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2 | [문화저널]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사는 가치
이숙희 우석대 도서관 사서
(2004-02-05 10:30:46)
한 진보적 단체가 마련한 중진 여성작가와 만남에서 젊은 여자가 수줍게 일어나며 물었다. 어떻게 해 주는 것이 작가에게 가장 좋은 내조인지를, 그녀는 갓 등단한 새내기 작가의 아내인가 보았다. 그때 그 작가가 무어라고 말했었는지 기억은 없다. 대충 횡설수설했지 않았나 싶을 뿐, 그러나 그 순간 내가 흠-하며 약간 웃었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물음은-그러니까 좋은 작가의 아내란 내가 자의식에 싹튼 뒤로 전 성장과정을 통해 잠재하던 꿈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지금의 나는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 하나를 당차게 품고 산다. 그래서 그때 나는 어휴-저 새댁 당분간 고전하겠군 그렇게 생각했던 터이다. 내가 보기에 그 새댁은 제 발등의 불이 더 급했으므로.
똑같은 이유로 나는 내 남편의 꿈에 무심하다. 더구나 나는 현실에 있어온 내조나 외조를 믿지도 않는다. 성공적인 삶의 가능성은 항상 자신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찌 보면 같은 운명이라고 할 만큼. 그러나 가족은 공동체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가족 구성원 모두의 만족감이 중요하고,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으려면 모든 가족이 자유롭게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모양처라는 지고의 이상형을 추구할 때 가족은 이미 편안한 공동체가 아니며 그것은 갈등을 잠재우고 은폐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다. 가족은 누구나 꿈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 꿈은 가족과 함께 건강하게 자라나지만, 일방적이고 이기적이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가정과 사회와 함께 병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내조, 외조란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된다. 자기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가족구성원 모두의 삶이 건강해지는 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오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시부모와 같이 사는 것은 고사하고 내 자식과 같이 사는 게 힘이 든다고. 높아지는 이혼율을 보면 부부가 같이 사는 것도 힘이 드는 게 요즘의 현실인 모양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 어머니와 사별했다. 그 체험은 가족이라는 모래성이 무너진 뒤의 진실을 보게 했고 늦은 결혼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곤 두 딸을 낳았다. 이런 나의 상황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연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가부장적인 유교사회 질서와 윤리로 되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한 인생의 출구는 공동체적 삶에 있다고 확신한다. 많은 좋은 여성들이 홀로 살고 있고 결혼에 대한 압박과 편견으로 불편해 하고 있다. 흔히 결혼의 장점으로 사회, 정서적 안정감과 자녀가 주는 충만감을 들며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어찌 공짜가 있으리요. 남, 녀 공히 그런 대가를 지불하느라 얼마나 많은 인내와 헌신을 기울이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이들이 결혼하기를 바란다. 누구랑 같이 살기엔 남자, 여자가 같이 사는 게 가장 쉽고 그럼으로 인하여 생기는 여러 관계들이야말로 공동체적 삶을 살아 갈 가장 친밀하고 가능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그로 인해 생기는 여러 정서적 편향과 엄청난 노동력을 여성에게 지우고 비난하는 비겁함이며, 그렇게 모여 살 수 있도록 삶의 내용을 통일시켜 가는 것이지 그런 삶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더라도 가능한 형태의 공동체적 삶에 적극 관여해야 건강한 독신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기도 하다.
오합일이라는 지난 어느 날, 각종 결혼관련 업종들이 특수를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터에서도 한 신데렐라가 왕자님을 만나 거침없이 사표를 던지고 꿈의 세계로 날아갔다.
5년 전, 우리는 아주 검소한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을 치르기까지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 나는 왜 결혼식이 그렇게 형식적일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기도 했다. 결혼이 요구하는 변화는 그만큼 불안하고 불확실해서 그렇게 자꾸자꾸 치장함으로서 위로를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다시 결혼한다해도 그때 이상의 치장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듯 거침없이 결혼과 동시에 사표를 던지는 여성의 직업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직업은 우리에게 생계에 필요한 돈과 소속감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직업에서 남편으로, 남편에서 자식으로 바뀌기도 한다. 더구나 요즘처럼 취직하기 힘들어지면 사람들은 더러 여자들이 집에서 애나 키우지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흔 넘은 사람들은 유능한(?) 젊은이에게 자리를 넘기고 집에 가서 빨래나 하지 하면 기분이 어떨까? 어쨌거나 이렇게 실업률이 높아지고 그 실업률에 대졸여성 수는 포함되지도 않는 실정이라면 여성들이 직업을 갖는다는 건 하늘에 별따기가 된다. 그럴 때 비공개로 채워지는 자리는 어떤 여성들이 차지하게 될까? 우리나라처럼 학연으로 좌지우지되는 사회라면 그것은 뻔하다. 줄 있고 돈 있는 아버지를 돈, 이왕이면 반반한 여성이 더 좋다 하겠지, 이런 여성들은 하는 일이나 월급에 별 신경을 안 쓴다. 어차피 결혼할 때까지 견디거나 중매쟁이에게 내놀 이력하나 덧붙이는 셈이니까. 그녀들은 우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그래서 그 월급으로는 택도 없는 소비를 하고 세피아 정도는 몰아가며, 우아하고 품위 있게 문화생활을 즐길 것이다. 그 월급으로 처자식 먹여 살리고 저축해 집도 사야하는 남자동료들의 씀씀이를 쫀쫀하다 비웃어가며... 그런데 그런 여유는 직장에서 어떨까? 힘들고 어려운 일, 또는 장기적 전망을 요하는 일을 그들의 상사는 누구에게 맡길까? 좀 모자라더라도 남자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여자들은 하나도 쓸데가 없다고, 그리고 그런 선배들 덕분에 똑똑한 후배들은 배치와 승진에서 한없이 불이익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여자 탓인가? 그들은 그런 꽃을 원했던 것이고, 그 결과는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보다 좀 처지는(?) 여성들은 어떨까? 정 뭐하면 사표 좍 던지고 나가버리지 뭐. 남편이 설마 못 먹여 살리겠어? 이렇든 든든한 후원자가 있으니, 동료나 상사와의 갈등과 경쟁에서 적극적이지 못하다. 결혼해서 나가라면 치사해서 나가고, 애났으니 나가라면 더러워서 나가고, 이래 나가고, 저래 처지는 그놈의 알량한 여유라는 게 맨날 이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이렇게 무장을 한다. 나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갸륵한 일꾼이다. 또한 내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우유 값을 내야하고 집도 사야하고 노후설계도 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은 자아를 실현하는 꿈의 세계도 아니다. 경제적인 독립은 삶을 영위하는 필요조건이지만 공동체적 삶의 내용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나 허무하다. 허무해도 인생은 죽기 전까지 계속된다. 자신의 직업에 불만이 없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불만이 있을 땐 새로운 자아실현을 위하여 가차 없이 사표를 던져야 할까? 이렇게 실업률이 높은 현실 속에서? 더구나 여자가, 더더구나 애엄마가? 그러나 우리는 머지않은 장래에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느라 한발작도 뒤로 물러설 여우가 없이 악착같이 살아온, 그리하여 남자동료들에게 예의를 지킨 이 땅의 건강한 여성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줄 후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