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 | [문화와사람]
고딕 안에서 새 색깔을 찾다
전주 공예품 전시관 백옥선 관장(2003-03-02 20:11:25)
명함 끝이 단정치 못하고 너덜너덜하다. 오래된 것도 아니고 보관상태가 나빠서도 아닌데 눈여겨보니 창백한 실핏줄이 보이는 한지 명함이었다. 호기심에 두 손으로 비틀어 조금 찢어 본다. '어라! 장난이 아니네' 특별히 비닐 같은 것을 넣은 흔적도 없는데 몇 겹의 한지를 대어 만든 명함은 마치 주인의 첫 인상만큼이나 견고했다.
전주 공예품 전시관 백옥선 관장에게 명함을 받은 때는 늦겨울 바람이 심술을 부렸던 지난 2월 초순, 전주시 교동에 자리한 공예품 전시관에서였다. 아담한 체구에 소설 속 B사감이 즐겨 썼을법한 안경 너머로 서늘한 눈매를 감추고 있어 그리 살가운 첫 인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엔틱'한 것들을 전시해 놓은 곳의 관장이라면 왠지 그 사람의 취향도 고전, 생각도 보수, 심지어 나이까지 지긋하신 분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젊은 여성이 전시관의 책임을 맡고 있어 사뭇 놀라움도 있었다. 일견 녹록해 보이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모든 주위 분들이 염려를 하셨죠. 나이가 어려 괜찮을지, 그런데 솔직히 저 자신이 더 불안했어요. 과연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구요. 그래서 생각했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구나. 저요, 지난해 4월 개관하고 한 6개월 정도는 밤 11시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어요."
첫 인상과는 많이 다르다. 우선 세련된 외모와는 달리 전라도 사투리의 전형적인 전주여자였고 또 '짧은 연륜이어서 들을 얘기가 많을까?' 염려했던 부분은 처음 그녀의 만만치 않은 솔직함으로 오히려 풍성한 사람얘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수다를 시작하려고 벼르는데 전시관 한쪽 문이 삐그덕(사실은 지이잉이었다 자동문이었걸랑!) 열리더니 눈에 익은 얼굴이 쑥 들어온다. 전라일보 문화부의 최홍은 기자다. 백 관장과는 친분이 두터운 모양, 외모에 관해 가벼운 치켜주기 수준의 농을 주고 받더니 도내 문화계의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는데 잠시 귀동냥을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젊은 관장이어서 그런지 일간지 기자들과의 거침없는 의견 교환자리가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참! 나중에 알았지만 백 관장과 전라일보와는 상당한 인연이 있는 듯 했다. 前 전라일보 백옥미 기자와 현 사회부 백인철기자가 그녀의 동생들인 이유에서다.
波瀾百丈, 연극쟁이로 시작하다
백옥선 관장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쯤은 못돼도 파란백장쯤은 될 성싶다. 월남한 아버지 백종만 씨는 16년 아래의 박남순씨와 결혼, 전주에 보금자리를 튼다. 하지만 비전향자인 아버지는 취직이 어려워 과수원 관리인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되고 당연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른다. 장녀 옥선의 어릴 적 고생얘기가 당시 유행했던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졌다.
"어렸을때 부모님이 여름이면 냉차 같은 것도 파는 구멍가게를 하셨거든요. 당시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래서 동생 둘은 제가 보살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가게 되는데 어디 대학교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전주여상에 입학했습니다! 전 정말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가난이란 무게를 견디지 못했던 옥선의 낙담은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실력은 있는데 가정형편 때문이라니, 당시 전주여상의 입학 커트라인은 인문계 여고보다 더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진짜 실력 있었던 상고 선배들을 찾다보면 전, 현직 대통령들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상고생들의 실력이 좋았던 예전이었다.
