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 | [안영이노의 문화비평]
폭력과 경쟁사회에 대한 단상
안이영노(2003-03-02 20:13:10)
대학 2학년생, 전방에 입소하다. 1985년, 한겨울 같은 사월 초. 어색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총까지 맨 채 행군길 나섰다. 칙칙한 녹색 옷 입고 산등성이 따라 일렬로 걸어가는 우리를 누가 함께 대학 다니는 친구라 보겠는가. 가장 친한 과 친구들이 내 앞뒤로 걷고 있다. 그때다.
앞에 가던 현성이 철모가 떨어지면서, 데굴데굴 굴러 저 아래 움푹 파인 골짜기로 내려가버렸다. 쩔그렁거리며 돌과 흙에 부딪히는 철모 소리가 산등성이 사이로 작은 메아리 쳤다. 아직도 그 소리를 잊을 수 없다. 학생들은 물론 행군을 지휘하던 '군발이' 형님들까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섰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그 애는 자신의 총을 맨 채 묵묵히 골짜기까지 내려가 철모를 찾아왔다. 자그마한 체구가 더 작게 느껴졌다. 5분됨직한 그 시간이 나에게는 5시간처럼 느껴졌다. 친구들 모두 그랬으리. 행군으로 지친 몸, 꽁꽁 언 손발, 빙판처럼 미끄러운 골짜기. 아무도 현성이를 도울 엄두를 못 냈다. 우리를 누가 캠퍼스의 친구들로 보겠는가. 하지만 난 옹색하게라도 항변하고 싶다. 우리를 냉정한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 살벌한 추위와 척박한 군부대 환경이었다고.
저기까지 뛰어, 선착순 3명. 아핫, 동작 봐라. 꼴지들 대가리 박아. 다시 연방장 두 바퀴. 선착순 3명. 동작, 동작 봐라.
1984년, 초봄. 대학 1학년생들은 학생들을 위한 군영인 문무대에서 훈련받고 있었다. 대학 신입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수험생 시절 못 했던 풍성한 교양이라든지 연애에 보내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군대놀이다. 누구는 소꿉놀이처럼 즐기는 눈치, 다른 녀석은 스트레스 날리면서 자학하는 시간이다. 한 놈은 집 근처 예비군 훈련장이 재미있어 보였단다. 하지만 나에겐 끔찍한 거다. 전쟁놀이는 어린 시절 충분히 했고, 이젠 총칼이 혐오스럽다. 선착순에 들려고 혼비백산한 나의 모습을 여자친구가 본다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지성인이 무기력하게 군인명령에 기어다닌다는 게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느낌이었다. 너무 민감한가. 너무 심각한 것인가. 그저 나의 허영심인가. 하지만 나에게는...
평소 점잖은 양반이던 남규가 혼쭐나 옆에서 뛴다. 내 몰골은 또 얼마나 초라할까. 우리는 함께 대학 다니는 친구가 아니라 강요된 군인이었다. 누가 군인을 동지요 전우라 했는가. 동네형일 수도 있는 그 군인 아저씨가 선착순을 호령하고 얼차려를 협박한다. 본능적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썹 휘날리며 친구를 제치는 경쟁사회의 적군들.
훈련은 자기와의 싸움이 아니다. 군사훈련은 적과의 전쟁도 아니다. 동지가 적이 되는 시뮬레이션! 아군 살기 위해 적군에게 총부리를 겨눈다는 원리는, 내가 죽을 수도 있다면 옆사람을 향해서도 총부리를. 무한 경쟁사회는 종국에 그걸 합리적이라 가르치게 된다. 자신을 희생하는 감동적인 전우애도 있지만 밀림에서 동료를 쏴버리는 <플래툰>도 있다. 그 폭력이 선천적으로 우리 맘에 도사리는 것일까? 부인하고 싶다.
1980년대는 대학신입생 문무대 보내고, 2학년생은 전방에 입소시키는 우스꽝스러운 비극이 있었다. 3박4일 병영과 1주일간 전방철책선은 호국정신도 기르고 국가안보도 생각게 한다는 것. 하지만 남북분단이 낳은 기형적인 정치교육 제도일 뿐. 캠퍼스의 넉넉한 마음이 집단이주하여, 다함께 살벌해져 귀향한다. 우크라이나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의 애환 같을까만, 버스 대절해서 단체로 캠퍼스 떠날 때 심정은 그야말로 군대 '개처럼 끌려가는' 기분. 사람을 기르고 살리는 게 교육이건만, 교련 시간도 모자라 창창한 영계들에게 웬 군인정신.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같은 나이의 전투경찰에게 화염병 던지고 최루탄 피해 달아난 바로 다음주,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관습적으로 군영에서 이렬 횡대한다. 군사정권의 만행과 민중의 모순을 토론한 다음날, 병영에서 늘 그래왔다는 듯 군가 부르며 고교시절 못습으로 구보 한다. 정치권력, 사회폭력을 비판하는 젊은 것들은 무력을 앞세운 일상 앞에서 무력했다. 마지못해 들어간 병영에서 아이들은 학생운동과 기업입사 후에 쓸 경쟁심과 폭력을 습득하고 나왔다.
