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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 | [문화저널]
<백제기행> 도도한 역사의 숨결을 타고 흐르는 '백제의 미소' 제 86회 백제기행 충남 일대 백제문화권
글 임창원 군산대 교수(2003-03-02 20:41:54)
날씨가 비올 것 같지는 않은데 잔뜩 찌푸려져 있다. 그래도 토요일 오후라서인지 시내 거리의 모습은 매우 활기차 보인다. 요즈음 여러 가지 이유로 집에만 눌러 있는 시간이 많다가 오랜만에 시내에 나와서인지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다. <문화저널>을 펴내는 사단법인 '마당'에서 주관하는 백제기행에 아내와 함께 따라 가도록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백제기행에 참여하여, 보고 배운 것이 많다고 자랑하곤 하는 아내의 권고로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어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수년이 지나서 기억이 생생하지는 않지만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고분군 등을 답사하는 백제기행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전북대 윤덕향 교수의 해박한 식견과 자상한 설명으로, 이 분야에 전혀 문외한인 필자가 문화재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번 백제기행은 처음이 아니고 두 번째이다. 토요일 오후 2시경, 제 86회 백제기행(2월 15일 ~ 2월 16일)은 '다시 백제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설레는 마음으로 충남 백제문화권을 향해서 전주를 출발하였다. 출발의 어수선함이 쉽게 가라앉질 못했다. 30여명 남짓한 답사회원 대부분이 초등학생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오늘 전주시내 대부분의 학교들이 봄방학을 하여 무엇인가 배우고 익히고자 어린 초등학생들이 많이 참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버스는 어느새 삼례를 넘어 금마로 향하고 있었다. 벌써 이번 백제기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특별 초빙 강사이신 조법종 교수님이 소개되었고, 교수님은 마이크를 이어 받아 연신 주변을 둘러 보시면서 설명이 끝이 없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백제문화권의 중심을 부여로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금마 왕궁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문화재들로 미루어 보아 전주 익산을 중심으로 한 전북권이 백제문화의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교수님의 말씀은 내 눈을 번쩍 띄게 만들었다. 나는 일찍이 왕궁석탑 2~3km 거리에 있는 인근 마을 창평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초등학교 다닐 때 봄 소풍이 되었든, 가을 소풍이 되었든, 학교 인근에 있는 산 아니면 왕궁탑이나 미륵탑 중에 번갈아 가면서 소풍을 가곤 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모두들 문화재에 대한 보호 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요즈음에 둘러쳐져 있는 보호 울타리도 없이 완전히 아이들 놀이터로서 뛰어 놀고, 떠들고, 술래잡기하던 그런 곳이었다.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 예술적 감각과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이 먼 후손들이 놀이터가 목적은 아니었을 텐데…. 우리는 그 속에서 별 생각없이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백제기행 덕분에 지금은 가족이 살고 있지 않은 고향마을 앞을 지나면서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추억속에 잠시 젖어 보았다. 맨 처음 답사지는 부여군 임천면에 소재하고 있는 성흥산성이었다. 버스 기사님의 능란한 운전솜씨와 백제기행의 성공적인 임무완수를 위한 열정으로 거의 정상에까지 그 거대한 물체는 서비스 정신을 십분 발휘하였다. 산 정상부 주위를 돌려 테뫼식으로 쌓은 이 석축은 견아식(犬牙式)축성이라는 설명 말씀에 이때껏 끼어들기를 시도하던 상민이가 개이식(개어금니식)으로 말하면 될텐데,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하느냐고 하여 모두 웃으며, 훗날 백제 부흥운동에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고 하는 이 산성을 뒤로 하고 바로 그 근린에 있는 대조사(大鳥寺)로 향하였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많다 보니 이동간에 생기는 어른들의 느슨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활기차고 바쁜 모습들이 역력하다. 어린이들의 엉뚱한 질문에 조교수님 실소(失笑)가 여유롭고, 그래서인지 사인을 받아가려는 어린 꼬마들이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대조사에서는 경내의 옥외에 건립된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인상적이다. 이는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상의 하나로 충남지방에서는 논산의 관촉사 석불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한다. 이 보살상 위로 뻗쳐있는 우리의 전통적인 소나무는 한층 더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짧은 토요일 오후 일정에 견학해야 할 곳은 많고, 자꾸만 시간은 가고, 따라서 마음만 바빠진다. 버스 속에서 이미 배포받은 대동여지도를 통하여 우리가 가야할 곳들을 벌써 몇 번째 확인하면서 우리 모두는 지도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량사(無量寺). 언젠가 산악동호인 모임에서 추진이 되었던 만수산 등산으로 잠시 들렀던 곳이다. 그때에는 무량의 깊은 덕도 생각을 못했고, 아미타불, 극란전의 다른 의미도 몰랐다. 또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영정과 부도가 있었음을 의미 깊게 새기지 못했음이 부끄럽다. 