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5.1 | [문화저널]
천년의 다리, 빼어난 아름다움과 정성의 손길이 거기 있었다.
이덕우 기독교 이리방송 프로듀서 (2004-02-05 12:13:47)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항상 새로운 만남을 갖고 또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만남이 항상 반갑고 기쁜 일은 아니다. 만남 자체가 피곤한 일이 되어 버리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 마음을 닫아버리고 만남을 피해 숨어버리고 싶다. 그런 만남은 권태로움만 키워줄 뿐 아무런 전환점이 되지 않는다. 사소한 만남일지라도 기쁨을 주는 만남이 있다. 쌀쌀한 바람을 안고 퇴근하는 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장마차를 만나는 것이 그렇고 늦가을 어스름 저녁에 길옆에 피는 들국화를 만나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최근에 백제기행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과 나를 맞아주었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 역시 나에게는 반가운 만남이었다. 방속국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분류하는데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그중 두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언론인이라는 것과 문화의 창조자라는 것이다. 감히 문화를 창조한다는 말이 주제넘은 표현이라면 문화를 가꾸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런데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바쁘게 메꾸듯이 살다보면 문화를 창조하기는커녕 문화의 뒤꽁무니를 따라 잡기도 힘겹게 느껴진다. 백제기행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런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 도시의 풍경은 건조하다. 특히 공기가 차가운 아침은 더욱 그렇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모여서 버스를 기다리는 곳의 풍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아침에는 으레 빨리 건강한 햇살이 공기를 따뜻하게 덥혀주기를 바라게 된다. 역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햇살이 긁어지면서 우리가 모였던 우진문화공간 앞은 도시에서 하나의 섬을 이루는 듯했고 도심 한가운데 훈훈하게 만들어진 백제기행단이라는 섬은 버스와 함께 남쪽으로 이동을 했다. 아직 전주도 낯선 나에게 더 낯선 곳으로의 이동은 새로운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눈이 감기고 조금이라도 잠을 보상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피곤한 몸뚱아리와 타협해온 오랜 습관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자다가 깨다가 버스가 도착한 곳은 조계산이었다. 그다지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려해 보이지도 않는 산이기에 조계산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어머니와 같은 산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넉넉하고 소박한 인상을 풍기는 산이었다. 그런 넉넉한 산자락에 선암사와 송광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 싶었다. 불교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에 전남 승주구 쌍암면 죽암리에 주소를 두고 있다. 유래에 대해서는 백제 법흥왕 당시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세웠다는 설이 있다. 언제 창건이 되었든지 선암사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수무번 이상 지켜볼 수 있는 세월동안 산자락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신비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선암사로 오르는 길은 완만하다. 산책을 하듯 옆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면 어느새 무지개 모양의 다리 두 개가 나타난다. 선암삼의 동간구조에 담긴 철학으로 본다면 극락으로 인도하는 첫 번째 관문인 셈이다. 모물 400호인 승선교이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도 무너지는 세상에 돌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작은 다리가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볼수록 그 정성이 돋보이는 다리이다. 이번 백제기행의 설명을 맡아준 전남대 천득염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 다리를 만들 때 도공들은 마음이 정결해졌을 때 그 찬 냇물에 목욕재개하고 돌 하나를 비로소 쌓아올렸다고 한다. 그 오랜 기간과 그 깊은 정성을 감히 영악한 현대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승선교와 같은 반원형의 무지개 다리는 돌끼리 서로 기대고 얽혀야만 무너지지 않는다. 돌 하나라도 빠져나가면 전체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완벽한 공동체를 생각케하는 승선교를 지나면 바로 강선루가 나타난다. 승선루에서 선녀가 목욕을 한후 날아올라 강선루에 내린다는 뜻인 듯 한데 이 곳까지가 선암사의 진입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한국사찰의 공간 구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천득염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사참은 공간의 순서에 의미를 부여하여 집입공간, 과정적 공간, 청정공간, 매개공간, 주공강, 부공간 등으로 나눈다고 한다. 