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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2 | [문화저널]
백년을 돌아보며 민족정신을 생각한다
원도연·문화저널 편집장 (2004-02-05 10:35:06)
짧게 잡아서 3년여의 시간이 준비되었고, 제대로 잡아보자면 정확히 백년 만에 동학농민혁명이 ‘역사’의 이름으로 새롭게 평가되었다. 최근 들어 역사적 사건에 관한 한 비교였다. 최근 들어 역사적 사건에 관한 한 비교적 유난한 의미를 갖는 이른바 이벤트가 성행했는데 얼마 전에는 임진란 4백주년이 지나갔고 올해는 서울정도 6백년으로부터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그리고 가까이는 12·12사태(12·12에 대한 이처럼 어정쩡한 명칭은 이제 바로 잡아져야 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방식대로 부르자면 적어도 ‘전두환 반란사건’정도는 되어야 한다.)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고, 예전엔 한낱 유원지와 소풍지에 지나지 않았던 고궁과 절과 박물관과 유적지가 제법 진지해진 발걸음으로 북적거리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념하거나 또는 새롭게 시빗거리를 만들어보는 일들의 궁극적인 주제는 당연히 ‘민족정신’의 문제로 귀착된다. 80년 5월 광주의 해법을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지점에 흐트러진 민족정신을 바로잡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대의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는 사업 자체의 최종적인 귀착은 바로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복권과 민족사적 자리매김이 되는 것이 그저 하나의 향토축제가 될 수 없고, 또한 전북지역의 지난한 발전콤플렉스의 발로로 폄하될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백주년 기념사업의 첫 번째 물음은 바로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 대답을 통해서 동학농민혁명의 민족사적 정당성은 바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민족사적 의미를 묻고 역사적 사실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가는 학계 중심의 다양한 시도가 무엇보다도 돋보였다. 한국 근대사를 전공한 전국의 연구자들이 적어도 한차례 이상은 연구발표나 토론의 장에 나섰고 그만큼 집중적인 성과가 제출되고 사료가 발굴되었다. 지난해 5월 전주에서 열린 백주년기념학술대회가 그 시작을 알렸고 올해는 공주(충청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서울(동학혁명의 현대적 조명과 평가,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 정읍(동학혁명 백주년 기념학술대회), 전주(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사회변동) 등지에서 다양한 주제의 학술대회 및 심포지움이 잇달았다. 질량 면에서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던 학계중심의 학술행사와 함께 각 언론사의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국내 주요 일간지들이 모두 특집으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했고 그 주제도 신문의 수만큼이나 다양하여 대중적 관심을 넓히는데 일조했다. 특히 지방일간지로서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거의 2년여 동안 전문적인 답사와 연구과정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을 종합적으로 조명해낸 전북일보의 기획특집은 94년 한국기자상이라는 빛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와 함께 백주년이라는 집중적인 관심 속에 그동안 묻혀있던 가치 높은 사료의 발굴도 계속되어 동학농민군의 판결문 기록이나 해월문집, 김낙철 형제의 수기, 석남역사 등이 활발하게 발굴되어 일반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전문서적의 출간도 러시를 이루었다.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이 완간되었으며,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펴낸 시선집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가 꾸준한 관심을 얻었으며, 이 밖에 십수권의 전문 학술서적과 답사안내서도 풍성하게 쏟아졌다. 그러나 이 같은 학문적 또는 저널리즘적인 관심들이 한편으로는 완전하게 공식화되지 못하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대중적 포용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그 성과들이 한국 국사교육의 방향에 대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한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학계나 언론계의 상업성을 배제한 진지한 노력에는 그 최소한의 목표를 근대사교육 바로잡기의 방향과 맞물리는 전략적 노력이 뒤따라야 했었다. 이러한 아쉬움 가운데서도 학계나 언론계를 중심으로 한 기념사업이 전문성에 기반을 둔 진지한 질적성과를 거두어냈다면 문화예술분야는 풍성한 화제를 만들어내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대중적으로 인식시키는데 공헌했다. 먼저 미술에서는 4월에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주제로 대규모 미술제전이 열려 민족민중미술의 결집된 역량을 선보였고, 음악에서는 가극단 금강이 준비한 가극 『금강』과 서울예술단의 뮤지컬 『징개맹개 너른들』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양식으로 한껏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냈다. 특히 제야음악을 대표한 가극 금강과 제도권적 서울예술단은 서로 다른 태생적 배경과 사뭇 다른 준비과정을 거치면서도 동일한 주제를 다뤄내 한편으로는 동학농민혁명이 문화적 주제에서만큼은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을 벗어났다고 하는 시대적 변화를 실감케 했다. 