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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0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고발적 앵글 벗어난 벗기기 영화의 아류작 『여자 아리랑』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2-05 11:04:28)
영화진흥공사에서 매주 한 번씩 펴내고 있는 『영화소식』은 우리 영화의 한 장면을 표지로 장식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우리영화 진흥을위한 정부투자기관이고, 그곳에서 펴내는 주간지이니 만큼 홍보의 하나로 썩 괜찮아 보인다. 제260호 표지는 『여자아리랑』을 싣고 있다. 현대 여성의 주체적 의식세계를 담아낸"『여자 아리랑』이다. 그런데 영화의 어느 대목인지 모를 장면과 선전 문구가 걸린다. 아무리 비매품으로 한정된 독자들을 상대하는 잡지이고, 그 목적이 우리영화에 대한 관심 환기에 있다하더라도 특히 선전문구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해당영화를 본 관객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느낀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두부터 다분히 시비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말할 나위없이『여자아리랑』이 "현대 여성의 주체적 의식세계를 담아낸"영화로 선뜻 동의하기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어서이다. 언제부터인지 만성이 지배해오던 세상에 반기를 든 영화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 왔다. 페미니즘 흉내를 낸 그런 영화들은 억눌려왔던 이땅의 여권을 주로 자유로운 성생활 추구에 포커스를 맞춰 본질을 호도하는 경향을 꾸준히 드러냈다. 다시말해 조선조 이래 위축되거나 죽임을 당해온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권리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가학의 섹스라는 틀에 짜맞춤으로써 마치 '이층집'의 1층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깡깡 '69』, 『복카치오'93』등이 얼른 생각나는 그런 영화들이다. 서울보다 이곳 재개봉관에서 먼저 상영된『여자아리랑』(김기영 감독)도 예외가 아니다. 서두부터 옷을 벗거나 샤워하고, 까닭없는 정사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친구들(물론 여자들이다)이 복면을 한 채 성폭행범쯤 되어 보이는 강도로 침입해오는 것까지 그렇듯 복사판일 수 있는 지 오히려 희한할 정도이다. 영화의 호재로 받아들여지는 억눌린 성에 대한 상품화가 새삼 안타깝다. 『여자아리랑』은 은하(진주희), 샤넬 정(임옥경) 등 세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세 여자라지만 사실은 은하, 샤넬 정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작가이거나 디자이너이다. 특기 은하는 남자들이 "미소속에 숨어있는 본능을 경험하고 싶"어 직접몸 (여체)으로 부딪치는 대담성을 가진, 그야말로 '발로 뛰는'작가이다. 가당찮게도 작품을 위해서이다. 그녀는 남자들을 성의 노예로 단정하고 그 심리와 표정을 '취재하기 위해 헌팅을 나선다. 나아가 피학대 음란증을 경험하기 위해 타케트가 된 남자를 새디스트로 만든다. 그때까지의 특징은 그 일보 직전에 남자들을 직장이나 가정에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 밝힘증을 갖고 있는 방송국 뉴스 진행자를 파멸로 몰아 넣었고, 엉덩이를 복사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업무를 마비시켜 호텔로 유인한 회사사장도 그렇게 만든다. 과연 그것이 "현대여성의 주체적 의식세계"일까? 물론 아니다. 그것은 영화의 얼개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작품을 위한 은하의 행동은 잡지사 기자 상태(윤철형)와의 격렬한 정사씬에서 정체를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섹스에 굶주린 여자의 모습이 되어 끝나고 있기 땜누이다. 요컨대 남자들을 의식적으로 유혹하여 그 '짐승같은'세계를 적나라게 벗겨냈던 은하의 이른 바 작가적 체험이 소설의 완성을 위한 고발적 앵글이라는 본래의 의도와 괴리감을 드러낸 것이다. 하긴 현대여성의 주체적 의식세계라는게 늘 그런 식이다. 자연 쓸 데 없는 정사씬만 눈요기감으로 늘어놓은 벗기기 영화의 아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대략 그 지점에서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은하의 그런 행동거지는 성해방이 아니라 자신을 더 망가뜨리는 자해일 뿐이라는 점이다. 은하 뿐 아니다. 자유로운 성생활(예컨대 유부녀가 남편보다 젊은 애인쯤 하나 두고 밀회를 즐기는 그런따위)은 여성해방이 아니라 가정파괴와 사회 파멸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보였던 것은 샤넬 정과 코디 박(김광배)의 전도된 역학이다. 어느날 혼연히 나타난 디스플레이어 코디 박은 남자지만 여자화되어 있다. 반면 샤넬 정은 여자지만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등 남성적이다. 샤넬 정의 사랑을 통해 코디 박을 남자 본래의 모습으로 바꿔놓는 전개구조는 상징성을 일정량 획득한 채 『여자아리랑』의 의도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생각해 보라. 여자가 여자같은 남자를 진짜 남자로 만들어 놓는다. 그것이 그 남자들로부터 이제껏 짓눌려 왔던 여자가 해낸 일일 때 얼마나 통쾌하겠는지를. 그나마 그런 것이 이땅의 여성해방일 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코디 박은 무릇 여자같은 수동적 자세(예컨대"이러면안돼요!"등)로 샤넬 정에게 '당하고'있음인데. 한편 감독은 『복카치오 '93』에서처럼 여러 가지 현실무시에 집착하고 있다. 잡지사 부장(김경진)의 상태에 대한 태도를 우선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사랑에 눈 먼 사람이야 못할 짓이 없고, 대칭축에 있는 은하, 샤넬 정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너무 희화되어 박진감을 결여한 것이 결정적흠이다. 의상실에서 강도 당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주변정황의 디테일한 묘사가 부족하거나 없는 것이 우리영화의 약점이긴 하지만 그렇듯 서툴게 강도짓 할 범인도 있을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거리에서 환히 내다보이는 의상실의 문도 걸어 잠그지 않은 채" 나 잡아가쇼!"하는 식의 강도는 모르긴 해도 아마 없을 것이다. 단, 밧줄로 묶인 한계상황에서도 '황성하게'활동하는 남성에 대한 포착은 참신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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