아직 금전(돈)이라는 화려함으로 화장되지 않은 퇴색(退色)된 모습들이 정겹고, 정비되지 않은 출입로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시간을 재촉하여 해가 질 무렵, 오늘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성주사지이다. 충남 보령시 성주산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써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라 한다. 현재 국보 8호로 지정되어 있는 낭혜화상 백월 보광탑비가 특기할 만하고,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글로 유명하다. 성주사지 오른편 자락에 부서져 깨어져 있는 부처상을 어느 누가 시멘트로 바르고 붙여 놓았는지 울상으로 변한 그 부처의 모습이 저물어 가는 어둠과 조화를 이루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역시 하루를 바쁘게 지내고 쪼개어 쓰다보면 아주 길게 느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더욱 길고, 가능한 한 무한한 시간으로 만들려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아껴쓰는 것이 그 첩경인 것 같다. 상양관광농원에 여장을 풀고 그 곳 특미(特味)인 삼겹살로 피로에 지친 몸에 원기를 불어 넣고 농원측의 협조로 마련된 모닥불 태우기로 정월 대보름날의 풍속이었던 쥐불놀이를 대신하고, 바다 내음이 물씬 나는 생굴을 구워 먹으며 권커니 자커니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추위를 녹이고 옛 백제의 여러 모습들을 더듬으면서 편안한 꿈속에 빠져들었다. 조용한 농원의 새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아이들이 벌써 일어나 뛰어 논다. 아이들이라서인지 친구도 빨리 사귀는 것 같다. 날씨도 문화답사에 동참하는 듯 꽤 포근해졌다. 오늘 첫 답사지인 해미읍성은 해미면 읍내리에 소재한 성으로 조선 선종 22년에 축성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평지에 축성한 석성으로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이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이기도 하며 천주교 박해 80년간에 1천명의 순교자가 처형된 성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호야(회화)나무의 처연한 모습과 감옥터가 어울려 가끔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오다 가다 들리는 길이 아닌 것 같다. 가파르고 좁은 길을 오르면서, 그리고 돌계단을 세면서 속세의 찌든 먼지와 때를 벗기고 오라는 듯 한참을 올라서야 개심사(開心寺)에 당도했다. 그러고도 곧장 불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연못 위에 가로놓인 외나무 다리를 무사히 건너가야 피안(彼岸)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미래(어린이들)와 현재(어른들)의 기념촬영을 마치고 조교수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가는 곳마다 무엇인가를 메모하는 아이들, 그리고 열심히 듣고 적는 선생님들과 부모님들, 교수님 강의에 기(氣)를 돋구어 준다. 이때 해우소(解優所)에 들렀다 나온 윤진이가 울상이다. 해우소 밑을 내려다 보고 너무 무서워 볼 일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순간 엄마한테 잘못한 일이 생각났단다. 바로 이 마음이 개심(開心)이 아니던가? 당간지주, 5층 석탑, 석조(石槽), 법인국사보승탑 및 그 탑비, 그리고 건달신, 손이 여섯 달린 아수라 상이 떠오르는 곳이 보원사지이다. 요 얼마 전에 종영된 TV 드라마 가운데 자주 오르내렸던 탄문스님의 얘기가 법인 국사를 가깝게 만든다. 폐허가 된 이곳을 보기 위해 징검다리를 건너던 중 발을 잘못 디뎌 물에 빠진 아이들의 모습도 정겹다. 그 아이들은 내가 어렸을 때 징검다리를 건너서 학교에 다니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된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은 지금까지 내가 본 문화재 중에서 가장 인상깊게 남는다. 부풀어오를 듯 통통한 뺨, 펑퍼짐하여 푸짐한 코, 도톰한 입술, 얼굴 가득한 맑고 티없는 미소, 빛의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웃음의 신비함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 백제의 미소를 오늘에 살릴 수는 없는 것인가? 정신 없이 보고 듣고, 오르고 내리다 보니 시장기가 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서산 마애불입구 용연집에서 어죽을 정말 맛있게 들었다. 시장이 반찬이 아니라 어죽이 반찬이었다. 어죽 두 그릇을 삼킨 배를 안고서 마지막 코스인 태안 마애삼존불을 향해 느긋하게 출발하였다. 마애불은 태안의 주산인 백화산 정상부에 못미쳐 자리한 태을암 동편에 있었다. 옛날엔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관람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하는데 이해가 되었다. 바위가 많아 하얗게 보이는 백화산(白華山)은 쏟아지는 햇살로 더욱 하얗게 보였다. 그 여래 보살형식으로 높이는 왼쪽 불상이 2.07m, 오른쪽 불상이 2.09m, 중앙 보살이 1.3m이다. 바위의 새겨진 면이 세월에 못이겨 10도쯤 숙여져 있으며, 부처의 눈과 귀가 아들을 낳거나 병을 낫게 하는데 효험이 있다는 속설로 사람들이 갈아간 탓에 얼굴 모습이나 자세한 모양을 알아보기가 어려워 안타까웠다. 짧으면서도 많은 것을 본 이번 백제기행은 참으로 값지고 뜻깊은 여행이었다. 귀로에서 보게 된 서산 간척지, 바다를 막기 위해 폐선을 이용한 재벌회장의 기지, 그 곳에서 생산되는 '기러기가 온 쌀', 금강하구둑에 몰려든 철새들, 그 모든 것들이 교육의 현장이었다. 열과 성의를 다하신 조교수님께 서산 마애불 사진을 선물하신 선생님의 넉넉한 마음, 나이 많음을 배려한 사려깊은 뜻, 아이들이 쏟아내는 소박하고 진솔한 표현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글을 써 본 경험이 없는 필자에게 글을 부탁하신 김 실장님께 송구스런 한편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아무쪼록 문화저널에서 추구하는 모든 목표가 잘 성취되고, 또 이번 문화기행에 함께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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