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2 | [문화저널]
이 시대의 글쓰기와 그 반성
문화저널(2004-02-05 11:56:14)
먼저 보의 아니게 불제자님들과 여러분들게 마음의 상처를 드린 것을 사과드립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시를 통해 나타내려 했던 의도는다음과 같이, 속세의 한 중생이 운주사의 부서지고 일그러진 불상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진짜 병을 깨닫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하여 마음에 간절한 서원을 세우며 산문 밖을 나선다는 것입니다.
시적 언어와 일상적 언어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선종의 선문답도 논리가 아닌 초월적인 언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를 풀어 드리기 위해서는 굳이 일상적 언어로 해명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첫행부터 이 시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문학에서 역설이란 표면상 자기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진술을 통하여 보다 놓은 차원의 속뜻을 나타내는 표현방법을 말하며 동서고금의 많은 경건한 경전과 운문에서도 자주 사용된 수사법입니다. 이 시의화지인 서정적 자아는 탐, 진,차 삼독에 꽉 쪄든 인물이기에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중생의 마음마다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부처의 씨앗을 관하기는 커녕 자신의 어리석고 캄캄한 무명의 마음과 행동을 맹목적으로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왜 운주사의 불상은 온전한 형상을 갖추지 못했는지 그 본래면목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ㅣ 이;시의 서정적 자아는 경내의; 불상과 곳곳에 자리한 불탑들을 통하여 차츰 차츰깨달음의 경지로 다가섭니다. 속세의 가장 낮은 곳에서 중새을 위해 궂은 일과 험한 형상르 대리 체험하는 불상의 참모습을 깨닫습니다.
마치 대승불교 경전 중 유마힐소설경에 나오는 유마거사처럼 말입니다. 부처는 생사 번뇌를 벗어났지만. 중생들의 치애(癡愛)로부터 생긴 실병(實病)을 대신하여 큰 자비심을 발하고 있는 불상임을 시적 화자는확연히 깨닫습니다. 따라서 부처는 본래 병이 없고 그병은 중생이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그 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사바세계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체득합니다. '나환자인 서정적 자아의 스스로 나병 고치기'라는 여기설적 상황이 앞으로 수많은 고통과 번뇌를 안겨 줄 것이지만 말입니다. 끝행의 '소록도'는 실제 지명이라기 보다는 속세에서 백팔 번뇌의 망상과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중생이 큰 병을 앓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사바세계를 상징합니다. 결국 시적 화자는 큰 깨침을 안고 산문 밖을 나섭니다.
부족하나마 이상으로 이시의 해명과 시적의도를 가름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분명코 이 시는 성스러운 불교의 세계를 나쁜 뜻으로 표현하고자 한 뜻이 아니었음을 재삼 표명하는 바입니다. 저 역시 큰 병을 앓고 있습니다.
오늘도 보살의 행을 서원하시며 정진하시는 수많은 불제자님들과 여러분들게 시적 의도와 상관없이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 드린데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거듭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