주시로 이름을 바꾸야 하는냐는 것이 선생의 고집이었다. 우암 송시열이 이곳 정읍땅에 와서 죽은사연, 그리고 고운 최치원의 사당이 왜 이곳 무성서원에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을 때 선생은 끊임없이 '왜'라고 물으시면서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고 정읍의 역사를 살찌웠던 것이다.
적어도 하난의 역사적 사실을 만나면 그것을 "옆으로 파고 뒤로 조사해서" 확인하고 "좌초지종을 밝혔을 때" 비로소 역사로 기록될수 있다는 것이 선생의 신념이다. 선생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겠다고 나선면 이야기는 어느새인가 다시 천년의 역사로 그리고 백년전 동학군의 이야기로 돌아가버린곤 했다.
"내 목표는 철두철미 사실을 밝히는 것이야. 하나라도 의심을 품고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지. 그러다 보니까 않된 것이 뭐냐면 동학때 죽은 사람들이야. 백년이 지나고 나서도 아직도 비도라고 그리고 역적이라고 누명을 씌운다 말여, 명색이 독립이 됐고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라고 한다면 이것은 꼭 밝혀야 한다는 거야. 물론 이것은 안밝힌다고 밥을 못먹는 것도 아니지만 명색이 민주사회에 산다면 이런 것은 밝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을꺼야.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야할 아무 이유가 없어 당장에 영화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선생에게 역사는 어떤 '필요'가 아니었다. 선생은 그것을 "재미로 알고 했고", "다른 것 필요없었다"고 한다. 선생이 여전히 늙어버리지 않고 아직도 20대의 정열로 역사앞에 정진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었기에 선생은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고, 그 눈매만큼이나 서글서글한 마음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생각 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떠올려 기억하기도 쑥스러워져 버린 8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내가 선생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몇 살이 되어 있을까, 한국 근대사가 시작되었던 그 지점에서 해방공간을 건너, 분단과 전쟁과 억압의 세월을 건너, 순백색으로 살아온 선생을 바라보며 나는 뚝배기를 떠올렸다. 선생님이 담아온 '역사'는 언제나 이 세상 구석진 곳에 있었지만, 역한 기운을 밖으로 내보내고 그 은은한 향기로 세사응ㄹ 밝히는 뚝배기 맛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내가 20대를 보냈던 80년대의 강렬한 여진이 이제는 그 뚝배기에 담겨져야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