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6 | [문화칼럼]
함성과 아우성
글 정성환 전북대 교수·산업디자인과(2003-03-26 14:22:51)
얼마 전 전주역사박물관 심볼을 제작을 의뢰 받아 진행하면서 전주와 전주의 역사를 한 마디의 키워드로 '함성'이라고 선정하여 디자인한 바 있었다. 흔히들 전주를 양반의 도시, 문화의 도시, 풍류의 도시라고 말하지만 항상 은둔해 있던 침묵하는 역사만이 아니라 역사적 소명과 필연성이 공감될 때 분연히 일어나 저항하고 항거했던 역사를 지닌 자랑스런 도시가 전주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함성의 도시 전주가 이제는 '아우성'의 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다. 아우성이기보다는 비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를 일이다.
도시는 사전적 의미로 상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및 행정·문화·교통망·편의 시설 따위의 중심지가 되며, 인구가 집중하여 그 밀도가 현저하게 높은 지역이라고 정의된다.
백과사전의 전라북도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면 지형적으로 노령산맥을 경계로 하여 동부 산악 권과 서부 평야 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주는 그 산간지대와 호남평야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13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인 전주는 마한시대 이래 호남지방의 규모가 큰 읍으로 마한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한 전라북도 행정·교육·문화의 중심지이며 도청소재지로 시가지의 동·남·서방에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있음과 전주팔경, 전주 십 경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전주국제영화제와 월드컵 개최도시임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전주를 소개하는 이러한 내용들은 일견 대도시의 또 다른 도시의 설명과 다를 바 없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전주라는 도시의 지극히 평면적인 설명으로 지금 전주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최근 외국언론에 어린이들이 영어 발음이 잘 되지 않는다고 어린이들의 혀의 일부 어떻게 하는 수술을 시킨다는 뉴스가 실려서 우리나라가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여성들은 물론 심지어 남성들까지 규격화 된 아름다움을 쫒아 성형수술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멀쩡한 몸매를 더 가냘프게 하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요상하고 기형적인 이방인의 모습이 되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 주어진 성을 바꾸는 트랜스 젠더라는 말이 지상에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외형적인 무뇌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가장 오랜 친구라는 개를 고막이고 귀고 꼬리고 생식기능까지도 마구 제거하여 원하는 대로 불구로 만들어서 살아있는, 숨쉬는 완구로 만들어야만 속이 풀린다. 하기야 음습한 우리 도시의 어느 구석에는 인간들이 인간들을 그렇게 하고 있으니 개 정도는 정말 양반이다.
이러한 말초적이고 저급한 문화적 현상들은 도시라는 환경으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도시환경도 인간자신이나 사랑이라는 구실아래 동물들을 의도적인 불구화하듯이 마구 파헤치고 바꾸고 뒤틀어서 몸살하게 하고 있다. 낮의 도시는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는 조화롭지 못함과 부자연스러움으로 비치다가 밤이 되어도 큰 차이 없이 익명의 회색 콘크리트에 재료를 감추기 위한 엉뚱한 마감재로 뒤덮인 건물들과 조악한 글과 그림으로 만들어진 초대형의 붉은 핏빛의 네온과 덜떨어진 내용의 광고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3류 도시가 되어가도록 방치되어지고 있다. 여기에다 무슨 지구, 구역 등등 인위적인 구획을 정하고 그것에 머물지 않고 조악한 조형물 등으로 치장함으로써 애써 망치기 일쑤이다. 낯뜨거운 러브호텔들의 민망한 모습의 건물에 선정적인 네온이 그 근처만 가도 왠지 뒷 꼭지가 간지러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어떤 것은 주거지역 바로 옆에 무던히도 잘 버티고 서있기도 하다. 공중전화 박스 위에 그리고 교통신호 제어판 위에도 에폭시로 제작된 조악한 덩어리 기와를 얹어 놓음으로 해서 그 키치적인 볼썽사나움이 극에 다다르게 하고 있다. 어떻게 에폭시 기와 덩어리를 여기저기 가져다 올려놓으면 역사의 도시 문화의 도시로 보인다는 발상이 가능한가. 공원이고 어디고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 법한 요상한 형태에 구리처럼 보이도록 페인트 마감된 가로등과 나무 밑둥처럼 만들어진 시멘트 의자, 휴지통이 무계획하게 놓여진 것에 이르르면 참으로 가관이다.
자연스러움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꾸미거나 바꾸어야 하고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는 자기혐오적 발상에서 생기는 기괴한 현상은 정말 인간들에게서 끝나야 한다. 도시와 도시의 환경은 구태여 아나키즘적인 해석이 아니어도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도 또한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함부로 어떻게 할 수도, 아무나 어쩔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환경과 시간은 단지 지금 우리에게 점유되어있는 일시적 소유상태일 뿐이다.
도시가 그 기능을 다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개발을 멈추는데서 시작될 수 있다.
어느 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 건축주가 건물이 완성되고 정원도 완성되었는데 길에 대해 어떻게 해달라는 주문이 없어 시공회사에서 길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건축주는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시공회사에 연락이 왔다. 이제 길을 만들라고. 그곳에 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만들어진 자연스런 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길을 조성했다고 한다.
도시를 우리는 개발의 대상 혹은 인공적 조형물, 건물 등으로 메꾸어야 하는 계획되고 구역화 되고, 경계화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도시는 인체와 같아서 각각의 기관이나 부위가 담당하는 역할이 다르고 모양도 다르며, 명칭도 틀리고 구조도 다르다. 그리고 살아 있어야 한다. 또한 사람마다 모습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환경이 다르듯이 도시도 그와 같아야 한다.
전주는 드물게 청정한 지역의 복판에 위치하면서 역사를 보존하고 자연을 지켜 가는 모범도시가 되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그래야 한다.
예전에는 당연하고 흔하고 정들고 자연스러웠던 것이 사라지게 하는 것을 현대화, 근대화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수업료를 지불하고 뒤늦게 깨우쳐 왔다. 자연은 개발의 대상이고 자연스러움은 곧 방치라는 등식에서 출발한 '초가집도 없애고'식의 개발은 한번쯤은 큰 쉼 호흡으로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 도시는 큰공간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나 친근한 앞 마당이어야 하고 놀이터이어야 하고 쉼터이어야 하며 정든 곳이어야 한다. 흔히들 말하듯이 '몇 년만에 와보니 전혀 딴 도시가 되었다'라는 것이 발전으로 인식되는 낯설고 답답한 환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의 터전에 엄청난 해일이 밀려오고 있다. 그 큰 파도에서 전주는 비켜나 있는가?
이제 개발과 발전에 그리고 계획을 세우는데 게으르자. 그리고 꼭 필요한 개발이라면 꼭 필요한 계획이라면 그래도 한번쯤은 조화라는 것도 생각해보자. 문화라는 것도 생각해보자. 미라는 것도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자. 또 다시 큰 덩어리의 시각적 공해물을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자. 삽 대신에 모종삽을 들자. 얼마 남지 않은 푸른 숲과 작은 개천이라도 깨끗이 지켜내는 것이 전주가 해야할 일이며 우리 문화의 특징인 비움의 , 자연스러움의 미를 지켜 가는 길일 것이다.
이제 전주를 아우성의 도시가 아닌 함성의 도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