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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내 인생의 저무는 '화양연화'
신귀백(2003-03-02 20:23:38)
이문세의 '조조할인' 노랫말처럼 함께 보던 영화는 벌써 주말의 명화로 나오는데 이제 그 텀은 너무도 짧다. 2월 8일 토요일 11 시 20분, KBS1에서 방영된 <화양연화>를 다시 보다. 사랑!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일생에 몇 번 안 온다. 왔다가 저녁 푸른 연기처럼 사라진다. 추억의 질량과 앙금은 저 심연 속에 머물다 새벽 안개처럼 깨어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혹은 영화를 통해서 더러는 영화를 함께 보는 사람과 더불어. 깨어나는 사랑들. <피아니스트>!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보는 이를 뻑 가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성의 아래 몸에 면도날을 대는 독신녀의 쓰라린 사랑의 고통이 접수는 되도 진심으로 너그럽기는 어렵다. <나인 하프 윅>이 갖는 미적 구조의 독특함을 어찌 잊겠나. 그러나 그 섹슈얼함만큼은 다음 생에나 있을 것 같고. 애잔하기로야 <우묵배미 사랑>의 민공례가 싸구려 여관 욕실에서 양말을 빠는 서글픈 사랑도 이해는 가지만 내 것은 아니다. 헤어짐이 지독하게 반복되던 <지독한 사랑>이 어찌 영화만의 이야기랴만 화양연화의 시절은 청보라빛으로 다가오는 저녁처럼 서서히 저물고 있다. 장만옥의 신랑과 양조위의 아내가 바람이 났다. 주로 외국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필요 없다. 창밖에는 비오고요, 쓰라리고 외로운 남과 여. 그들은 깃털이 같은 그러나 서로의 죽지에 부리를 파묻을 수 없는 새들. 국수 사먹으러 가는 군 살 한 점 없는 장만옥은 뒷모습도 고혹이다. 혼자 밥 먹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여인 리첸과 그를 지켜보며 비 내리는 좁은 골목을 스치는 양조위. 떨리는 눈썹으로 불화를 연기하며 손을 잡았다 놓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감싸는 연기로 슬픔을 참는 장만옥은 나의 애인이 되고 나는 진한 눈썹의 담배 피우는 양조위가 되어 라이터에 불을 당기며 영화에 빠져든다. 선량한 미소의 양조위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적을 깨는 눈빛. 예의 바른 타인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나의 지난 사랑도 깨어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러나 오관이 다 열리고 몸의 모든 섬모가 다 일어서는 사랑을 해 본 사람은, 비 온 뒤 어둠이 오는 것을 오래 응시하며 사무치게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발자국 소리, 노크소리, 전화벨 소리가 누구의 것인가를. 택시 안에서의 안타까운 눈빛, 주저하는 손잡기가 리얼리즘이라면 좁은 방안에서의 육체적 접촉도 없는 날 세우기에 몸 떨리는 것은 판타지다. 겨우 같은 상에서 밥 먹기와 어깨를 맞대는 영화보기 이상을 넘지 못하는 갑남과 을녀에게는…. 마치 훔쳐보는 듯한 카메라 워킹. 축복받지 못할 사련이어서 카메라는 중심에 서지 않는다. 카메라는 항상 그대로 정지해 있어서 배우들이 들어왔다 빠져나간 자리는 빛 바랜 포스터처럼 항상 조금 오래 남아있다. 흐린 거울 사이로 비치는 배우의 얼굴 그리고 배경으로 배치된 시계와 투박한 전화기의 인서트 장면들, <아비정전>처럼 비 맞는 가로등은 왕가위만의 익숙한 클리세로 친절하다. 거기다, 트리오 로스 판쵸스의 노래로만 듣던 그 경쾌한 '키사스'가 넷킹콜의 음악으로 화면의 리듬감이 맞춤옷같이 살아나는 것도 도연 왕가위 영화만의 부드러움이다.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며, 그 완고한 감정의 노동을 참아내며 엇갈리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차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앙코르와트 사원의 돌구멍에 흙을 발라 봉인을 하며 잊겠다는 양조위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봉인한다고 사랑이 잊혀지던가. 그보다는 상처받아 쑥부쟁이 꽃잎을 든 사내가 이 상처도 언젠가는 턱없이 가벼우리라는 박남준의 시가 내게는 더 와 닿는다. 여자는 입부터 늙는다던가. 포도문양의 백자처럼 목이 긴 차이나 칼라 원피스 위의 붉은 코트가 잘 어울리는 장만옥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일 먹는 그녀가 더욱 반갑다. 맥도날드에서의 청소하던 <첨밀밀>의 젊은 이요나 <영웅>에서 흰옷을 피로 물들이던 비설의 장만옥이 보온병을 들고 나타나 흑임자 죽을 가져다주는 화양연화가 다시 오는 날이 있을까. 어찌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을까마는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마지막 화양연화 일텐데.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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