선암사의 경우는 이런 공간적 의미부여가 아주 훌륭하다. 두 개의 홍교를 거쳐 강선루에 이르는 진입공간은 속계의 온갖 번뇌와 오욕을 씻고 천상의 성스런운 곳으로 오르는 의미가 있다. 선암사의 공간구성은 이렇게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자신의 영육을 청정케하는 단계를 거친다. 강선루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길은 두 번을 휘감고 돌아가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이 과정이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물게 길다. 일주문 앞에 도착하면 삼인당이라는 아주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앞에는 시원하게 뻗은 전나무 세그루가 인상적이다. 일주문을 지나는데 두툼한 누비옷을 닙은 몇 명의 스님들과 마주쳤다. 관광객을 맞는 것이 낯설지 않은 듯 어느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 이 절을 어느 특정 종교의 산물이나 전유물로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선암사는 우리 문화의 진수입니다. 문화유산으로 생각하고 그 깊이를 느끼기를 바랍니다. " 기독교 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정말 의미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들 중에서 그런 문제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선암사에는 의미 없는 것들이 없다고 말할마틈 돌 하나 기둥하나에도 모두 정성과 기원이 담겨 있다. 거기에 담긴 의미와 정성을 모두 모은다면 큰 도시가 하룻밤에 쏟아 놓는 이야기와 바람에 견줌이 손색이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일 것이다. 선암사를 돌아보면 느낀 것은 도서관 책꽂이에 꽂힌 수많은 책의 겉표지만 죽어 훑어보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우리는 선암사를 뒤로하고 내려와서 버스를 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아무리 좋은 물화유산이 있다해도 점심을 굶어가며 감상을 할 만큼 나는 예술 애호가가 아니다. 나의 알량한 주장은 훌륭한 음식은 어느 것 못지않게 귀중한 문화라는 것이다. 본래 나는 남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전라도 음식의 참맛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 시골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의 점심은 다른 무엇보다 기다려졌다. 구수한 된장국과 함께 스무가지에서 조금 모자라는 많은 반찬을 앞에 두고 나난 행복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L 오랜만에 시골공기를 마셨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는 선암사 근처 그 식당의 음식을 잊을 수 없다. 아쉬운 점은 그 식당의 이름도 모르고 그 식당이 어느 근처에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언제고 한번 꼭 가보고 싶은 식당이다. 아마 문화저널 식구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버스에 오르자마자 나는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또 잤다. 얼마나 잤을까? 다른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우리가 내린 곳은 금전산 금둔사이다. 약간 가파른 산길을 약 10분정도 오른 후에 우리는 보물 945호 석불입상과 접하게 됐다. 어엿한 사찰 대웅전 앞에 서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도 잘 오지 않는 산비탈에 석탑과 석불이 함께 서 있다는 것은 나의 식곤증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나 하는 자의적 해석을 해보며 찬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다시 버스에 올라서 조금 가다보니 깨끗한 한옥마을이 나타났다. 낙안읍성은 사적 제 302호로 전남 승주군 낙안면에 위치하고 있다. 읍성 일원의 면적은 약4만여평 정도이고 현제 2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성의 둘레는1.385m로서 객사와 관아, 민가를 둘러본 후에 동헌이 있는 관아에 도착했다. 낙안읍성은 오랫동안 군소재지였으므로 동헌과 객사 그리고 향교가 보존돼있다. 선암사에서는 강사인 천교수의 설명을 열심히 듣던 사람들도 낙안읍성에서는 여기저기 흩어져서 자유롭게 다녔다. 나와 친구는 날씨도 쌀쌀하고 해서 조금 일찍 버스로 돌아왔는데 4시 30분까지 버스로 오기로 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설마?" 하는 생각에 버스에서 내려 읍성쪽으로 걸어갔다. 아니나다를까 민속주 한잔씩 맛을 보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 김은정기자가 야속하게 한마디 한다. " 사람들 지금 일어나서 오고 있어요." 본래 막걸리와 동동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한마디 말이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눈치없음을 탓할 수 밖에. 흥이 오른 일행은 전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냥 졸고 있을수는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마이크를 잡았다. 성함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판소리를 학생들에세 가르치는 순창선생님과 제대로 배운 우리소리를 들려주셨던 김선생님 덕분에 나도 용기를 내어 도요 한곡을 불렀다. 빗줄기가 굵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전주로 돌아왔다. 그날 서울에서는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 서울의 첫눈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기분 좋은 겨울비를 맞았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