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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2 | [세대횡단 문화읽기]
섬려(纖麗)한 고려불화의 세계 이태호교수의 '불화의 세계'
문화저널(2004-02-05 13:49:57)
지난 시간에는 불교미술의 흐름속에서 불상과 탑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훑어보았다. 탑이나 불상이 갖는 종교미술적인 의미는 대체로 예배 중심이었다. 예배를 보기 위한 상징물로서 탑이고 조각상이었다. 오늘 보실 슬라이드는 주로 불화인데 대부분 후불탱화 형식으로 역시 예배대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회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불와.탱화란 거는 그림, 다시 말해 걸개그림이다. 족자처럼 작지 않고 큰 걸개그림을 탱화라 한다. 야외에 거는 더 큰 탱화는 일반적으로 괘불, 괘화라 한다. 불화는 아미타여래 단독으로 예배를 위한 부처가 그려지기도 하는데, 그것보다 회화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한 것은 불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겨그린 그림이다. 불교미술을 일반적인 예술과 동일한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교화 목적으로 종교예술이 발전하면서 설득하려는 사람이 설득당하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다 보니 당시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 동일하게 형상화할수 있었던 정서가 시대적 양식으로 그림에 반영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표현하다보니 신이 인간처럼 살아가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신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세계가 그려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대적 양식이 드러나는데 이런 삽화적인 그림들을 변상도라고 한다. 이런 변상도는 책의 그림으로, 그리고 대웅전이나 극락전의 후불벽화 혹은 탱화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불교회화는 초기에는 주로 벽화로 그려졌다. 그런데 현재 고려이전의 절들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미륵사지나 황룡사의 벽화 파편을 제외하고는 남아있는 벽화가 없다. 14세기 고려말 벽화로는 부석사 조사당 벽화, 예산 수덕사 장식벽화가 남아있다. 초기의 이런 벽화들이 탱화로 발전하게 되는데 가장 발전한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불교가 왕족과 결탁하여 국가적인 대규모 불사를 일으킬때 황룡사탑과 같은 대규모의 탑이 축조되는데 신라말이 되면서 불교신도가 늘어나고 부처를 통해 공덕을 쌓아 부와 명예를 확충하려는 계층이 많아진다. 호족이 형성되는 시기에 오면 불교가 개별 귀족과 결합하는데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에는 기복신앙화한 귀족불교의 양상을 보인다. 몽고의 침입때 국가사업으로 대장경조판사업을 벌이기도 하지만 고려불교의 발전은 지방귀족 내지 귀족층 등 개별단위 귀족의 부처에 대한 염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그러면서 불화가 발전한다. 고려때 원당사찰, 개별사찰들이 많이 축조되는데 원당사찰의 불상조각사업등은 보통 재력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규모 불화가 많이 제작된 것이다. 불화 제작은 대체로 문벌귀족들이 중심이었지만 때로는 서민들까지도 시주해서 불화를 거는 일이 나타나고, 지방단위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우리나라의 불교미술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 불교를 통해서 왕권을 확립하고 삼국통일을 추진할 당시는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과 탑의 축조를 통해서 불교미술이 발전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당시의 탑은 남아있는게 없다. 고려, 조선때에 불교회화가 발전한다.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 100여점쯤 남아있는데 우리나라에 단 한점도 없다가 최근에 비로소 사들이기 시작했다. 