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2 | [문화비평]
강준만의 문화비평
김대중은 왜 자주 배신을 당하는가?
강준만 전북대교수·신문방송학과
(2004-02-05 13:55:41)
한국은 '의리공화국'
감옥이 나에게 전 마지막 즐거움은 화단을 볼보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점심이 끝나면 한 시간 정도 운동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시간에 나는 꽃을 가꾸었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하여 물을 주고 가지를 치고 잡초를 뽑아 주었습니다. 사랑을 다하여 가꾸면 그만큼씩 자라 주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꽃들의 정직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는 배신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배신! 이 단어만큼 김대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단어가 또 있을까. 김대중은 배신이 없는 식물의 세계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 얼마나 당했으면 그럴까? 아닌게 아니라 김대중이 배신을 당한 경력을 화려(?)하다. 그 경력은 1971년 4.27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선거를 열흘 정도 앞두고 대구엔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백제권 대동단결" "럭키치약 불매" 등의 유인물이 나돌았다. 부산에서도 "호남 후보에 몰표를"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곳곳에 나붙었다. 지역감정에 관한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IQ는 갑자기 두자리 수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정말 너무도 치졸해서 눈뜨고 보아주기 어렵다. 그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김대중쪽에 인재가 없대 해도 그런 어리석은 수법을 썼겠는가? 그러나 당시 영남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유인물과 구호로 김대중은 영남 지역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건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는데, 그 공작엔 김대중의 선전 참모가 개입돼 있었다. 그 참모의 배신이 김대중에게 준 충격이 어떠했을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를 배신하는 사람은 계속 나타났다.
그런데 바로 그런 배신자들의 속출이 그의 발목을 잡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김대중은 인덕이 없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배신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의외로 널리 퍼져 있다. 이는 김대중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김대중을 싫어하는 이유 가운데에 빠트리지 않고 내놓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김대중의 긍정적인 측면 가운데 하나를 들라면 오히려 그가 배신을 많이 당했다는 것을 들고 싶다. 왜 그러한가? 우리 한국 사회에는 무서운 고질병 하나가 버티고 있는데 그건 의리에 대한 맹목적 찬양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교하면서 전두환에게는 믿을 만한 심복들이 많지만 노태우에게는 그런 심복들이 없다는 걸 지적하면서 전두환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이 정도면 한국은 '의리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인가? 공과 사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 한국인들의 고질적인 병폐는 이 나라를 망치는 주범중에 하나다.
'좀상스러운' 김대중
물론 김대중이 배신을 당한 것이 모두 원칙의 차이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분명 그는 성격적으로 김영삼에 비해 대인 관계에 있어서 뒤떨어지는 면이 있다.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던 『말』지도 김영삼의 탁월한 용인술에 대해선 찬사를 보낸 정도니까. 『말』지 92년 8월호에 실린 "김영삼의 용인술"이란 기사는 김영삼이 "'사람만들기'의 전도사"이며 그 누구든 "만나면 다 떨어진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건 확실히 김영삼의 장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기사는 한가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단순 비교하는 건 무리다. 우리 사회에서 '경상도'와 '전라도'가 갖는 어감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김영삼의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과 '김대중의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김대중의 인덕 부재는 '전라도'라고 하는 부담까지 떠 안아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을 흔히 '양김'이라곤 하지만, 두 사람이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받은 박해의 정도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그 혹독한 탄압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가해지니 김대중의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과 김영삼의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하다 못해 기자에게 촌지를 주더라도 두 사람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김영삼이 훨씬 화끈한 면을 보여줘 기자들을 사로잡는다. 시사 칼럼니스트 김광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영삼총재가 가장 덕을 보는 것이 언론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기자들이 털어놓는 일화가 있다. 신문사의 차장급이나 당사 출입기자인 경우에는 몇 번 만나고 나면 적당한 시간에 촌지를 건네주는데, "이봐, 한동지. 오늘 저녁 술값 없지? 하, 이거참. 나도 오늘 마침 가지고 온 것이 이것 뿐이야. 자, 지갑째 가져가. 내 밑천 전부야." 이러면서 김총재는 대개 100여만원이 든 촌지를 주는데, 미리 준비한 가죽 지갑에다가 그 돈을 넣고 속을 다 까보인 다음에 이것뿐이라면서 지갑째 준다는 것이다. 지갑을 홀랑 뒤집어 보이며 지갑째 몽땅 주는 김총재의 그 특유한 애교에 기자들은 홀랑 넘어가게 마련이고...