상고 학생들은 3학년부터 기업체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고 3소녀 옥선은 취직을 했고 2년 동안 옹골지게 돈을 모았는데 솔직히 대학교를 가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동기들보다 이년 늦게 친 대학시험에서 원했던 임상병리학과에 떨어지고 실의에 빠진 그녀, 터벅터벅 전주시 동부시장 골목을 걷고 있는데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우연히 소극장의 문패가 눈 속에 크게 들어오더란다. 지하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극단 '황토'였다. 그리고 시작한 연극인생, 당시에 도움을 준 분이 박병도 선생이었고 극단 황토는 1986년 오태석의 작품 <물보라>로 대통령상을 받게 된다. 전국 순회공연에 나서게 된 옥선도 단원으로서 쟁이 역할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던 중에 2년 정도 흘렀을까? 따르릉! 고등학교때 유난히 아껴주셨던 3학년 담임선생님의 전화, "네 지금 뭐하고 있노?" 순간 현실에 눈을 뜬 옥선은 경제적인 현실이 뒷받침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연극과 직장을 병행할 수 있는 곳을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추천 받게 된다. 또 다른 인생살이의 계기가 된 전북 예총과 그렇게 연을 맺었다.
그 후 낮에는 직장생활, 저녁에는 연극쟁이로 열심이었던 그녀는 당시 권오춘씨와 함께 공연한 '카덴자'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페인트를 발라야 하는 배역 때문에 피부에는 반점이나 멍 같은 것이 생겼고 극중에서 고문당하는 연기는 공연이 반복되면서 실제 고문 받는 만큼의 육체적인 고통이 뒤따랐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건강에 이상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또 다른 생활로 전환기를 맞는다. 20대 초반의 처녀 백옥선의 인생도 다름 아니었다.
누에가 되어 뽕잎차를 마시다
인터뷰 시간이 30여분쯤 흘렀을까, 전시관에서 판매하고 있는 뽕잎차를 얻어 마셨는데 3번쯤 우려냈을 때였다. 누에가 아닌 사람인고로 갉아먹지 못하고 우려 마시는 뽕잎차는 나중에 질긴 비단실로 될 것이어서 그런지 몇 번을 우려 마셔도 그 향이나 맛이 여전히 풍부했다. 그런 특성 때문이었을까, 동양차에 대한 초짜들을 감탄시키기에 좋은 차였고 여러 종류의 차 중에서 하필 뽕잎차를 권한 백관장의 저의(?)를 짐작해 내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도 지리산에서 캐낸 백가지 약초가 들어간 백초차(진짜 백 종류 맞을까? 세어봤을까? 의심이 간다) 어린 솔잎으로 만든 송화차, 그리고 산에서 열리는 우리 어렸을 때 속칭 똘배라고 했던 산 배로 만든 돌배차 등 다양한 전통차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눈만 즐거운 곳이 아니라 입도 즐거운 곳이 그곳이다.
5년 늦게 대학교에 입학하다
건강에 자신을 잃게된 옥선은 어쩔 수 없이 잠시 연극을 접고 1989년 또래들보다 5년 늦게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을 한다. 세칭 '입학은 누구나 하지만 졸업은 절대 실력자만 가능한 곳' 방송통신대학교를 1994년에 졸업한 후 바로 지난 달 2003년 2월에는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논문 제목이 심상치 않다. 「공공문화시설의 효율적 추진방안연구」. 관과 민 사이의 민간위탁에 관련된 내용으로 그녀의 풍부한 경험사례를 바탕으로 쓰여진 수작이란 평가다. 지난 81년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상고에 입학해야 했던 그녀는 22년 후 석사 학위자가 되어 있었다. 이론과 실기를 함께 갖춘 예술전문기획인으로 자리하고 싶었던 그녀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전주예총으로 자리를 옮기다.
