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2 | [문화와사람]
우리음악 위해 한번 크게 쓰려했던 재능
장월중선(張月中仙)의 생애와 예술
최동현 군산대 교수·판소리 연구가
(2004-02-05 13:58:41)
장월중선과의 만남
내가 장월중선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봄이었다. 전주문화방송에서 「판소리 기행」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었는데, 서편 소리의 중요한 계승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경주까지 찾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장월중선의 사무실은 경주 성건시장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65세의 장월중선의 첫 인상은 매우 곱고 단정하고, 그리고 겸손하다는 것이었다. 취재하는 동안 늘 취재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먼저 생각해 주었고, 어떤 요구에도 최선을 다 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저 국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경주까지 찾아온 젊은 손님들에 대한 고마움만을 말할 뿐이었다.
판소리를 주로 연구하다 보니, 나는 자연히 소리꾼들을 만날 기회를 자주 갖게 된다. 어떤 소리꾼들은 판소리가 걸어온 모질고 험한 역사 속에서 지치고 찌든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소리꾼들은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부가 지나쳐 오히려 추해 보이는 수도 있다. 장원중선은 스스로 '충격 받은 일이 너무 많아서 기억력이 쇠퇴해 버렸다'고 할 만큼 험한 세상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차분하고 단정한 한국 여인의 모습만이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후에 장월중선이 우리 국악계에서 드물게 보는 천재로, 판소리뿐만 아니라 가야금 산조와 아쟁 산조, 가야금 병창, 무용, 그리고 작곡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악의 모든 분야에서 길이 빛날 업적을 쌓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재주도 내려주지 않으면서, 신은 어째서 하필 자그마한 한 여인에게 이렇게도 많은 재능을 한꺼번에 내려주신 것일까? 신은 장월중선을 우리 음악을 위해 한 번 크게 쓰려고 했고, 그는 또 탁월한 재능으로 그 부름에 잘 응하였던 것이 아닐까?
장월중선의 소리수업
장월중선의 본명은 순애(順愛)이며, 1925년 4월 25일 전남 곡성군 오곡면에서, 아버지 장도순과 어머니 강인자 사이의 일남일녀 중 동생으로 태어났다. 장월중선의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하지만, 장월중선의 아버지 형제간 3남3녀 중에서 큰아버지 장판개가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받은 대명창이었고, 고모 장수향 또한 가야금의 명인이었다.
장판개는 본명이 학순이며, 송만갑의 수종 고수를 하다가 판소리로 대성한 사람으로, 소리를 하여 고종으로부터 「혜릉참봉」의 직첩을 받기도 하였던 어전 명창이었다. 박황이 쓴『판소리소사』에 의하면, 장판개의 조부, 부친 또한 음률의 명인으로, 강판개가 어렸을 적에는 직접 거문고와 피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장판개는 「적벽가」중에서 '장판교대전'을 특히 잘하였다고 하며, 그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제비 노정기'는 지금도 김창환이 만든 '노정기'와 함께 불려지고 있다. 또 장판개의 아들인 장영찬은 마흔넷에 요절하기까지 장래가 촉망되던 명창으로, 김연수 등과 함께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장월중선의 집안은 대대로 뛰어난 명창, 명인을 배출한 국악계의 명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월중선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일단 이러한 집안의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장월중선이 국악에 입문하게 된 것은, 여덟 살 때 큰아버지인 장판개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장판개는 본개 곡성군 옥과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순창군 금과면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그 곳에서 죽었는데, 장월중선은 순창 금과에서 소리를 배운 듯하다. 장월중선은 장판개로부터 4 - 5년 간 판소리를 「적벽가」, 「춘향가」, 「수궁가」 등을 배웠는데,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해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열세 살 무렵에는 광주에 가서 고모인 장수향으로부터 가야금 풍류를 배웠으며, 광주 권번에 나가 무용을 익히기도 했고, 박상근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우기도 했다. 또 열여섯 무렵에는 잠시 장극단체를 따라 다니면서 오태석에게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오태석은 1895년 전남 보성군 낙안 출생인데, 순천에 살고 있던 박덕기에게 가야금을 배우고,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배워 가야금 병창으로 일세를 울린 사람이다. 맑고 고운 목에다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고음과 풍부한 성량을 지닌 그는 '가야금 병창의 전무후무한 명인'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은 음반을 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수업은 장월중선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는 데는 크게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전통 예술에 관련된 여러 가지 기능을 익히고 견문을 넓힘으로써, 후에 다방면에 걸친 대가가 될 수 있는 기초를 쌓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장월중선에게 가장 중요한 수업의 시기는 열여덟 살 되던 1942년 경(자세한 연대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해방 직전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함)부터 박동실의 판소리를 익히던 3-4년간이다. 박동실은 서편제 소리의 대가인 김채만의 제자로 광주, 담양, 화순 등지의 이른바 '광주소리'를 대표하던 소리꾼이었다. 목소리가 좋지 못하여 공연은 많이 하지 않았으나, 교육에 힘을 쏟아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공기남, 조상선, 정남희 등과 함께 협률사를 조직하여 공연에 나서기도 하였다. 특히 해방 직전에는 거문고의 명인이며, 담양의 부호인 박석기가 담양군 창평면 지실에 초당을 짓고 음악가들을 후원할 때, 박석기의 초당에서 판소리를 도맡아 가르쳤다. 이 때 박동실로부터 판소리를 배운 사람들은 김소희, 임소향, 한승호, 한애순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후에 우리나라 판소리를 대표하는 명창이 되었다. 박동실은 6.25 때 같이 활동하던 공기남, 정남희, 조상선 등과 함께 월북을 했으며,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동실로 대표되는 '광주소리'가 침체된 것은 바로 이 소리를 대표하던 사람들이 월북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장월중선이 박동실로부터 배운 소리는 「심청가」와 「춘향가」였는데, 「심청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고, 「춘향가」는 중요한 대목 몇몇을 배웠다. 장월중선은 후에 「심청가」를 장기로 삼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범피중류'에서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까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자신 있는 대목이 되었다.
이 부렵 장월중선은 임석윤으로부터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임석윤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광주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만년은 서울에서 보내다 1976년에 작고했는데, 김연수(金然秀. 전북 김제군 월촌면 사람으로 거문고 산조를 배워 명인으로 손꼽히던 사람이었다. 후에 장월중선은 다시 한갑득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한갑득은 거문고의 제2세대 명인으로 신쾌동과 함께 거문고 산조를 대표하는 명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