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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 | [문화시평]
뜻을 새기고 장식을 감상하는 일석이조의 기회 전주역사박물관 <문자도>전
글 이은혁 서예가 국립한국전통문화학교 강사(2003-03-02 20:08:49)
전주국립박물관의 지근에 위치한 전주역사박물관에서 <문자도>전이 열리고 있다. 문자도는 흔히 민화의 범주 속에서 논해지는 것이 관례이나 이번에는 특별히 문자도만을 따로 떼어 아담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부제가 '김철순 기증 민화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민화의 대가이자 수장가로 이름이 높은 김철순이 소장했던 문자도임을 알 수 있다. 문자도란 말 그대로 문자그림이며, 더 쉽게 표현하면 글자그림이다. 문자그림, 글자그림, 문자도는 모두 같은 의미이지만 용어에 대한 이해가 결코 쉽지 않다. '문자를 그림으로 나타냈다'는 말로도 해석되며, '문자에 그림을 그렸다'고도 할 수 있으며, '문자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문자도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 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이를 굳이 민화나 회화에서 분리하는 것은 '문자'의 의미가 '그림'의 의미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사실 민화라는 말에는 '문자'의 의미가 없으며, 훨씬 이전의 용어인 속화(俗畵)에도 '문자'의 의미는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민화나 속화는 문자도와 내용상 엄연히 구별된다. 그러나 문자도에는 도(圖) 즉 '그림'이라는 언어적 귀결사가 첨가되어 있으므로 민화나 속화에서의 '화(畵)'의 의미와 유사성이 발견된다. 도(圖)와 화(畵)에 대한 문자학적 분석이나 의미론적 분석은 여기에서 생략하지만, 문자도를 굳이 민화의 범주에서 논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결국 문자도는 크게 문자 즉 글자의 형태를 빌어 표현한 일종의 문자그림이며 그림문자라고 할 수 있다. 문자도가 발생한 시기는 대략 조선후기로 추정한다. 구체적인 출현은 조선시대 사회적 변동이 행해지던 18세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후 19세기까지 유행하다가 현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 고개를 든 시기로 이른바 실학과 북학의 열기가 점차 달아오르고 있을 때이다. 민화나 문자도를 당시 사상과 직접 관련시키는 것은 어려우나 시기적으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실학과 북학이 식자층을 중심으로 사상적 반성과 새로운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적극적 사회개혁의 일로에 있었다면, 민화나 문자도는 그러한 급진적인 사회체제의 변화나 가치관념의 붕괴에 대한 서민적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문자도의 내용에서 그러한 기미를 확인할 수 있다. 환언하면 간접적인 영향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자도의 주된 내용은 효(孝)·제(弟)·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이다. 이것이 유교적 가치관념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 개념에 대한 문자학적 의미는 매우 추상적이며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효는 무엇인가?'와 같이 문자에 대한 개별적 반문을 통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할 때 관념적 딜레마에 빠질 염려가 있다. 즉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매우 난해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유교경전의 핵심으로 문자도의 의미가 가장 여실히 나타나 있는 {논어}의 경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효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무엇이 진정한 효인지 선뜻 답하기가 곤란하다. 이러한 의미의 난해성을 극복하기 위해 문자에 그림이라는 형식이 첨가되었다. 효를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의 모범적 사례를 문자의 자획 일부나 혹은 문자 밖의 제관(題款)을 통하여 표현하였다. '효'라는 문자도에서는 왕상빙리(王祥氷鯉)나 맹종설순(孟宗雪筍)과 같은 제관을 덧붙이고, 자획의 일부를 고사와 관련된 구체적 사물들 즉 잉어·죽순·부채 등을 표현해 놓았다. '효(孝)'자에 왜 잉어나 죽순 그리고 부채가 등장하는지를 설명한다면 효의 의미는 확연해진다. 여기에서 자칫 문자도가 민화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여 서민적이거나 혹은 저급한 문화의식의 발로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림이나 제관의 내용이 중국 전사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야만 그 문자도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남조송의 유의경(劉義慶)이 찬한 {世說新語}에 나오는 내용도 있으며, {시경}이나 {삼국지} 혹은 중국 정사열전에 등장하는 고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써 초기 궁중이나 사대부가에서 문자도가 시작되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초기의 도안문자에서 후기의 문자도로의 이행은 실용성과 장식성이 요구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문자에 대한 의미나 성찰보다는 그에 대한 구체적이고 교화적인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문자에 표현된 그림 역시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발전하며 문자 역시 도안적인 해서에서 자유로운 형식의 행초서로 확장되어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 변화에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하다. 결국 내용보다는 형식적 변화가 우선한 것은 문자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실용성과 장식성과 결부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렇듯 문자의 형태와 그림(圖)이 서로 비등할 때 문자도는 의미성과 장식성에서 더욱 가치를 발하게 된다. 문자의 의미보다는 고사를 표현한 그림에 초점을 맞추면 민화와의 결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속화나 민화가 순수한 그림(畵)의 경지에 있다면 문자도의 도(圖)는 도안적이라는 점이 약간 다르다. 민화에서는 구체적인 사물들이 화면의 구성에 스스로 참여하여 구도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또 그것이 어디에 처해지든 문제되지 않으나, 문자도에 나타난 사물들은 주로 자획의 일부로서만 사용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처럼 민화보다는 문자도의 그림들이 다소 위치나 소재에 있어서 제약적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효제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 가치관은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국가와 사회에 대한 질서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효제는 인을 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를 바탕으로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건설을 위해 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성으로서 여덟가지 대표적인 예를 제시하고 이를 문자도로 표현하여 늘 자각하고 자녀들을 일깨운 것이다. 21세기의 현대사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근대 서민들의 유교적 삶을 대변하는 금번 <문자도>전은 가치관과 가치체계들이 변화한 지금 우리 선조들이 애써 지키고자 했던 전통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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