또한 연극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5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최한 『백주년 기념 연극한마당』에는 전국의 민족극 단체들이 망라되어 6월까지 매주 각 지역의 연극단체들이 무대에 서서 관객들에게 갑오년의 의미를 보다 긴밀하게 전달했다. 그밖에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각기 지닌 고유한 무대언어를 통해서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으며, TV나 영화를 통한 재조명작업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TV에서는 드라마와 다큐드라마 형식의 재현작업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고, 영화에서도 이미 몇 해 전 개봉된 『개벽』이 빈번하게 화제에 올랐다. 다양하게 펼쳐진 백주년 기념사업 가운데 역시 절정을 이루었던 것은 기념행사였다. 전국각지에서 열린 기념행사의 중추는 전국 9개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관련단체가 모여 결성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협의회』가 되었다. 2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고부봉기를 기념하여 정읍 일원에서 민예총과 전주 기념사업회 그리고 정읍의 계승사업의 공동주관으로 열린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의 성황은 백주년 기념사업의 순조로운 출발을 예고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인 고부와 정읍 일대에서 열린 이 행사는 그동안 재야권역에 머물러 있던 민예총 산하의 문화예술역량이 역사적인 주제와 매개하여 비교적 높은 수준의 대중적인 프로그램으로 선보였다는 점과, 정부(문화체육부)와 정읍지역의 각급 정부기관들이 행사에 후원을 자처하고 나섬으로서 부분적이나마 백년만에 관민의 화합이 성사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주었다. 역사맞이굿에 이어서 무장포고를 기념하면서 고창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포고재현대회」가 시민걷기대회와 함께 치러져 뒤를 이었다. 이어서 4월말에는 전주에서 백산기포를 기념하면서 「동학농민혁명 기념대회」가 열려 백주년 사업의 절정을 이루었다. 전주의 기념사업회가 총력을 기울였던 기념대회는 그러나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렸고, 94년 한해 전북지역에서 가장 아쉬웠던 행사의 하나로 꼽혔다. 전야제와 본 대회를 통해서 서울지역의 유명연예인들과 전북의 문화역량이 나름대로 결집해서 선을 보였던 기념대회는 무엇보다도 동학농민혁명을 한국근대사에 완전하게 복권시킨다는 중요한 의미를 담았지만 행사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함량에 미달했고 근본적으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 바로 서지 못했다는 인식의 한계만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특히 기념대회는 백주년이 지난 후 기념사업의 향후 진로에 대한 장기전망을 흐리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아쉬움 속에 백주년 기념대회가 마쳐지고 이어서 5월 31일에는 전주입성을 기념하는 「전주입성기념대회」가 역시 전주에서 열렸고 10월 29일과 30일에는 동단협의 마지막 사업인 「우금치 순국영령 추모예술제」가 공주일원에서 열려 기념사업의 대미를 장식했다. 백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에 대한 현상적인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다. 어느 시절에 지나간 반역의 역사가 이처럼 후한 대접을 받으며 사람들의 관심 속에 들어섰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동안 기념사업에 헌신해온 일꾼들의 노고는 충분히 위로받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하게 벌어진 올 한해의 기념사업을 보다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까닭은 동학농민혁명이 백주년이라는 시의성을 넘어 한국근대사에 꿋꿋하게 서야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의미에서 다시 ‘민족정신’의 문제에 되돌아 가보자. 첫째는 역사적 복권과 민족정신의 부활이라는 과제에 걸맞는 치밀한 전략이 부재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어느 학술대회가 끝나고 열린 리셉션장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기관장들이 전봉준 장군 만세를 외치고 동학농민군 만세를 외칠 정도로 모두가 흥분했던 백주년이었지만 그 관민화합의 의미가 보다 구체화되지 못한 채 역사를 매개로한 이벤트 차원에서 머물렀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작으나마 올해의 성과가 바탕되어 역사교과서에 대한 개정작업을 비롯한 역사교육의 변화와 유적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끌어낼 진지한 작업은 관민이 함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앞으로의 과제다. 사업주체들의 기획력 부족과 풍요속의 빈곤을 구가했던 각 문화장르의 작업도 보다 내실 있는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후손들은 억지로 잊었으며 역사는 외면했던 비극적인 사건을 오늘날에 와서 고유한 무대언어로 표현한다는 작업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보다 진지하고 특성화된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은 거듭 지적되어야 한다. 문화야말로 백년이라는 역사적 시차를 가장 효과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력한 장점을 가진 거의 유일한 매체라는 점에서 그들의 성과보다는 과제에 더욱 기대해 보는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백주년은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사업의 끝이 아니라 매듭을 풀어나가는 첫 시작이라는 점이다. 올 한해의 동학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기념했던 사람들과 그 사업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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