기합이나 구타나 선착순 같은 '비교육적' 군영폭력을 체험한 젊은 것들은 군사 정권의 부당함에 대해 더욱더 강한 신념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군대의 진수를 습득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중고교 시절 그런 대접 받은 것처럼, 대학과 사회에서도 이 방식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선후배 사이가 다 그러하니, 동아리나 신입생환영회나 동문회 술파티는 왕들의 힘 잔치.
군사조직의 동원술 배운 그대로 적용하는 학생운동 노하우가 하도 뛰어나, 당시 '당나라 군대' 같던 예비군 훈련장이나 '송나라 방위' 같은 민방위본부에서 모범 삼았다는 속설도 있다. 아비에 맞은 대로 세상 대한다?! 타고 난 놈 어딨으리, 당한 대로 갚고 배운 대로 살아남는다. 폭력에 개기는 방법이 소름끼칠 정도로 폭력적일 때 있다.
이상하다, 예비군 복만 입으면 넥타이맨 단정한 사람도 다 '양아치'가 된다. 신발 꺾어 신고 모자 삐딱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 옆구리에 신문지 끼고 짝다리 서거나 팔자 걸음 기본이다. 옷이 사람 바꾼다. 처한 상황이 나를 바꾼다. 선비는 남루한 옷에도 정신이 빛난다지만, 남루한 옷이 초라한 거지 만드는 게 도시군중 모습. 떼거리가 사람 바꾼다. 속한 집단이 나를 바꾼다. 모두가 한 길 가는 바를 알면 눈치 보게 된다. 불과 하루 전 이 나라의 지식인이자 자상한 스승이던 대학강사가 예비군훈련만 가면 말투 바뀌고 방위병 함부로 대하고, 유니폼 입은 해병대 전우 위해서라면 민간인도 팰 기세로 되돌아온다.
유니폼은 무서운 게다. 거기에는 폭력의 그림자가 있으니 바로 '집단의 힘'. 유니폼은 그 자체로 절대폭력이 아니다. 하지만 엄마가 교복 입기를 강요하는 순간, 제대로 입지 않고 등교했다고 교무실로 끌려가는 순간, 그건 압력이 된다. 교무실 고문은 아무것 아니다. 안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과 영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 해 보라.
유니폼의 폭력은, 그리 입지 않은 것이 유해한 폭력이 되게 만든다. 애써 저항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반항아 세력으로 보이게 된다. 굳이 찢어진 청바지나 탱크 톱을 거치고 등교하지 않고, 얌전한 아이비리그 풍 니트에 넉넉한 카키 바지를 입고 나타나더라도, 교무실로 질질 끌려가는 아이의 모습은 이미 교복 입은 전체를 농락한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힌 것. 개인적으로 유감 없다. 하지만, 넌 우리에게 찍힌 거다!
이지메의 광기나 왕따가 그런 거다. 안 그러면 낙오될 것 같으니 집단구타에 일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것만 폭력은 아니다. 폭력은 주관적인 게다. 너 혼자만 먹는 빵에 그의 맘이 서럽고 쓰리다면 그건 그에게 폭력이다. 폭력은 상대적인 게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 문제라지만 돌깡패 같은 정치 많고 돌아이 같은 법규 많다. 비바람도 피할 수 없이 굶어죽는 야만을 폭력이라 했지만, 문명의 혜택도 만만찮다. 우린 공해 속에서 업무 쫒기고, 뜻밖에도 야만의 외딴 섬을 꿈꾸며 산다. 폭력을 하루하루에 깔려 있다.
폭력이 선천적이냐고? 인간의 몸 속에 들어있는 야수 모습을 떠올리지 말라. 유전자 속에 있는 야만성을 이야기하면, 폭력은 부인하려고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는 본능이 되어버린다. 그런 변명은 폭력을 미화하지 않더라도 인정해버린다. 조상 탓 하는 것 아닌가.
차라리 세상 탓 해야 한다. 폭력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상황이 만든다. 깡패 언니에게 맞을 때. 옆 친구 가리키며 팔 수도 있다. 나는 나쁜 놈 되고, '어쩔 수 없었다'거나 '고문에 못 이겨 미안하다, 친구'를 되뇌인다. 죄책감으로 두고두고 자다가도 소스라친다는 '자다벌떡증'에 시달리도록 만들테다.
폭력은 또 자라온 환경에서 길러진다. 동생 때리는 조그만 꼬마, 누구에게 배웠겠나. 이를 잔인한 인간 본성, 우리 속의 원숭이 운운하는 염세관은 그 폭력보다 더 불온하고. 자기 혐오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인간을 불치의 존재로 놓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따뜻한 기대를 저버리기 때문. 인간을 불행하다 보는 비관론은 다른 인간을 포기하기 쉽다. 논리적으로 인간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폭력은 늘 나타나며 거스를 수 없는 외압이기 때문에 두 눈 똑바로 뜨고 찬찬 생각해야 한다.
세상이 폭력의 조건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불황기의 너무 작은 파이 조각이 쌈박질을 부른다. 세대와 색깔을 유니폼으로 편가른다. 우리는 금 모으기 할 정도로 이타적이지만, 슬프게도 자신의 목숨 버리면서 타인 도울 만큼 충분히 여유롭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자비를 논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충분히 선량한 본성 때문에, 박애를 이야기할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