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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 | [문화저널]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 다그치듯 불어오는 그 날의 바람 고 이세종 열사를 기억하며
글 김성숙 시민행동 21 소식지 편집위원장 (전북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근영여중·고에서(2003-03-02 20:22:29)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근처에는 검은색 비석으로 큰 나무에 가려진 작은 추모비가 하나 서 있습니다. 추모비의 주인은 80년도 우리 세대에 불었던 민주화의 바람이 시작되려는 시점에 계엄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그 남학생의 죽음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시절의 바람을 함께 느끼고 싶습니다. 온 세상 문제가 합격이란 말 하나에 다 끝나 버릴 듯한 수험생 시절을 마감하고 어렵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도 경험했듯이 대학이란 곳이 어디가 빈곳인지 어디가 채워진 곳인지 구분이 안된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다 보니 한 학기가 지나가고 가을이 왔습니다. 나뭇잎이 물들어 가는 교정이 마음에 딱 들어 학교 가는 일이 조금씩 즐거워질 무렵 우리사회엔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전해졌습니다. 어떤 써클에도 가입하지 않고 오직 정기 간행물실에서 지나간 잡지와 참고열람실에 곱게 간직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사전에 마음을 다 주고 지내온 나에게 총으로 대통령이 죽었단 말은 충격이었고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대학은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고 길고 긴 겨울방학으로 들어갔습니다. 80년을 기다리는 겨울이었습니다. 그 뒤 3월을 맞이한 80년 봄은 여기저기 붙여진 대자보를 읽는 시절이었고 하얀 종이 위에 적힌 수많은 사건과 생각들은 전부다 처음 접해보는 것들이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움츠림에 대한 반작용처럼 재미있었고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어수선하게 봄날이 지나가면서 우린 총학생회장을 우리 손으로 뽑았습니다. 모두들 정치의 봄이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5월의 문턱에 다다랐고 자연스럽게 농성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은 함께 모여있기 좋은 계절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남도 주유소와 도청으로 도망다니며 최루탄 가스에 지친 몸을 끌고 무사히 학교 안으로 들어와서는 풀밭에 모여 정치인들의 행보와 앞으로의 일들을 논의하기에 바빴습니다. 나는 이들의 식사문제에 관심이 갔고 학생회관 부엌에 가보니 돌아서 나올 수 없을 만큼 많은 할 일이 쌓여 있었습니다. 내 소박한 참여가 그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5월 17일 밤 저녁을 먹고 난 뒤 다음날 쓸 데모가를 녹음한다면서 몇 명만 녹음실에 가자는 말을 듣고 따라갔습니다. 10명 가까운 학생들이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하자는 노래를 부르는데 한 학생이 우리더러 씩씩하게만 부르지 말고 화음을 한번 넣어보자고 말하였습니다. 우린 이부합창으로 불러도 보고 악보에 충실하게 부르려고 노력을 해서 녹음을 마쳤습니다. 5월 17일 밤 과 18일 새벽에 전북대 학생회관에는 27명의 학생이 잠을 자거나 이야길 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다음날 데모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밤 12시가 지나가고 있을 무렵 저는 여학생 회장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급하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열고 보니 녹음실에서 함께 녹음했던 그 남학생이었습니다. 녹음을 끝내고 이제 여학생 회장실로 자러간다는 말을 듣고 온 것입니다. 그 학생은 놀란 얼굴로 어서 피하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군인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학교 뒷편으로 해서 나가란 말을 하고는 복도로 사라졌습니다. 얼굴 색이 변해버릴 만큼 지금 우리들의 간단한 대화가 주는 두려움이 내 몸속으로 펴져 나갔습니다. 도무지 학교 뒷편으로 도망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미 군인들로 둘러싸여 곧 우리 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긴장감을 안고 2층 농성장으로 갔습니다. 무겁게 입을 닫고 서로를 지켜보는 학생들.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이란 두려운 침묵이 우리들 사이엔 흘렀습니다. 한 학생이 그 침묵이 너무 무거워서인지 괜찮다고 우리 소주나 사서 마시자고 주머니에 있는 돈들 다 내노라고 말하자 몇 명이서 돈을 건네주는 장면도 떠오릅니다. 그 학생이 나가고 일 이분 뒤 우린 규칙적이고 일사분란한 군인들의 군화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리고 학생들의 숫자보다 많은 군인들이 지르는 소리에 휩싸이게 됩니다. 의자 뒤에서 자다가 일어나는 남학생을 몸둥이로 후려치는 장면을 소리가 사라진 비디오 화면처럼 보았습니다.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가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위로 올린 채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군인들의 무장한 모습과 학생들의 초라하고 후줄근한 모습은 서로 힘겨루기에선 도무지 맞설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나에게 어서 피하라고 말해준 그 남학생은 복도에 있다가 군인들의 군화소리에 놀라 옥상으로 올라가던 중 7-8명의 군인들에 휩싸여 옥상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다시 학생회관 옆에 있었던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긴 채양을 거쳐 땅을 떨어집니다. 그렇게 남학생은 죽었지만 아무도 그 밤에는 그의 죽음을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작전 중 누군가 한 명이 죽었다는 계엄군인들의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학생이 나에게 어서 피하란 말을 전해준 남학생인줄은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알게됩니다. 그것도 군인들의 집단 폭행으로 사망한 것을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데는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의 시작인지도 모르는 채 경찰서와 헌병대 감방에서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저희들 27명은 몇 명을 제외하곤 사소하게 처리되어 20여 일을 보낸 뒤 보안대를 거쳐 풀려나 그 뒤로 한번도 모임을 갖지 않고 세월속에 흩어지게 됩니다. 봄이 온줄 알았지만 사실은 긴 겨울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당시 학생회관 옥상에서 죽음을 당한 이세종이는 5.18 최초 희생자란 이름을 달지 못하고 잊혀져갔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아무도 묻지 않는 내 이야기는 삼킬 수도 뱉어 낼 수도 없는 기억으로 내 입안에서만 우물거렸습니다. 그러나 광주의 소용돌이가 이 사회에 던지는 질문을 정치권은 결국 피해가지 못하고 80년 5월에 대해 조금씩 다른 해석을 해야했습니다. 그러면서 85년에 전북대 학생들은 복적생들이 주도가 되어 사망한 이세종학생의 추모비를 세우려고 했고 학교측에서는 세우면 안된다고 막는 서로 밀어붙이는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추모비가 어렵게 세워지게 됩니다. 학교측은 그때까지도 이세종의 죽음을 해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에 흩어졌던 학생들이 20년이 지나 2000년도에 처음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 뒤부터 시작된 이세종열사 추모비를 조금 단장해보자는 우리의 의견이 전북대학교 측에 전달됐지만 진행이 안되었는데 이번 해에는 뭔가 좋은 예감을 갖게 합니다. 지금 있는 비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성이 들어간 기단을 쌓고 마음을 나타내는 조경으로 주변을 가꾼 작은 화단이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근처에 생긴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이세종이의 죽음은 우리에겐 80년대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질긴 끈이었습니다. 그 끈을 놓지 못하고 우린 아직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불었던 바람이 이렇게 지금도 내 주변에서 서성거립니다. 2003년 5.17일 밤에는 아름다운 이세종 추모비를 보기 위해 더 많은 분들이 오실 것입니다. 22년전 그 밤엔 소리도 없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렵게 죽어가야 했던 그 남학생은 세월을 이기고 함께 했던 친구들과 전북대학교측과 전주시민들의 마음을 모아 햇살이 비치는 곳으로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80년도에 불었던 봄바람을 느끼는 분들은 그날 오셔서 함께 그 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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