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3 | [문화와사람]
아쟁산조 탄생시킨 예인
장월중선(張月中仙) ②
최동현 군산대교수.판소리 연구가
(2004-02-05 14:33:37)
장월중선은 또 당시 정읍에 살던정자선을 찾아가 고전무용을 배웠다.
정자선은 정읍사람으로 당시 정읍권번에 있었는데, 승무와 살풀이로는 당대의 최고 대가였다. 따라서 누구든지 승무와 살풀이를 배우려면 정읍으로 와야했다. 그의 춤은 아들 정형인을 통해서 전주 일원에 퍼졌다. 후에 장월 중선은 이동안을 목포로 모셔다가 다시 전통 무용을 배웠고, 박송암 선생으로부터 범패, 홋소리, 짓소리, 나비춤, 천수바라, 법고 등 불교 음악과 춤을 배우기도 했다.
가야금 산조는 당시 서울에 있던 김윤덕을 찾아가 배웠다. 김윤덕은 정읍군 입암면 사람이며, 정남희를 통해 가야금 산조를 배웠는데, 가야금 풍류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서울로 올라 온 뒤에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23호 가야금 산조 기능 보유자가 된 사람이다.
이상 장월중선의 수업 내용을 보면 참으로 다방면에 걸쳐 당대의 대가들에게 두루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월 중선은 어느 한가지만을 반복해서 배웠 다기 보다, 전통 예술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다양한 체험을 쌓은 것이다. 훌륭한 선생이 있다고 하면, 무슨 분야든지 상관하지 않고 곧 찾아가서 배우는 열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열성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다방면에서 걸친 재능이 없었다면, 아무리 뜨거운 열성이 지니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그렇게 짧은 기간 내에 제대로 소화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월중선이 활발한 활동에 나선 것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6.25 무렵까지다. 그는 이때 주로 임방울 협률사, 국극사, 조선창극단, 임춘앵 여성 창극단 등에서 활동을 했다. 임방울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활동한 최고의 소리꾼이었다. 임방울은 창극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전통 판소리만을 고집하던 사람이었다.
국극사는 1948년 3월 조상선, 정남희,백점봉,김재선 김장원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던 단체로, 해방후 창극부흥기의 선두역할을했던 단체이며, 조선 창극단은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창극단인데, 해방후에 안기준이 재조직한 단체였다. 여성 창극단 역시 1948년부터 태동하여 여성 출연자들만으로 운영되었는데, 인기가 대단히 높아 1950년 무렵에는 다른 창극단들은 아예 문을 닫을 정도까지 될 지경이었다. 임춘앵은 여성창극계의 거물로, 한때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장월중선은 이런 단체에 몸담으면서 연기도 하고, 작곡도 하고, 안무를 맡기도 했다. 부지런히 다듬은 다방면에 걸친 능력으로 다양한 일을 할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장월중선이 활동을 시작하던 해방전후부터는 판소리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창극이 판소리 공연의 주요 내용이 되었으며, 그것도 차차 전통 판소리의 레파토리를 벗어나면서 창작 창극(국극이라고함)으로 이행해 가고있었다. 그러다가 6.25를 거치면서 그것마저 한풀 꺽였고, 1960년 무렵에는 모든 창극, 혹은 국극단이 무너지게 되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장월중선이 할수 있는 일은 자연히 소리보다 연기와 작고, 안무가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경험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아쟁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극 중의 반주를 하면서 서서히 손을 대기 시작한 아쟁이 후에는 아쟁 산조를 만들어 낼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6.25무렵까지 이런 저런 활동에 매달리던 장월중선은 6.25후 단체 생활을 청산하고 목포로 옮기게 되었다. 목포에서 국악원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때 배운 사람중에는 안행련, 신영희 등이 있다.
그러나 목포 생활은 별로 좋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판소리는 이미 쇠락 할대로 쇠락 하여 더 이상 생계의 방편이 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판소리를 통해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으니 어려움이 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0여년의 목포생활에서 가장 값진 성과로는 아쟁 산조를 만든일을 들어야 할 것이다. 본래 아쟁은 정악에서 쓰던 악기로, 정악에서 저음부를 담당했었다. 그런데 박성옥(1908-1983)이라고 하는 사람이 무용반주 악기로 쓰기 위해 작게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민속음악에도 아쟁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개량된 아쟁은 처음에는 무용이나 창극의 반주 음악에만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본 한일섭과 장월중선이 각각 산조 가락을 만들어 타기 시작하면서 아쟁산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장월중선에 의하면 한일섭과 장월중선이 함께 아쟁으로 산조를 만들어 보자고 하여 각각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각각의 유파를 형성하여 전승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월중선은 이 시점이 어느 때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목포에 살고 있을 때 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쟁 산조의 출발은 1950년대가 된다. 장월중선의 아쟁산조는 김일구에게 이어져,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퍼져가고 있다.
어려운 살림속에 생활하던 장월중선은 1960년 경 목포국악원을 제자에게 물려주고 목포를 떠난다. 잠시 광주, 곡성, 전주 등지를 떠돌던 장월중선은 대구에서 서양음악 활동을 하던 오빠를 찾아, 의지 삼아 살고싶어 대구로 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호남 출신인 그가 경상도로 가게 된 것이다. 생계도 막연할 무렵인 1963년 경주에서 관광요원교육원이 문을 열게 되자, 대구에 살면서 시조창으로 명성을 날리던 유종구가 그 곳의 강사 되기를 "강권을 해서"마침내 경주로 오게 되었고, 그렇게 눌러앉은 것이 경주에서 살게된 계기가 되었다.
경주는 천년의 고도라고 하는 곳이지만, 우리 음악으로는 불모지였다.
더구나 민속 음악의 전통은 호남권에서 주로 이어왔기 때문에, 경주에 전통이 있을 리 없었다. 경주에서 우리음악과 예술을 필오로 한 것도, 그것 주민들의 내적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외국 관광객에게 우리의 전통적인 것들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서 때문이었다. 출발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그 일이 우리 전통 예술을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장월중선의 다방면에 걸친 재능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장월중선처럼 판소리 , 병찬, 기악 , 무욕 , 그리고 작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감당 할수 없는 일을 그는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차차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이는 1966년 경주 시립 국악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81년에 신라 국악 예술단을 창단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를 지도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 공연과 해외 공연을 통해 우리 예술의 아름다움을 해외에 소개하였고, 다방면에 걸친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아쟁의 김일구와 가야금의 백인형, 판소리의 오비연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제자이다. 슬하의 4남매도 모두 국악에 종사하고 있다. 정순임, 정경옥 두 딸 중에서, 정순임은 장월중선의 판소리 심청가를 이어받아 현재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고있으며, 정경옥은 어머니에게 가야금 병창을 배운 뒤 무형문화재 박귀희의 전수자가 되었으며, 현재 국립 국악원 민속반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들들은 연주자로서보다는 국악과 관련된 사업을 하고있다고 한다.
장월중선은 1944년 국립창극단 창작창극(명창 임방울)을 작곡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데, 연로한 탓으로 판소리를 부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산조와 병창은 직접 연주하는 열성을 보인다. 본인의 말로는 힘이 없어 기량을 제대로 발휘 할수 없다고 하나, 오히려 연륜에서 나오는 깊이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