여기에 비해 김대중 대표의 경우에는 촌지를 줘야 할 때, "저, 김기자. 잠깐 기다려." 이러고 나서 뒤로 돌아서서 자신의 지갑을 꺼내고 돈을 차근차근 세어서 봉투에 넣어주는데 그 돈의 액사가 YS에 비해서 10분의 1정도가 된다는 얘기다. 기자가 보는 앞에서 꼼꼼하게 세어주는 모습이 좀상스럽고 액수가 적다는 면에서 또 한번 기분이 상한다는 얘기다. (『세계와 나』, 92년 12월호)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좀상스러운' 성격마저도 생각하기에 따라선 오히려 김대중의 장점이 아닐까? 취재진이 취재를 했으면 됐지 바라긴 뭘 바란단 말인가? 물론 김대중으로서도 촌지든 볼펜이든 아예 아무 것도 주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완벽주의'와 '인덕'의 갈등
어찌됐거나 공적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개인 감정을 배제하고 추상과 같은 원칙을 바로 세우는 데 있어서 김영삼보다는 김대중의 '좀상스러운' 성격이 훨씬 더 바람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 관계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에선 결코 그렇지 않다.
국회의원 정대철이 지적한대로, 김대중이 "너무 완벽주의자여서 덜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건 김대중의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다. 민주당 최고위원 노무현도 "DJ에게도 허점이 없는 건 아니다. 가장 큰 허점은 허점이 너무 없다는 점이다. 이건 말장난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너무 완벽하고 또 그 완벽성에 대해 너무 자부심과 확신이 강해 다른 사람들에게 끼여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김대중의 치명적인 약점이 정치 지도자로서의 치명적인 약점인지에 대해선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 점에 관해 노무현의 김영삼에 대한 평가는 주목할 만 하다. "YS는 분명히 부하 하나는 확실히 다스리고 또 다른 사람을 자신의 부하로 만드는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조직의 뛰어난 보스'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정치지도자'라는 믿음까지는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덕'이라고 하는 개념엔 기회주의적 처세술이 숨어 있다.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 인덕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잘못된 것을 비판하다 보면 적을 만들 수밖에 없는데, 그 적들이 그냥 있겠는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얼마나 입방아를 찧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는 말도 인덕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우리 풍토에선 똑똑한 사람일수록 인덕이 없게 되어있다. 인덕은 인정과 의리에 투철하고 때론 사회와 공익에 반하면서까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 혈안이 된 사람일수록 많은 법이다. 원칙도 없이 얼렁뚱땅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일수록 인덕이 많은 법이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말하는 정치 지도자에게도 그런 인덕이 꼭 있어야 옳겠는가?
