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2 | [특집]
「세계화」라는 추상화 그리기
진 호 『문화저널』운영위원·전북 MBC PD
(2004-02-05 14:07:20)
1. 새해 연초부터 대통령의 연구 기자회장에서 던져진 「세계화라는 화두(話頭)를 놓고 지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는 이 막연한 주제를 붙들고서 나름대로 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듯하다.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이 단지 국가경쟁력을 높이자는 또 하나의 경제의 논리, 경쟁의 논리만 강조했을 뿐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희망의 철학은 제시하지 못했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제 「세계화」라는 용어는 밑으로 내려와 지방 자치단체장들의 각종 연설문에서도 구체화되지 못한 추상의 형태로 툭하면 튀어 나고 있다.
물론, 대통령이 제시한 국정방향이 「세계화」이니 지방관리들로서야 당연히 따라가야겠지만 도대체 이 문제를 지역실정에 맞게 어떻게 구체화 시킬것인가가 그들의 고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막연하게나마 「국가경쟁력 제고」니 「세계화 과제」니 하며 실제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내용이 「세계화」라는 포장을 씌운 신년도 업무계획을 장만한다.
울타리가 없어져 세계가 하나가 된 현실에서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선진국 국민들을 경쟁 상대로 삼아서 실력과 경쟁력을 높여야만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을 느끼면서도 언뜻 뚜렷한 해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란 어떤 유형의 그림이어야 할지?
어느 일간지 만평(漫評)에서처럼 세계화라는 것이 동양화인지 서양화인지 아니면 유화인시 수채화인지 잘은 모를 일이로되, 분명한 것은 무슨 재료를 사용하든지 간에 「세계화」라는 그림은 아무래도 성격이 분명한 한국(韓國畵)여야 할 것이고 문인화(文人畵)보다는 민화(民話)에 가까워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적어도 문화적인 면에 국한할 때 세계화속에 한국화란 곧 한국적인 특성과 정서가 진하게 묻어있는 특화된 상품이어야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결국은 한국적 내용(SOFT WARE)을 어떤 포장(HARD WARE)에 담아 내느냐하는 원론적인 명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2. 이미 『문화저널』 1,2월호에 소개된 것처럼 다음달이면 CATV 방송이 시작된다. 그리고 금년 5월이면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4개 지역민방이 개시할 예정이고, 6월로 예정된 무궁화호 발사로 인한 위성방송 실시 등 이른바 멀티미디어 세계가 펼쳐질 전망이다.
이간은 멀티미디어 시대는 과거 20∼3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방송기술 및 매체의 변화가 앞으로는 불과 2∼3년이라는 짧은기간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변화는 궁극적으로 통신과 방송의 통합(VOD)이라는 생활의 혁명이 예고되어 있기도 하다.
지역의 경우를 놓고 볼때도, 전주등 중·소도시의 지역민방이 올해 방송참가업체의 신청을 받아 내년초에 추가 허가될 예정으로 벌써부터 전주민방의 경우, 3∼4개 기업이 허가권을 따내기 위해 물밑자 업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앞으로 1∼2년 사이에 지상파 채널 5개(KBS1,2, MBC, SBS, EBS)와 CATV채널 30개 안팎, 위성채널 10여개 (가용채널 12개), 여기에 외국의 위성채널을 합해 모두 50여개의 TV채널 시대를 맞게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무한 경쟁의 원리는 어김없이 적용될 것이며, 그 속에서 어떻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지금 지역방송의 당면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같은 급격한 방송환경의 변화속에서 지역방송이 살아남는 길은 별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으며, 결국 가장 지역적인 특성을 어떻게 상품화시킬 수 있느냐는 원론적인 문제로 다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서 지역에 밀착한 소재를 시청자들의 입맛이 맞게 어떻게 포장하느냐라는 문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제작여건과 재정의 열악함 속에서도 지역방송의 활성화 방안으로 지역국의 특성화된 프로덕션화 편성권의 독자성 확보 광고 시간 제한규정의 완화 지역프로그램 의무제작 비율 규정과 주시청시간대 제한 검토 확증제도의 도입등이 다방면으로 연구, 검토되고 있다.
3. 다매체 다채널 시대의 지역방송의 고민을 잠시 소개한 것은 결국 「지방시대의 세계화」문제와 괘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채널속에서 조그만 지역방송이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 듯 「세계화속의 지역화」란 그림을 그리기란 그만큼 지난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리의 비약일지 모르지만 이같은 문제를 풀어가는 주체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지방의 세계화」란 지역자치의 강력한 의지를 가진 인물과 그리고 그 인물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조직)에 달려있기 마련이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최근 어느 대기업의 조직구조에 대한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모기업의 정보통신분야에 「테크로밸리」라는 신상품 개발팀이 있었다. 30세 미만의 20여명 내외로 구성된 이팀에 할당된 업무는 한달에 한, 두 개씩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 물론 그 아이디어들 중에는 기상천외하고 현실적으로 상품화 할 수 없는 ITEM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들은 팀이 조직된지 6개월정도동안에 2가지의 힛트 상품을 개발해 냈다.
첫 번째 제품은 삐삐기능을 겸하면서 안방에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 수도 있고 전기밥솥의 스위치를 ON-OFF 할 수 있는 무선통신기로써 이제품은 불과 두달 사이에 70만대 이상의 판매실적을 보이고 있다. 두 번째 제품은 시계바늘이 없는 음성통신 시계로 '지금 몇시야?'하고 물으면 시간을 대답해 주는 상품이다. 물론 이상품은 맹인이나 아니면 침대에서 시계보기까지 귀찮아하는 지극히 게으른 사람들이 상품의 주된 수요자가 되겠지만 이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의 다국적 음료회사의 '음료수'이름을 부르면 시각을 고지해주는 기능을 첨가시켜 엄청난 양의 수출실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상식을 뚸어넘는 발상의 전환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의 구축일 것이다.
4. 어찌 중앙정부도 따라가기 힘든 대기업 경영의 틀을 지방정부가 흉내낼 수 있을까마는 알다시피 이제 지방자치 시대에는 지방 행정조직의 힘은 「지역화」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서 지방 단체장이나 지방의회 선량들의 면면은 우리들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로 가자온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기회에 그 지겨운 기역감정에 호소하거나 어설픔 행정경험을 앞세운 정치지망생들을 뒤로 돌리고 참신하고 구체적인 그림(정책)을 그릴 수 있는 사람 하나쯤 배출해보자.
이제는 중앙으로 베풀어지던 '분배의 떡'이 왜 작은가만을 투정할 때가 아니라 튼실한 지방자치를 통해 우리의 것을 세계속에 가꾸어 나가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