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 | [세대횡단 문화읽기]
근대주의 지향한 높은 시대적 감각의 작가
심은택(沈銀澤)
이철량 전북대교수·미술교육과
(2004-02-05 12:18:50)
심은택은 전북출신의 많은 작가중에서 특히 산수화에서 역량을 인정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1887년에 나서 독자적으로 그림공부를 하다 서울로 올라가 청전 이상범 문하에서 산수화를 공부하였다. 고향에 머물며 공부를 하였던 초기 작품들이 보이지 않아 어떤 유형의 작업을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의 산수화에 넣었던 화제글씨가 예사롭지 않은 유려한 필치를 담고 있어 그림공부를 하기전 이미 서예에 기량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서예뿐만 아니라 사군자등 문인화에도 일찍부터 접근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본격적으로 산수에 입문하기 이전에 시, 서, 화에 깊은 이해를 가졌을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 서울로 올라간 청전 이상범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청전은 심은택보다 10년 연상으로 우리화단의 제일가는 근대작가였으나 초기에는 생활이 곤궁하였었다. 그는 충남 공주에서 나서 1914년에 조석진과 안중식이 이끌었던 서화미술원에 입학하여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서화협회전(고희동, 조섯진, 안중식등이 주가 외었던 일제시대의 민족화가들의 모임체로 1921년에 첫회전을 가졌다)과 선전(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최초의 관전으로 조선미술전람회라 한다)에 참가하며 이름을 얻었다. 1936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고 1938년부터 참여작가가 되어 화단에서 확실한 위치에 서게된다. 그는 동아일보에 근무하여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한다. 1932년 무렵부터는 청전화숙(靑田畵塾)을 열어 후배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청전의 활동으로 미루어 심은택은 유명작가였던 청전을 찾아 청전화숙에서 산수지도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발판으로 1938년 제 17회 선전에서 특선을 하게 되는 데 이때 청전은 심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18, 19 ,20, 22, 23회에 입선을 하는 역량을 보였다. 남아있는 작품들이 청전의 초기 화풍을 소화해내고 있고 또한 심은택이 호를 청헌(靑軒)이라고 한것만 보아도 그가 청전의 제자로서 확실한 인정을 받았던 듯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헌은 그의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도니 그의 나이 61세 1948년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리 짧지않은 삶을 살았던 점으로 보아 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생각되며 주로 서울로 산재해 있는 듯 하다.
여기에 보이는 청헌의 두작품은 가히 작은 청전이라 할만큼 스승의 양식을 담아내고 있다. 「추강산수도」는 심은택의 말년경으로 추정되는 작품인데 과거 조선조적 산 수화양식이 현대로 변모되는 초기적 양상을 담고 있다. 먼저 화면에 우러나는 산천의 인상이 과거와는 달리 현실적 분위기를 담고 있다 .전경 한켠에 숲을 그리고 그 넘머로 두 척의 낚싯배, 강건너 산언덕에 초가가 있으며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폭포가 있다. 화면의 내용은 상당한 관념적 풍경이지만 관념으로 빠지지 않고 현실감을 높이고 있다. 그것은 심은택이 당대에 널리 확산되었던 사경(실제경치를 그리는 것)을 충분히 소화해 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한국의 전원을 실제로 사생하며 그리는 분위기는 일제 시대 동양화단의 일반적 경향이었고 청전과 소정 변관석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구도와 필치에서도 청전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처럼 가까운 강변에 고기배를 그리고 옆으로 비스듬히 쳐내르는 필치등은 청전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었다. 청전은 40년대 전후에 한국의 야산을 짧게 귾어친 필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더욱 발전시켜 50년대 이후에는 날카로우면서 옆으로 쳐내리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 냈는데 심은택의 이 그림에서 청전양식이 확립되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천전은 전경에서 후경까지 이어지는 대경적(大景的) 구성에 짧은 점획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30년대에 이미 화숙을 열고 후진을 지도하였는데 심은택은 아마도 이무렵부터 청전화숙에 몸을 담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는데 병풍으로 꾸며진 여러 폭의 산수화는 그가 사생보다는 관념산수에 훨씬 가깝게 접근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1920년대 이후 30년대는 스산한 한국가을의 서정성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풍조가 선전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심은택은 본격적으로 사생에 참여하고 있지 않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커다란 폭포를 주된 내용으로 잡거나 현실성이 희박한 산세들의 기괴함, 혹은 전통남화적인 강변의 풍경을 여러폭으로 꾸며져있다. 그리고 스승 청전의 30년이후의 작품들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은 화제글씨가 화면 상단에 큼직하게 나타나고있는 점이 더욱 스승보다 전통적이라 할만하다. 이는 심은택이 일찍부터 익혀온 서예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데서도 설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풍그림에서도 확연히 전통적이라고만 말해질 수 없는 점이 있다. 「추경간수도」에서 확연하게 보여지는 짧은 점획이 나무나 숲에서 보이고 있고, 또한 언덕이나 산등이 잔잔한 미점(米点)으로 처리되었는데 이 점묘가 대단히 부드럽게 이어지면 그 위에 덮혀진 담채가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 맑게 표현되었다. 특히 화면 전면에 청아하게 우러나는 청빛은 스승 청전이 매우 잘 사용하였던 기법이라 할 수 이다.
필자가 만난 심은택의 몇점의 산수화는 거의 같은 양식을 보여주는 것 이였다. 대개가 말년의 세련된 작품으로 그의 면모를 모두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청전화숙을 통해 공부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동일한 양식의 청전풍을 줄곧 그려 왔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청전자신이 산수이외의 다른류의 작품을 별로 그리지 않았던 데서도 짐작 할 만하다. 어떻든 스승인 청전은 수업기에 관념산수에서 적어도 30년대 이후 줄곧 한국풍경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실화풍에 몰입하였던 점에 반하여 심은택은 비교적 관념적 표현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현실감을 자아내며 완전한 고나념산수에 빠지지않고 근대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점은 그의 높은 시대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몰론 이러한 표현 감각은 전적으로 스승의 도움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스승의 새롭게 개발된 필치, 담채의 새로운 맛등이 그의 작품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다만 새로운 독사정의 개발과 보다 진취적인 작가의식의 허약함이 그의 타고난 자질을 아쉽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