고려불화의 80내지 90퍼센트는 일본에 있는데 조선말 왜구의 잦은 침략과 약탈이 원인이고, 고려불교가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건너갔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불화는 2미터 내외의 작은 그림들로 일본의 사찰에 한두점씩 걸려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불화로 생각했는데 1960년대말 고려불화라는 것이 일본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이동주씨가 일본에서 다시 조사에 착수하여 '일본속의 고려불화'라는 글을 쓰면서 70년대초에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그는 고려불화를 연구하면서 한국일보에 연재를 했는데 "아,아름답다. 고려불"이란 말로 고려불화의 섬세하고 빼어남을 표현했다.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은 '섬려'하다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고려불화의 제작시기는 고려후기에 집중되는데 그림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이다. 고려시대에는 목판, 금속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사경편찬사업이 발전 하는데 1270과 1350년 사이에 고려불화가 집중제작된다. 이 시기는 근대사 이전의 유일한 식민지 시대로 몽고의 지배에 항쟁하는 시기이다. 권문세족과 부를 축적한 친원파관료들의 후원으로 고려불화가 제작되는데 부처의 얼굴을 보면 나라잃은 슬픔이 담긴듯 우울하다. 고려불화는 원나라 지배하에 제작되었지만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 비단에 염색을 한뒤에 그림을 앞뒤면에서 그리는 복채(배채)기법을 써서 피부감 등의 섬세한 질감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회화기법을 완성하고 있다. 고려불화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불화의 변화를 감상해 보자. 4세기 중엽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안악3호분은 '357년 동수라는 사람이 죽어서 무덤을 썼다.' 라는 명문을 얻고 있는 벽화로 왕이 앉아 있는 모습자체가 부처가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는데 부처는 곧 왕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속에 삼국시대의 불교가 발달했던 증거이다. 장막의 연꽃 봉오리 장식도 불교가 수용되었다는 증거이다. 기록상 불교수용이 372년임에 비하여 고분의 연대는 357년으로 불교수용 20년전에 벌써 궁중을 중심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개 되었음을 입증하다. 연꽃은 부처의 탄생을 의미하는데 부처가 태어나 일곱발자욱을 걸었을때 그 발밑에 피었던 것이 연꽃이다. (연꽃은 이집트에서부터 신성시되었다. 민화에서는 연밥에서 유추할수 있듯이 다산의 염원을 상징한다.) 이런 연꽃들이 4세기 중엽에 그려지고 있는데 이런것을 기초로 사찰벽화가 그려진다. 5세기에는 본격적인 불상이 그려지는데 부처가 있고, 좌우에 사자가 있고, 주위에 공양상이 있는 구도이다. 5세기 벽화인 장천1호분의 불상의 모습은 중국 북위식 불상의 형식이다. 이런 형식의 불상이 백제 초기에 발견되는데 보살상들도 5세기 북위의 형식과 연관되어 옷자락이 날카롭게 삐진다든지 하는 표현기법을 보인다. 후에 불상이나 보살상들의 수염이 난 이국적인 얼굴이 우리식의 얼굴로 바뀌게 된다. 장천1호분의 비천상들을 보면 대체로 5세기의 비천들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불상과 공양하는 부부상이 그려지는데 부처의 공덕을 빌어 체제를 유지했던 초창기 불교의 모습을 볼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비천 가운데 6세기초로 추정되는 안악2호분 비천상을 보면 소반에 연꽃을 들고 하늘을 날고 있다. 이 벽화는 왕비가 승려를 앞세우고 절에 가는 행렬도로 계급사회가 갖는 특성에 따라 신분에 따라 사람의 크기가 다르다. 귀족보다 승려가 더 작게 그려지는데 승려가 왕과 귀족에 대한 존경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한편으로 자기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모습으로 당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엿볼수 있다. 고구려는 후기에 이르러 불교보다 도교를 숭상하는데 연개소문때는 도교를 국교화했을 정도이다. 그때 해신과 달신을 그린 통구5호분 벽화가 그려진다. 하반신은 뱀이고 상반신은 사람이 여자는 달을 남자는 해를 들고 있는 벽화이다. 이 벽화는 화려한 오채를 함께 쓰고 있고 바로 이런전통이 고려불화로 이어진다. 불화를 잘 그렸다는 고구려의 담징이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바로 이런 화법과 화풍, 색채감각이 고려불화로 이어진다. 