그녀의 91년 28세에 결혼을 하고 93년 창립된 전주예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도 예총에서 분리된 형태의 시 예총이어서 약간의 불협화음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직장에서 자리를 잡은 백 관장은 전주예총만의 특색있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요즘말로 색깔을 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전주시민들을 위한 문화 아카데미 같은 것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너무 예산도 없고 해서 욕심을 잠시 늦추고 94년에 '문화시민을 위한 예술교실' 을 기획했습니다. 시민에게 직접 다가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죠.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차츰 어필 되면서 그 해 10월 '완산골 축제' 라는 행사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 후 시민들과 함께 하는 행사기획 능력들이 전주시의 인정을 받아 다음 해 95년에는 국비와 시비를 합쳐 2억이란 예산을 받아 '광복 50주년 기념행사' 를 주관하게 된다. 당시 연출자가 현 전주 풍남제 총감독을 맡고 있는 안상철 감독이다.
'한지'를 띄우고 연꽃을 피어내다
한지공예대전을 개최하게 되는 시기도 이즈음이다. 백 관장이 한지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당시에 꽃꽂이와 한지공예로 유명했던 김혜미자씨의 전시회를 둘러보고 나서다. '아! 이거야' 공모전 계획을 짜고 미술계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95년 첫 한지공예대전을 개최한다. 그리고 98년, 문예진흥원 우수기획전에 응모해 2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아 99년부터는 한지공예대전을 함께 아우르는 종이문화축제를 개최한다. 현재 한지를 전주시의 주요한 문화상품으로 꼽는데 백관장의 역할이 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전주예총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면서 시내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사무실을 전주 덕진예술회관 내로 옮기게 됐어요. 정말 행복했죠. 그런데 바로 옆에 덕진공원이 보이잖아요. 아! 그때 호수의 연꽃들이 어찌나 예쁘게 보였는지..."
그 예쁘게 보인 연꽃들 때문에 당시 10월에 열었던 완산골 축제가 연꽃이 피는 7월로 옮겨지게 된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에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성공하고 나면 그때 끄덕이게 된다.
공예품 전시관의 색깔있는 관장으로 오다.
지난 2002년 1월, 10여 년을 몸담았던 전주예총을 떠나 현재의 전시관 관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처음 공예품 전시관의 방향을 잡을 때 암담했어요. 이렇게 전시와 체험 또 판매 기능을 공유한 복합공간의 경우가 선례를 찾기 어려웠거든요, 어찌어찌해서 기획방향을 잡고 나니까 이젠 물건 구하는게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안동으로, 인사동으로 직접 물건을 구하려고 다니면서 발품을 팔아야만 했죠."
전시개념의 靜과 판매, 체험등의 動적인 이미지를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었단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즉흥적인 수준은 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젠 거의 체계도 잡혀가고 앞으로는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한데요. 얼마전 방대한 양의 작년 데이터를 다 정리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의 방문객 숫자부터 어느 시간대 사람들이 많이 찾는지 심지어 기획전시 후 어떤 물건이 잘 팔렸는지 까지 자료화를 했어요.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올해뿐만 아니라 10년 20년 전시관이 나아가야 될 정확한 방향을 잡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참는 성격이지만 공사의 구별은 명확히 한다
백 관장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고 웬만한 일은 그냥 참고 넘어가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같은 실수는 용납하지 않은 성격이어서 그녀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면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던지기도 한단다. 기획하는 사람들의 특징 하나가 촌철살인의 표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녀도 아마 한통속인 듯 싶다.
전시관에는 5명의 매니저들이 있다. 테마가 있는 각 부스별로 판매 및 전시를 맡고 있는데 각자 자신의 부스에 한해서는 매니저란 직함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전문가들이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했던가! 실제 전시관 직원들의 생활은 상당히 진취적이다. 한 달에 한번 콘서트를 함께 가기도 하고 영어, 일어 등 외국어 공부를 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한다. 지난 해 종무식은 여수 향일암에서 가졌다. 끼를 가진 사람들끼리 뭉칠 때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공과 사에 분명한 선을 긋는 리더쉽과 가까운 삶 속에서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능력의 젊은 여성, 전주 공예품 전시관 백옥선 관장! 앞으로 어떤 색깔로 전시관을 이끌어 나갈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지켜보는 즐거움이 더욱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