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4 | [문화시평]
절망과 추함이 맞물린 상징의 변주음
창작극회의 『진흙』공연을 보고
김길수 순천대교수 연극평론가
(2004-02-05 14:54:45)
진흙 투성이 삶, 무지 투성이의 삶, 본능으로 꽉차버린 일상, 도무지 희망이로곤 찾아 볼 수 없는 곳, 무대벽면에 내걸린 옆총과 도끼, 이들의 섬뜩한 이미지, 오래되어 못쓰게 된 벽난로 안에 무질서하게 채워져있는 가재 도구들, 조아하고 거칠게 놀려져 있는 옷다발들, 암갈색의 실제 흙으로 발라져 있는 무대 벽면 구조물들, 국내 초연이나 다름없이 올려진 『진흙』마리아 아이린 포네스 작, 류경호 연출) 공연, 창작 소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공연 초입부터 이런 답답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버린 듯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암울하며 찝질한 분위기의 연속인 이 공연 무대를 접한 전주 관객들은 20세기 오늘날에서도 과연 이런 곳, 이런 삶이 있었나 할 정도로 의아함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이 공연의 마지막은 더욱 으스스하고 기분 나쁜 분위기를 일관되어 있따. 관객의 간담을 써늘케 했던 총성이 들려 오고 뒤이어 축 늘어져 죽어가는 한 여인이 한 사나이의 어깨에 메워져 들려 나온다. 그는 자신의 여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나머지 그녀를 차지했다고 좋아라 한다. 그러나 얼마후 그녀가 숨을 거두자 그는 마치 짐승 같이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마치 진흙 구덩이를 밝을 때 기괴한 소리가 들려 오듯이...
빛과 자유를 갈망했던 여인, 그녀의 마지막 음성이 떨리며 희미하게 사라질 때 두 남자의 절규가 기괴하게 들려온다. 한 남자는 중풍 병자의 소리로, 또 한 남자는 원시인을 방불케하는 바보 같은 소리로... 비상이고도 괴이한 이들의 모습은 절망과 추함이 맞물린 변주음을 방불케 한다.
씁쓸한 뒷맛을 남긴 이 연극, 지극히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육두문자들의 난무,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삼각관계의 에피소드는 이 공연의 긴장감, 통속적인 재미, 그리고 연극적 기대감을 오랫동안 자아내는 데에 기여한다. 힘든 다리미질에서 일의 기쁜을느끼는 메이(류지애 분), 그녀는 학교 산수 공부를 통해 더욱 진보할 수 있다는 설레임에 젖어 있다. 바로 메이라는 여인을놓고 벌이는 저능아 로이드(오진욱 분)와 부랑아 헨리(류경호 분)간의 저급한 질투와 천박한 싸움의 형태가 이 공연의 전체 틀을 이루고 있다. 조개집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집게들의 싸움 이야기가 책을 읽는 메이의 교과서 낭독 과정에서 상기되어 진다. 단순한 집게들의 이야기가 서서히 암투를 벌이는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확인한 두 남자, 한 동안 긴장감과 침묵이 이어지고 서로를 쏘아보는 눈빛이 불꽃을 튄다. 저자 거리에서 부랑아로 떠돌며 달아질대로 닳아빠져 신경질과 냉소로 일관하는 헨리의 몸동작,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저능아 로이드(오진욱 분)의 기괴한 신체 연회, 이 두 이미지의 대립과 충돌은 긴장의 폭을 두텁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한 여인에 기생하여 살아가려는 해괴한 두 남자들의 행태가 다양하게 변형되어 나타나고 그것들은 마침내 동화 들려주기를 통해 상징적이나마 비판의 대상이 된다. 뒤이어 낭송되는 '불가사리 이야기'는 여주인공메이의 삶을 새롭게 조망하게 해준다. 죽어서 부패한 생물체만을 먹어 치우는 불가사라의 존재, 그것에 대한 언급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나마 빛과 자유를 갈구하는 여주인공 메이의 존재를 상징하여 준다. 이러한 상징성들은 매 장면마다 선보이는 정지화면 내지 동결 처리 기법을 통해 성찰의 묘미를 자아내는 원동력이 된다.
