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 | [문화시평]
우리는 왜 젊은 작가들에게 인내를 주문하는가
글 이상조 화가·전북대 교수(2003-03-10 19:17:39)
전북 청년작가 위상전이 전북미협 주관으로 소리 문화의 전당 전시실에서 열렸다. 매년 한 해를 보내며 젊은 작가들의 활동을 결산하는 이 전람회는 젊고 유망한 차세대 작가를 발굴하여 그들의 창작 의욕과 작품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개최된다.
올해로 8회 째를 맞은 이 전시회의 기획 의도에는 젊고 유망한 차세대 작가라는 '미래지향적 성향'과 '독지가의 도움'이라는 두 가지 컨셉이 있다. 이 두 컨셉은 지역 사회가 예술의 목적과 예술 작품의 공공성을 위해 젊은 작가들에게 보다 가까이 접근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주목할 일이다. 특히 예술 외적으로 인간 정신을 모든 가치보다 우위에 두던 사회가 갑자기 요즘처럼 물신 숭상의 시대로 변화되고 내적으론 다국적 혼성주의라는 국적 불명의 예술을 추구하면서도 또다시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이율배반적 현상이 일어나는 어수선하고 불분명한 분위기이기에 더욱 그 의의가 크다.
사실 젊은 작가들이 그들의 뜻대로 그림 그리는 일 만을 계속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언젠가 영화 한편의 부가가치가 수 십만 대의 자동차를 수출한 이윤과 같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예술은 한량들의 짓거리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상품으로 자리매김 된 적도 한 때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술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산 활동이라고만 알고 있는 사회구조 속에서 당장 '밥'으로 변하지 않는 창작에 매달릴 젊은이들은 흔치 않다.
예술이 쉽게 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미술 판만 보더라도 멀리는 고호나 고갱, 가까이는 이중섭과 박수근 같은 우리들의 영웅들의 지난했던 삶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고호는 자기의 그림이 '쓸모 있는 것이 될 때가 온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젊은 작가들은 그러한 믿음은 꿈조차 꾸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러한 신념의 차이는 고호가 우리 사회와 같은 예술과 생활이 따로 존재하는 사회구조가 아닌, 예술이 생활 속에 존재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예술을 즐겨 향유하고 그것의 공공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나 언젠가는 일궈 내야 할 우리 사회의 과제인 것이다.
필자는 이번 전북 청년작가 위상전을 계기로 이 지면을 통해 우리 지역에서 독지가들이 젊은 작가들을 위해 마련한 제도를 널리 알리려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도들은 사적 도움에 의해 마련되었으나 공공성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렵게 마련된 기회이기에 지속적인 존속과 확대를 위해 젊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위상을 사회 구조 속으로 드러내는 공론의 장치를 스스로도 마련하길 촉구한다.
독지가들이 마련한 젊은 작가를 위한 제도로 미협이 주관하는 '전북 청년작가 위상전' 얼화랑이 주관하는 '청년 작가 상' 경원아트홀이 주관하는 '한 무리회 상' 개인이 수여하는 '반영 미술상' 등은 형식은 다르나 수상작가에게 전시회를 개최할 기회와 시상금이 수여된다. 서신갤러리가 주관하는 '무료대관 프로그램' 과 '젊은 시각전'은 시상금 없이 전시회를 무료로 기획 개최한다. 또한 갤러리 민촌에서는 매년 4-6회의 무료 개인전을 유치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각종 공모전이 제 기능을 발휘 못하고 의혹과 질시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금, 이러한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이 지역 작가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전에 만나 본 많은 작가들은 미술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각종 공모전에는 매우 회의적인 반면 이들 사설 제도들엔 "상을 탈만한 작가들이 타고 있다"며 제도의 운영과 공정성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제도는 그 운영 방법에 따라 성패가 가름된다. 그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들의 예술적 안목과 도덕성이 그 상의 권위를 높여주며 관람자들이 예술에 대한 선입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야만 다양하고 폭 넓은 예술의 정체를 인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사회 구성원 전반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각 주관 단체마다 차별화 된 컨셉을 갖고 시상에 임하라고 주문하고 싶다. 지난 몇 년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각 주관 단체마다 심사한 심사 대상 작가들이 거의 비슷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결과는 이 지역 작가들의 수가 적다는 사실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지역 미술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 할 수 있는 방향성을 갖춘 독특한 시상 컨셉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역 미술의 진정한 발전은 단지 시상에만 있지 않다. 시상이란 진정 과거에 대한 집착에 다름 아니다. 공로상이 아닌 미술의 발전을 위해 젊은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라면 미래 지향적 성향의 비전을 가진 작가에게 수여함이 타당하다.
이 기회에 우리 사회가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대표적 선입관을 지적해 보자. 필자가 만난 대다수의 관람자들은 '좋은 작품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 는 질문에 "보기 편하고, 완성도 높고, 밀도 있는 작품" 이라고 답하였다. '보기 편하다'는 것은 인식의 보편성을 뜻하고 '완성도와 밀도'는 기술적 숙련을 뜻한다. '인식의 보편성과 기술적 숙련'이란 인내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젊은 작가들에게서 어떠한 작품을 원하고 있는가? 우리는 정녕 젊은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인내한 원숙함을 주문하는가?
아울러 지역 미술의 활성화를 위해 또 다른 조언을 하자면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세계소리 축제, 전주 국제 영화제 등 커다란 행사를 치르며 행사 기획자라 총칭된 '사람 난'을 겪어 왔다. 미술도 화가와 관람자 사이에 여러 가지 장치가 필요하며 그 으뜸이 그 둘을 이어주는 미술 평론가, 큐레이터 등 미술의 이론과 행정, 전시의 기획, 마케팅 등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이들에 관한 육성 계획도 시급히 서둘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