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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2 | [특집]
국악 전통예술의 개화와 그 가능성
류장영 전북도립국악원 수석연구원 (2004-02-05 10:38:07)
올해는 문화체육부가 정한 '국악의 해'이다. 전통문화가 내적인 인자를 통한 성장에 한계를 드러내고 앙상한 정신적 자위행위에 맞춰 춤추는 일군의 도락가들에 의해 주물러지는 거대한 정체 속에서 문화적 실천이 무위의 거들먹거림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기막힌 난국이다. 아무튼, 갈수록 위태롭게만 느껴지는 문화적 황폐함에 대항하는 그 모든 도적과 위인들, 혹은 여기에 그저 기생하는 군락 외에도 근년 들어 문화유산과 전통 예술에 대해 각별한 애정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관련 기관과 당국의 지원은 그 힘이 국가의 공적인 동력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그 여파나 의의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화체육부의 주도로 올해를 국악의 해로 지정하고 조직 위원회를 정비하여 벌인 사업들 가운데에서 현재까지는 물량적 공세에 의한 외형적 화려함으로 치장된 행사나 구호 그 이상의 의미는 찾아보기 힘들 듯하다. 앞으로 국악을 포함한 전통 예술의 사활이 걸렸다고 해도 좋을 나라 전체의 총체적인 문화 운용의 틀 및 법적, 제도적 개전이 뒷전으로 밀린 채 기존의 작품들을 모아 대형화시킨 공연이나 외형적 행사를 주된 사업으로 정한 사실에서 애초에 이 귀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할 의지가 없었지 않느냐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국악의 토착화와 발전을 위한 선결 조건의 해결이 국악의 해로 정한 뜻의 전부는 아니라 해도 이러한 절대 절명의 조건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관통해야 했으며,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후대에 길이 남을 위대한 창작물을 얻는데 막대한 국고를 바치는 것이 보다 온당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문화 행사는 연례적으로 치러지는 통상적인 것과 특별히 기획된 예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불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올 한해 도내에서 치러졌던 각종 행사와 공연은 어떤 날에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선택에 고심하게 할 만큼 양적으로 풍성함을 유지하였고, 국악의 해를 맞아 어느 해보다도 각별한 관심과 성원을 보인 도민들에게 값할 만큼 유의미한 질적 성장도 이루어 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악의 해라고 해서 중앙을 제외한 지방에 특별한 지원이나 배려가 없었음에도 다른 해보다도 더 많은 노력과 수고로 수많은 공립기관과 문화 단체 그리고 개인 학원 등지에서 있었던 각종 강습과 교육 활동도 예년에 비해 더욱 활기를 띠었고, 세계 속에서 당당히 평가를 받은 공연물이 있었는가 하면, 전통 예술에 대한 보다 활성화된 도민 의식의 확산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끌었던 것은 역시 93년 처음 공연된 이후 더욱 완숙하게 다듬어져 서울을 비롯한 국내 순회공연과 일본 히로시마에서 있었던 제12회 아시안게임 경축 문화행사로 올려져 재일 동포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일본 속에 우리의 전통 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상적으로 심어 준 도립 국악원의 창무극 <춘향전>을 들 수 있겠다. 그동안에 있었던 여타의 춘향전과는 달리 국악 발상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충분히 수용하고 확산시켜 표현했던 연출 기법과 특히 무대 위의 동선과 정지선, 색채 미학과 극적 요소의 배합이 이루는 앙상블에 대한 냉정한 계산, 그리고 여기에 도립 국악원만이 자랑할 수 있는 전문 무용단의 가세와 대형 관현악단의 음악적 메시지가 무게를 더해 총체적 조화를 이룬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다만 주요 배역들이 극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무게 중심을 홀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한 장면들이 적잖이 노출되었던 것은 전문공연단으로써 앞으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작은 무대였지만 그 성과가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는 3월 5일에 공연된 성금련 가락 보존회의 <가야금 소리의 밤>에서 있었던 산조합주를 꼽을 수 있겠다. 여기에서는 원래 단선율로 이루어진 산조가 지닌 본연의 미덕을 잃지 않으면서도 산조 음계 안에서 협화를 이루는 복선율의 진행을 무리 없이 찾아가는 즐거움이 넘쳤고, 다양한 대위 선율의 충동적인 교직을 통해 산조가 합주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산조 정신이 약동하는 가운데 합주로서의 새로운 지평과 가능성을 이렇듯 충실히 모색하고 있음은 이들이 산조 전통의 중요 어법을 제대로 육화 시킨 결과이며 동시에 끊임없는 동태적 유산으로 전승될 발전적 계승의 원리까지 그만큼 터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할 것이다. 그 외에 앞으로 우리 도의 국악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전주예술고등학교」의 개교를 들 수 있겠다. 그 동안의 오랜 곡절을 마치고 드디어 95학년도 개교를 앞두고 있는데 이미 국악, 미술, 무용, 음악, 연극 영화과 등 총 5개 과 230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이는 전라북도가 명실상부한 예향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육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자못 큰 의미를 지니는데 국악계에서 가지고 있던 오랜 숙원 사업 중에 하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창작 분야는 작품수가 많아진 것 외에는 여전히 예년과 같이 미흡함을 나타내었는데, 창작을 위한 다각도의 시도와 노력만큼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듯 보인다. 새로운 창작물의 결과에 대해 이 시대가 평가의 절대 기준을 마련할 수는 없다. 또한 연주자의 조건이나 좋은 작품을 쓸만한 여건의 부족도 그러한 평가를 내리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면 최소한 돌변적이나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작품이 있을 법도 한데 독창성과 생명의 지속성을 지닌 그러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총체적으로 올해 도내에서 우리의 전통 예술을 위한 시대정신의 발현은 이 난국에서도 기대할 만큼 활발하였다. 서서히, 그러나 어쩌면 20세기의 종말과 더불어 전통 예술의 새로운 개화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가속 페달에 응집된 힘이 느껴질 만큼 때때로 짜릿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모두가 더욱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겠다. 지금 방향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모든 게 공염불이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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