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2 | [문화저널]
겨울 숲에서
박남준 시인(2004-02-05 10:25:49)
문득 떠오른다. 지난 일 년의 시간들이 때로 아주 천천히 천지의 기운이 변하여 풀잎에 이슬을 피워놓듯 혹은 너무나도 빠르게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내게 오고 떠나가며 들떠서 일렁거리게 하고 암담으로 빠트려 잠기게 했다.
봄은 서러웠으며 여름은 잔인했고 가을은 쓸쓸했지. 그리하여 이제 겨울 숲을 걸어가며 생각한다. 작은 꽃 하나 그 꽃이 진자리, 붉고 푸르던 것들이 떨어져 갈잎의 낙엽을 융단처럼 이뤄놓은 겨울 숲을 가면 이 숲이 살아온 오랜 잠언의 소리가 들려오며 나를 깊이 잠기게 한다.
이제 곧 추위가 시작되고 긴 겨울이 오리라 단풍의 숲은 어느덧 가고 사랑을 위해 온통 내달려갔던 지난 일들을 더러는 쓸쓸한 술잔이 되어 쓰러져 갔다 더러는 나락으로 자폐 되었으며 역류하며 일그러져갔다.
그리하여 춥고도 어둡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햇빛의 문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뜨겁게 타오르던 나무들은 땅속깊이 슬픔의 뿌리를 더욱 내렸는지 살아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작인데 상처는 뒤틀린 채 몽유의 길로 헤매이고 겨울 숲에 누워 나는 술에 빠져있다 바람의 숲이여 마지막 불꽃이여 설레이는 술잔 기울이며 단풍으로 붉겠다던 시절이 옛날이었는지.
사는 것이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갓 미망에 지나지 않는 이 삶의 어디를 나는 이처럼 목매어 하는 것인지. 얼마 전에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그랬다. 이 땅에는 왜 자살한 시인이 하나도 없느냐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 자살이라는 단어가 빛나는 유혹으로 부르르 떨게 했다.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때 자살을 꿈꿔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만
참으로 오랫동안 뒤돌아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에도 자신을 뒤돌아 살펴보며 세 번을 반성했다는 옛 성현들의 삶을 생각하면 까마득히 부끄러워져서 식은땀이 날 것 같다.
요즈음 들어 거울을 보는 버릇이 가끔 생겼는데 나이 사십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굴에 드러난다는 뜻이겠지.
찌들고 추하게 변해 가는 느낌이야. 연말이라고 술자리도 많겠지. 세상이 병들게 하고 술 마시게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아수라와도 같은 올 한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지. 절망이라는 말의 이면 한 끝에 희망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덧없고 막막한 우리들 삶의 이면에도 아름다운 것들, 이 겨울 추위를 따뜻하게 감싸줄 훈훈한 사랑의 일들도 혹여 있을지. 건강하기, 좌절하지 않기. 술독에 빠지지 않기.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