우리민족의 심상속에는 본래 뛰어난 색채감각이 살아있다. 신라불화는 기록으로만 남아있는데 화승인 솔거가 그린 황룡사 벽화 설화는 채색과 묘사가 뛰어났다는 것을 전한다. 고구려불화의 색채감각에 뛰어난 묘사가 덧붙여졌을 것이다. 신라 호국불교의 사상인 화엄은 의상, 원효의 출현과 함께 전개되는데 755년과 756년 사이에 석굴암, 다보탑, 불국사가 만들어진다. 화엄경변상도를 보면 집과 보살상 사이에 부처가 앉아 있다. 부처의 얼굴은 원만한 얼굴이다. 변상도는 표지그림으로 검은 종이에 금분과 먹선으로 그렸는데 무릎의 해부학적 묘사가 뛰어나다. 신라불화는 불상조각에 문화적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 신라의 회화적 감각은 봉덕사종의 비천상에 나타나는데 고구려 비천에 비해 화려하고, 욕심 많고, 번잡하다. 고려시대는 불경편찬사업과 목판인쇄술도 발전하지만 사경도 역시 발달했다. 11세기 대보적경에 그려진 비천상들은 살이 찌고 신라때보다 더 늙은데다 형상도 서있는 모습으로 딱딱해진다. 이 비천상은 은분의 가는 선으로 인물 전체를 정확히 표현했다. 비천상의 변천을 보면 고구려 비천은 전신을 펴서 날고, 신라의 비천은 무릎을 꿇었고, 고려의 비천은 뻣뻣이 서있는 모습이다. 종이는 감지에 쪽물을 들여 색깔을 내는데 지금은 종이에 내는 이 쪽빛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고려종이는 중국에서도 유명하여 책을 편찬한다든지, 불사를 한다든지 할때 고려종이를 수입해 갔다고 한다. 고려시대 인쇄문화의 발전은 이데올로기적 강압성에서 벗어나 지식으로서의 불교의 전파가 뿌리를 내리는 그래서 승려의 정치적 열할이 커지는 과정을 드러낸다. 11세기 어제비전변상도는 송나라때 해탈을 위해 부처를 찾아가 물긷는 일부터 시작하여 득도에 이르렀다는 일화를 목판 삽화로 판것으로, 불경의 맨앞에 내용을 압축해 보여준 것이다. 12세기 개성정권은 귀족권력의 힘이 큰 역할을 하면서 세련된 청자문화시대를 맞게된다. 12세기중엽, 1170년 전후에 무인정권이 들어서면서 세련되고 섬세한 푸른색이 회색으로 바뀌고 대신 문양 즉, 상감청자가 발전하게 된다. 개성귀족에 반항한 무인정권이 서게되고 그러면서 지방의 재력을 갖춘 귀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가운데 상감청자가 발전한다. 상감청자는 대단히 독자적인 양식을 갖고 있다. 1230년대부터 몽고와 전쟁을 치르고 13세기 중엽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나전칠기기법을 도입한 상감청자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화려함은 권문세족들이 몽고와 결탁하여 자기의 행복만을 기원하는 가운데 원당사찰을 세우고 자신의 안녕을 불화를 통해 기원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부석사 조사당벽화는 고려때 그림이 보존된 것이 아니고 덧칠된 것이긴 하지만 고려적 형식은 알수 있다. 악귀를 발로 밟고 있는 사찬왕과 보살상 등 벽화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다. 14세기 수덕사 대웅전의 맞배지붕을 보자. 우리건물은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름다운데 특히 기둥과 공간을 가르는 공간구성은 절묘하다. 안쪽변면에 벽화가 그려졌을 터인데 지금은 수반에 연꽃과 부들을 꽃꽂이 해놓은 것이 남아있다. 건축장식에서 고려불화로 발전하게 되는데 현재 남아있는 고려불화중 가장 오래된 것은 1286년 자회라는 승려가 그린 그림으로 1300년이후가 되면 문양이 작아지고 주름이 더 복잡해진다. 발아래 연꽃이 피었고 아미타여래 손에 금으로 바퀴가 그려져 있다. 바퀴는 석가의 설법을 상징한다. 석가가 녹야원에서 설법을 할때 바퀴를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고려불화중 가장 엄격성을 갖춘 것의 하나이다. 이 불화가 나타나기 이전의 불상은 전부 정면상이었는데 여기서부터 부처가 동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붉은색의 옷주름은 음영을 넣어 그리고 금으로 옷주름의 입체감을 도드라지게 하면서 붉은 가사의 꽃무늬 모양을 정밀하게 하나하나 그렸다. 치마의 구름무늬를 금분으로 치장하고 있는데 고려불화가 금치장을 많이 해서 화려한데도 깊이와 고상함을 간직한 이유는 염색을 한 바탕에 색을 올리면서 색이 뜨는 약점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발아래 핀 연꽃은 서양화의 입체감을 능가하는, 연꽃의 생동감이 살아 피어나는 모습이다. 1300년대가 되면 붉은 가사에 둥근무늬가 작아지면서 번잡한 인상을 준다. 예배대상으로서의 아미타래형도는 극락으로 맞이하는 장면을 표현 했는데 고려말 항몽시기에 아미타신앙이 유행한다. 극락왕생, 수명장수와 같은 기복적인 귀족신앙의 한 측면을 볼수 있다. 