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페미니즘 영화의 한계
『가슴달린 남자』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2-05 11:25:10)
여느 해와 다름없이 이번에도 추석극장가엔 미국, 홍콩 등 외화들이 즐비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과연 여기가 한국 땅인지 의심이 생길 정도이다. 개봉관이 30여개에 이르는 서울의 경우 우리영화는 『가슴달린 남자』, 『비오는 날의 수채화 2』,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 단 3편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서울이라 그렇지 지바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가히 비참할 지경이다. 3편 중 한 두 편 선보인 곳도 더러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지방도시가 더 많았다. 전주의 경우 추석 전 여러곳에서 이미 상영되었던 『물랭루즈』만이 사실상 개봉작으로 다른 외화와 함께 관객들을 만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건지 이변이 일어났다. 『가슴달린 남자』와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연일 매진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증명해 보이겠다는 의도인지 그 소식은 『가슴달린 남자』 상영관 앞에 줄 서 기다리는 인파를 공중촬영했을 법한 사진까지 싣고 있다.
어찌보면 겨우 3편뿐인 우리영화 추석특선이 매우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러편 있다하여 관객이 정비례하는 것도 아닐테고 결국 제 살 뜯어먹기의 악순환이 뻔한 일이라 그렇거니와 어쨌든 고무적이고 반가운 현상임은 말할 나위없다. 추석특서보다 한발 늦었지만 여기서는 『가슴달린 남자』를 만나보자.
『가슴달린 남자』는,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 영화는 아니다. 지난 해 『결혼이야기』의 흥행성공에 힘입어 쏟아져 나온 코믹영화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이트 코미디라는 점에선 『결혼이야기』, 『미스터 맘마』, 『101번째 프로포즈』, 『그여자 그남자』류이지만 남녀 성차별 문제를 걸고 넘어진 것은 같잖지만 『복타치오 '93』, 『여자 아리랑』쪽에 닿아 있다.
우리 영화의 침체 현실로 봐선 관객 끌어들이기가 선결과제지만 그렇다고 너도나도 젊은이 취향의 코믹영화만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신승수 감독의 경우 이미 『아래층 여자 윗층 남자』로 유해에 편승한 적이 있는데도 또다시 코믹영화 『계약 커플』을 곧 크랭크 인할 예정이라니 한 말이다.
『가슴달린 남자』는 무려 135:1의 경쟁을 뜷고 대성물산에 들어갔지만 커피심부름은 물론 식사중 물 갖다주기, 심지어는 Y셔츠 단추까지 꿰매야 하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한 김혜선(박선영)이 마침내 남자인 김혜석으로 현진그룹에 입사하여 '실력발휘'하는 이야기를 외피적 구조로 짜놓고 있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현실적 진실이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여자에 대한 성차별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바다를 향해 문연지 백년이 되어 우리 것은 씨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외래화 되어버렸지만 조선조 양반 후예로서의 남성사고는 아직 건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슴달린 남자』는 페미니즘 경향의 사회성 영화로 분류할 만하다. 특히 김혜선이 남자가 되기위해 여자의 필수품들을 강물에 던지는 장면에서는 시큰한 감동마저 자아내게하는 사회성 환기로서의 몫을 해내고 있다. 오죽했으면 여자가 남자로 변신하려고 했겠는가하는, 그 기막힌 현실인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물론 여자의 놀랍도록 진전되고 성숙된 정체성, 즉 아이덴티티다. 단순히 '아이낳는 기계'로서가 아닌 남자와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싶어하는 천부적 욕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욕구는 상당한 수준의 성취에 도달한다.
남자도 해내기 어려운 큰 프로젝트를 혜선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귀국때의 여자 모습은 퍽 상징적이다.
그 대목에서 제작진이 예측했던 대로 젊은 층, 특히 여성관객들이 대리만족과 함께 영화값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얻었으리아 생각되거니와 "간식 찾아 먹으려고 발광이야"등 대사를 통한 남자 허물잡기 역시 페미니즘 영화로서의 『가슴달린 남자』가 거둔 수확 가운데 하나이다.
그 외 "짜릿한 남자야", "개똥에 밥 말아 먹는 소리", "식성에 맞는 냄비"등 속되긴 하지만 감각적 대사와 최민수의 남근을 표현한 "이만하지!"에 걸맞는 표정연기등이 돋보여 그런대로 괜찮은 영화에 값한 바되었다. (특히 이 대복에선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남근을 시계추로 은유한 묘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일정량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은 이른바 페미니즘 영화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성차별 사회현실에 기가 막히고 분노하여 남성이 되어 열성적이고 진취적으로 일을 했건만 혜석은 결국 사랑에 빠져든 '일개 여자'의 원위치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코믹터치라는 기법도 기본적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들어간 셈이다. 그 본령에 입각하여 어떤 응어리진 민중의 한을 후련한 웃음으로 해소시키는게 아니라 희화 자체를 억지로 즐기려는 것이 코믹영화의 대체적인 경향이거니와 『가슴달린 남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가령 혜선 언니의 대형라이터 사용(필자도 처음 보았는데 처음 장면에서만 딱 한번 사용함으로써 작위적 의도를 드러냈다)이라든가 최형준(최민수)과 합숙훈련때 같은 침대에서의 잠자리등을 의도적이고 극대화되 희화의 예로 들어볼수 있다. 여직원의 혜석에 대한 성적(강간 당하는) 상상도 지나치게 희화되어 있다.
한편 직배외화에 사뭇 시달리면서도 전에 없이 웬 양담배(말보르)를 피우게 했는지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웠다. 또 아무리 점심시간이라고 하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여직원 부모를 그리 대접할 수 있는지 주변 정황묘사가 너무 안이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