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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 | [서평]
엑시트 : 자살과 네트의 기능적 비판
한창완(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2003-03-02 20:46:32)
극도로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 극심할 정도의 경쟁체제를 살아나가는 현대인은 자아의 상실과 속물화 되어가는 지성에 대해 매일 타협해가면서 스스로의 이성을 죽여간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발견되면 공포를 느끼며 놀라게 되고, 그 작품에 되려 빠져든다. 시의적절한 작품들이 관객과 독자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작품에 대한 동질화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EXIT』는 이런 경향을 중독적으로 보여주는 프랑스 만화이다. 『개미』, 『타나토노트』, 『아버지들의 아버지』, 『뇌』 등 과학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25년전인 고등학교때부터 만화와 시나리오에 탐닉하면서 만화신문 <유포리>를 발행하였고, 당시 기획했던 만화가 『EXIT』였다. 실제 『개미』도 본래 만화시나리오로 기획했다고 하며, 최초 『EXIT』는 영화로 제작할 목적이었으나, 현실화되지 않자, 만화로 출간하게 된 것이다. 오랜시간 고민한 시나리오여서 그런지 플롯의 치밀함은 독자들의 감성을 풍요로게 해준다. 사회병리 현상인 인터넷 자살 사이트라는 소재를 통해 현대인의 깊은 고독과 상실감을 적나라하게 해부한 베르베르는 여기에 특유의 음모이론까지 감추어놓으며 독자들의 흥미거리를 다채롭게 전개시킨다. 아르뎅(Aredem)이라는 필명으로 에로틱한 작품 <크립테의 광란의 밤>을 발표했던 알랭 무니에르가 에피소드 1, 2를 그렸고, <불사신>을 발표했던 에릭 퓌에크가 에피소드 3을 그렸다. 이번에 출간된 만화는 1999년에 나온 에피소드1과 2000년에 나온 에피소드2, 지난해 나온 에피소드3을 묶어 1백44쪽 한권으로 출간한 작품이다. 잡지사에서 신형게임에 대한 비평을 쓰는 기자 아망딘 웰슨이 이 작품의 스펙터클을 책임지고 있는 미모의 주인공이다. <중세전투>라는 게임에 혹평을 하려는 아망딘은 잡지사의 주요 스폰서이기 때문에 게임제작사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사장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사장의 속물근성에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던져버린 채 실직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돌아와 보니, 남자친구는 자신의 침대에서 다른 여자와 정사를 하고 있다. 기가막혀 통곡하는 아망딘.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 하얀여우의 ID를 쓰는 아망딘은 채팅사이트에서 “사는 것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자조섞인 한숨을 쏟아놓는다. 술에 만취해서 강물에 투신자살을 기도하고, 밀린 집세를 내라는 독촉에 목을 메달아 자살기도까지 하다, 윗집에 사는 한 남자, 피에르 모네스티에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아망딘이 자살을 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거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면, 뛰어내릴 수 밖에 없잖아?” 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보게된 거리 광고판의 사이트 주소, ‘SOS우울’, 이 인터넷 웹사이트는 아망딘의 증상을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삶에 실패하셨습니까? 그럼 죽음에는 성공하십시오.”, 탈출을 도와주는 최고의 서비스라고 명명된 EXIT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들이 있다. <EXIT의 규칙> 1. 당신은 클럽의 다른 회원들을 죽일 수 있으며, 그들에 의해 죽을 수 있다. 2. EXIT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야 한다. 3. 죽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 4. 총격은 언제나 허용된다. 세부사항 1. 경찰이나 재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뒷처리는 저희가 책임집니다. EXIT에 가입과 동시에 두꺼운 책 분량의 25,268명 회원리스트를 받게 되고, 이때부터 아망딘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기슬렌 뒤파르크부인, 달방, 등의 회원을 살해하게 된다. 그 뒤이어 그만두었던 잡지사로부터 다시 근무해달라는 전화와 윗집이웃이었던 피에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아망딘은 EXIT에 가입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고 수시로 EXIT회원들로부터 살해에 대한 공포에 괴로움을 당하게 되면서 이 작품은 극도의 공포와 서스펜스, 그리고 스피디한 스펙터클을 만화의 앵글로 극대화시킨다. 그러나 이미 3명을 살인했다고 자책하는 아망딘은 회원 중에서도 2단계의 등급으로 올려지게 되고, 다른 회원들에 의해 보다 심각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EXIT회원들로부터 탈출을 감행하다. 결국 <중세전투>와 EXIT를 만든 장본인인 프로그래머 가브리엘을 만나게 된다. 이미 회원수는 더욱 증가하여, 3만2천명을 넘어서게 되고, 아망딘의 모든 이동 동선상에 나타나며 마치 지구전체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 3만2천명의 살인자들, 3만2천명의 표적들, 3만2천명의 용의자들, 가입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빠져나오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사이트, 결국 범인은 인공지능이 탑재된채 EXIT 프로그램의 소형서버(메모리)와 웹카메라(눈알)에 연결된 조그마한 노트북 컴퓨터가 전세계를 조종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 인간과 동일한 지능을 갖게 된 컴퓨터프로그램에 의해 인간이 조종당했던 것인데, 이 프로그램 또한 스스로 자살을 요청하게 된다. 결국 가브리엘에 의해 백신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프로그램은 영원히 삭제된다. EXIT는 네트워크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인터넷자살사이트와 연계시켜 다채로운 복선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결국 현대사회의 몰인간성으로부터 자살이라는 소재를 등장시키고, 인터넷자살사이트라는 소재를 통해 전세계적인 네트워크의 역설적인 기능성을 비판한다. 산드라블록이 주연을 맡아 열연했던 영화 <네트>에서도 이미 네트워크의 폭발적인 영향력은 비판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정재승박사의 <과학콘서트>라는 책을 보면, 제일 첫장에 ‘케빈베이컨의 6단계게임(Six Degrees of Kevin Bacon)’이야기가 실려있다. 케빈베이컨은 20여년동안 50편 가까운 영화에서 개성적인 연기를 보여준 연기파 배우이다. 영화화 함께 출연한 관계를 1단계라고 했을 때, 다른 할리우드 배우들이 케빈 베이컨과 몇단계만에 연결될 수 있는가를 찾는 게임이다. 가장 잘 연결시키면 2단계만에 연결시킬 수 있지만, 영화와 출연배우들을 모르면 여러단계까지 거치게 되는데, 대개 6단계내에서는 연결된다는 것이 6단계게임의 정설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섯다리만 건너면 지구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Six Degrees of Separation)'라는 통념이 전해내려온다고 한다. 인터넷이 서양의 문화적 산물로 등장하게 된 것도 실제 이러한 개념을 충분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베르베르가 실제 시나리오에서 보여주는 치밀함은 작가가 이미 이야기의 주제성을 착목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흘려보낼 길의 첨단메카니즘을 이해하고 있음에 출발한다. 어떤 방식의 이야기하기가 독자들에게 신선하고 차별적으로 느껴질 것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검증된 과학적 전문지식으로 채색하여 제시하는 것이 베르베르의 천재성이다. 이 작품에서도 이러한 천재성은 무서우리만큼 냉철하게 제시된다. 그래도 안타까운 것은 작품의 호흡이 너무 짧지 않느냐는 것인데,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르면, 스스로 베르베르에게 중독되어 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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