김대중이 배신을 잘 당하는 건, 「국민일보」기저 서영석의 지적대로, 주변 사람들이 "권력의 김대표에 대한 철저한 탄압으로 어지간한 강단을 지니지 않고는 계속 붙어 있기가 어려웠다는 점"과 김대중이 "정치인 가운데 「보스」노릇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돈이 그다지 없었다는 점" 등과 같은 이유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월간중앙」, 92년 6월호)
김대중도 92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한때 동교동 진영의 실세들이 떨어져나가 김대표를 비판하는 경우가 꽤 있었고, 이 부분이 김영삼 대표와 비교되기도 합니다"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 주변에서 살아온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비교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당을 같이 해오면서도 동교동과 상도동 진영이 당한 핍박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지요. 숱한 연행과 고문 등 인간이 살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이 정도로 제 곁에 붙어있다는 것이 기적이지요. 안전하게 야당하던 사람과 이렇게 박해받은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은 전제가 잘못된 겁니다.(5월 7일자)
김영삼과 국민의 배신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김대중이 배신을 잘 당하는 건 그가 의외로 어리숙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지난 대선에서도 잘 타나났다. 그는 93년 2월 영국에 머물 때에 '김영삼의 배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사실, 나는 지난 대선을 치르면서 깨끗한 경쟁을 하려고 최선을 다 했습니다. 돈도 우리가 제일 적게 썼어요. 우리도 인신 공격을 해야 한다는 당내의 주장도 많았지만 내가 앞장서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렸습니다. 우리는 정책으로 이성적인 대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30년이나 민주황투쟁을 같이 했던 옛날의 동지가 나의 사상을 물고 늘어지는 데는 정말 놀랬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나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쉽게 잊을 수가 없어요.(「신동아」,93년 4월호)
김대중은 '김영삼의 배신'에 대서 '피눈물이 났다'는 표현도 썼지만, 그건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가 그만큼 어리숙하다는 걸 말해주는 것에 다름아니다. 선거를 한두번 해봤나! 물론 그 어리숙함은 원칙의 존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그 살벌한 정치판에서 원칙이 먹혀 들어가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참모들에 대해서도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동지라는 원칙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인간적인 배려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배신을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대선에서 김영삼 진영이 그를 용공으로 몰아 붙였을 때에, 민주당 선거대책 본부에서는 김영삼의 스캔들과 자질론을 포함한 완벽한 자료를 갖추어 놓고 맞받아치자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김대중은 질책을 가했다고 한다. 이종찬의 영입이 거의 성사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도 김대중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국회의원 강창성이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으면서도 두 발을 다 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정치인 김대중은 놀란 만한 로맨티시스트"라고 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월간중앙」, 93년 2월호)
김대중이 배신감을 느끼는 건 비단 김영삼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그는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국민들에 대해서도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아니 그건 배신감이라기보다는 허탈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93년 2월 영국 캠브리지에서 김대중을 만난 서울대 교수 한상진은 당시 김대중의 심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김대중씨는 미래에 대해 솔직히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사람들이 너무 감정적으로, 너무 즉흥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의 윤리적 사회적 지도력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김영상 정권의 개혁의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지만, 국민이 과연 개혁을 제대로 떠받쳐주는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신동아」, 93년 4월호)
김대중은 로맨티시스트?
만약 한상진이 전한 이 이야기가 김대중의 진정한 심경이라면, 이건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김대중의 치명적인 약점은 그의 터무니없는 낙관주의가 아닐까? 그가 배신을 잘 당하는 것도 바로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김대중은 매번 선거때마다 승리를 장담했다. 김대중을 거짓말쟁이로 몰아 붙이는 사람들은 이 거짓말도 추가시킬 일이다. 혹자는 김대중이 권력욕에 눈이 뒤집혀 승기를 낙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대중은 우리 국민의 자질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낙관주의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김대중이 쓴 싱가포르의 지도자 이광요에 대한 반론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물론 나는 문화가 우리의 운명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이라는 김대중의 생각에 동의하며, 민주주의가 아시아엔 맞지 않는다는 이광요의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놀란 건 김대중이 아시아의 정부들이 비개입적이라고 하는 이광요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한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이광요씨의 싱가포르에서는 풍선껌을 소유하는 것, 침뱉는 것, 흡연, 쓸게 버리는 것 등과 같은 개인의 행동을 엄격하게 규제하여 '조지 오웰의 사회'를 방불케 하고 있다.
나 역시 싱가포르가 개인의 자유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이 무조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싱가포르를 가리켜 '조지 오웰의 사회'를 방불케 한다는 건 해도 너무했다. 공중도덕을 엄격히 법으로 규제하는 걸 가리켜 무턱대고 개인의 자유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공중도덕 준수와 부정부패 척결에 관한 한 우리나라가 싱가포르로부터 배워야지, 싱가포르를 '조지 오웰의 사회'에 빗대어 말하는 건 지나치다.
김대중이 단지 이광요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국민의 자율적 능력에 무한한 낙관주의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영국에서 느낀 미래에 대한 불안도 어느새 말끔이 씻어버린 모양이다. 김대중은 정말 '놀랄 만한 로맨티시스트'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