아미타여래가 보살을 대동하고 등장하는데 왼쪽관음 보살상이 몸을 숙이고 선재동자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부처의 피부감은 배채법을 사용하여 흰색을 매겨서 부드러움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도록 했다. 이 기법은 조선시대에는 불화에는 안 나타나고 초상화를 그릴때 다시 이용된다. 14세기초 충렬왕때 조각의 격식을 이용한 그림의 부처는 섬세한 선묘법으로 표현되었지만 얼굴은 우울한 모습으로 불교의 위세가 약화된 형세와 국가가 남의 지배를 받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상적 불교사회를 추구했더라도 사람이 그리는 것이기에 그리는 사람의 미의식과 정서를 벗어날수 없었던 것이다. 아미타삼존도(1309년)는 아미타여래좌우에 관음상과 대세지보살을 대동한 형상으로 아미타여래의 무릎아래로 정면배치 하였다. 이것은 고려불화의 구도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 양단구성으로 왕과 신하의 관계같은 신분사회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당시 친원권문세족 여인의 미의식을 가장 잘 담고있다. 관음보살은 원래 남인도 청정지역 보타나까산의 연못에 계신데 맑은 공기, 깨끗한 물, 과일, 꽃을 가진 암굴에 거한 관음을 수월관음이라 한다. 이 그림의 주제는 반가좌의 관음보살이 세상의 욕심과 죄악과 갈등을 없앨수 있는가를 물어오는 선재동자에게 답을 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관음상의 특징은 보타나까산의 암굴에 대나무가 그려진다는데 있다.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시발이 의상대사인데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직후 강릉 낙산사 아래 관음굴로 관음을 만나러 간다. 거기서 관음이 산위에 올라가면 대나무가 두개 있는데 거기에 절을 지어라 해서 지은 절이 낙산사이다. 고려 무인정권이후 원나라 정권아래 형성된 귀족문화의 속성을 관음상이 잘 보여준다. 1300년경의 수월관음상의 구도는 선재동자와 물방울 모양의 광배가 특징이다. 관음보살과 함께 지장보살 신앙이 유행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면 저승에 가는데 지옥에는 지장보살이 10명의 시왕을 대동하고 재판을 한다. 지장보살은 보살 가운데 여래가 되기를 포기하고 지옥세계를 관장하면서 인간과 가장 가까이 만나는 부처중의 하나이다. 지장신앙이 우리나라에 민간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크게 유행하는데, 어느 절이나 명부전이라는 전각이 있다. 지장이 계신곳이 명부인데 지장은 머리에 천을 두르는게 특징이다. (고려불화중 거의 태반은 일본사람이 수정하는 바람에 눈썹등에 일본풍이 가미되어 버렸다.) 지장보살상은 지장보살이 시왕을 데리고 있는 장면으로 상하 양단구도이며 지장의 상의 색깔이 의외로 차분하다. 그외의 석가모니, 나한, 마리지천등이 그려지고 특히 아미타 신앙과 관련해서 변상도가 발전한다. 관경서품변상도는 아미타 불경중의 하나로 시대상과 관련된다. 경전의 내용은 마가다국의 왕과 왕자의 권력투쟁을 담고 있다. 왕자가 자기 아버지인 왕을 가두고 왕이 된 뒤에 왕비가 슬퍼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을까 하고 부처에게 간청하니 부처가 나한을 보내 아들을 설득하고 왕비와 권속들에게 16관을 보여주어 맑은 세계를 보면 갈등과 고뇌가 없어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관경서품변상도는 푸른색의 색감이 빼어난 작품으로 설충이라는 선승이 그렸고 14세기 초반 불화 가운데 친원관료가 아닌 무반과 서민들이 시주해서 승려들과 결합하여 만든 불상의 대표작이다. 푸른빛 외에 금분으로 칠한 피부감이 뛰어난데 그 가운데 비천, 보살, 공양하는 여인들, 연못의 모습 등 경전의 내용뿐 아니라 현실 도상들이 들어가서 일반회화의 발달을 추정할수 있다. 1350년 미륵하생경은 고려말 썩은 불교와 승려에 대한 반감 속에서 새로운 미륵부처의 세계를 염원하는 가운데 그려진다. 부처의 얼굴이 일으러졌다. 전체모양은 탑모양인 묘법연화경은 경전의 글자를 배열하여 도상화 시킨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치성과 정성의 한 단면을 볼수 있다. 이러한 기운들이 고려불화와 사경편찬으로 나타난 것이다. 수호신 신장도는 14세기 이전의 것으로 문수와 석가가 문답하는 불경이다. 표지에 금과 은으로 모란꽃을 장식했다. 고려불화는 모필선의 탄력을 세운 감필법 형태의 수묵불화의 발전을 일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초록색과 붉은색의 대비효과를 충분히 살려 화려하고 커지는데 대신 섬세함은 떨어지고, 그러나 좀더 대중적인 얼굴의 대중적인 미적정서를 담게 된다. 초기에는 고려양식이 계승되다가 후기에는 조선의 독자적 불화형식이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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