본능, 신체 불구라는 비정상의 이미지, 무지, 탐욕, 소유욕의 이미지 이런 이미지들을 일깨워 보고자 하는 오진욱의 신체 언어 탐색 의지는 성실하며 교과서적이다. 마치 원시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한 분장을 그의 외형, 그의 음색, 그의 몸동작, 병에 걸려 괴이하니 신음소리를 지르는 그의 모습, 부족함의 이미지, 본능으로 얼룩진 기괴성의 이미지, 이런 성분들에 대한 탐색이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일관된 설계 구조로 실현되어 나타난다. 무대 중앙의 탁자를 이용하여 탁자 밑에서 유아들의 움직임을 방불케하는 저능아 로이드 해프닝, 탁자의 발목 이미지와 접목되어 새롭게 변용된 비정상적이며 괴이한 이미지들, 탁자 위에서 애완용 동물들이 벌이는 것 같은 저급한 짓거리들, 이 밖에 식탁 위에 불안하게 서 있으려 하는 반이성적인 이미지 등은 조화, 질서 아름다움 그리고 건강함을 잃지 않으려는 다른 인물들의 움지임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식탁 기도 상황은 대조의 묘미를 현저하게 맛보게 함으로써 이 공연의 압권에 속한다고 볼 수있다. 교육을 받은 바 있고 이미 교회 문화, 그밖의 물질 문명의 생활 구조가 온몽에 밴 부랑아 헨리, 그는 아무런 감흥이 없이 식탁 기도를 한다. 그의 언어엔 도무지 참된 신앙이란 찾을 수없다. 그러나 메이는 처음 듣는 이 식탁 기도에 너무나 감격하여 울먹이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반복된 기도 소리에 그녀의 감동은 절정에 달한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그녀, 창조주의 은혜를 올바로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저능아 로이드는 사랑하는 메이가 울먹거리자 기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저 같이 울먹거릴 뿐이다. 저능아 로이드의 울먹거림은 가관이다. 울적 거리는행위와 더불어 입속에 식빵이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과 반문명, 교육과 반 교육, 신앙과 불신앙, 교감과 단절, 이처럼 이미지들 간의 대조가 이 장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이밖에 돈을 움켜쥐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두 남자의 저급한 싸움 행태 병원을 가기 위해 도끼를 짊어지고 가려는 이미지, 조심스럽게 복용해야 할 약을 한꺼번에 입속에 쳐 넣다가 뱉는 행위, 솓가락으로 떠 넣어준 우유가 헨리의 일그러진 입에서 다시 흘러나오는 기괴한 이미지, 이런 부족한 모습들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각각 따로 노는 듯 하지만 실제로 암흙과 절망이라는 이 공연의 전체 주제를 두텁게 구축하는 데에 기여한다.
이런 이미지들 사이에 자유와 희망의 비젼을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 메이의 이미지가 삽입되어 상호 충돌한다. 일의 건강성, 학교교육을 통한 새로운 비젼과 순결한 동경 의지, 이는 다리미질이란 건강성의 이미지로, 그리고 질서있게 쌓여져 있는 옷들의 이미지로 급기야 쉽게 감동해 버리는 식탁기도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무대 이미지의 흐름과 그 전재 구조가 완벅하다거나 통일성을 계속 유지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치유 불능의 절망 상황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인 부조화, 의도적인 불일치 이미지가 존중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색깔의 부조화, 소품간의 부조화, 무대 그림의 부조화, 등퇴장의 획일화는 작품의 주제를 올바로 바라보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무대 소품의 단순한 나열과 그것들의 적극적인 활용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총 , 도끼, 무질서한 옷꾸러미들, 이들 소품들이 동적인 에너지를 발휘하여 무언가에 내쫓기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충분히 방여하였는가에 대해선 확실한 긍정을 하기 힘들다. 열일곱개의 장면 나열과 번거로운 그 틈새들, 이 장면 나열과 번거로운 그 틈새들, 이를 단순히 변증법적 사고 내지 냉정한 자기 성찰 과정으로만 꼭 볼 수는 없다. 각 장면에 대한 다변화된 매듭 처리 과정은 더욱 다양한 반응과 다양한 인식을 유도할 수있었을 것이다. 일부 핀 조명의 지원을 통해 드러난 마지막 무대 구조물(다리미판)의 상징성, 이에 걸맞게 미리 예시된 배우들의 마임과 음색 개발은 제작진의 신선한 탐구 정신을 반영하여 준다. 그러나 각 이미지들 간의 만남과 조화 그리고 상호 부딪침의 흐름이 정밀한 앙상불을 이루어 완전한 심미성을 얻어냈느냐 하는 점은 확실치 않다. 「산돼지」공연 이후 류경호의 상상체계가 부분적이나마 결실을 얻어 가고 있따고 본다면필자의 지나친 과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