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8 | [특집]
8.15 민족해방의 역사적 의의
비극적 역사의 원점인가
새로운 사회 건설로의 출발점인가
고은석/원광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2004-02-03 16:34:29)
1. 글을 시작하며
과거 역사를 규명하는 것은 현재를 진단하는 것이며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8년전 1945년 8월 15일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35년간의 식민통치를 마감할 수 있었다.
8.15 민족해방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격동의 역사가 펼쳐지면서 명암이 교차되고 우리 민족의 삶에 질곡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8.15 민족해방은 단순히 해방이라는 의의 이상의 교훈을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8.15 해방에 대해 의미를 규정한다는 것은 현재 동시대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고 또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해방의 역사적 의의를 규명하는 작업은 해방 전후의 한국사를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해방후 미.소라는 새로운 외세의 영향으로 우리 역사의 굴절을 살피는 게 더욱더 중요하게 생각됨으로 이 문제를 놓고 8.15의 일반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2. 비극적 역사의 원점으로서의 8.15
우리 민족이 맞은 8.15 해방은 프랑스 드골정부처럼 프랑스인들이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전승한 연합국이 우리에게 갖다준 은혜의 선물처럼 되어 버렸다.
물론 식민지 시대를 통하여 독립운동은 부단히 계속되었고 많은 희생이 치루어 졌지만 그것이 민족해방의 일차적 원인은 되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각 방면에서 독립군들이 연합군과 분산적으로 공동작전을 폈으나 불행하게도 어느 한쪽에서도 본토에 진격하여 직접 일본군을 무장해제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고 연합국의 정식 승인을 받은 망명정부도 가지지 못했다.
이는 곧 우리 민족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나라 정치에 극심한 혼란을 가중시키는 출발점으로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은 전민족적 환희가 미.소 양국 군대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한다는 뉴우스가 전해진 순간부터 우울한 해방을 맞이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일본의 항복에 앞서 8월 10일에서 11일밤 미국의 국무성, 육군성, 해군합동조정위원회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소련과 분할 점령안을 입안하였으며 16일에 소련이 이 안을 수락함으로써 해방과 동시에 우리는 미.소라는 두 강국에 의해 새로운 외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우리 민족 의사와는 무관하게 민족의 새로운 운명을 좌우하는 뜻바께 상황이 전개됨으로써 민족의 새로운 운명을 좌우하는 뜻밖의 상황이 전개됨으로써 민족의 지도자들이 꿈꾸었던 건국의 이상들이 깨어지면서 엄청난 수난들이 닥쳐 왔다.
소련군은 8월 24일 평양에 미군은 9월 9일 서울에 진주함으로써 미.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이 본격화 되면서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통치하게 되었다. 미.소 양국은 처럼 모스크바 협정을 통해 5개년간의 4개국 신탁통치를 거쳐 한국에 통일된 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은 한반도 내에서의 각 정치 세력과 집단들이 찬․반이 엇깔리고 계획을 실천하려고 협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에서 조차 상호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미국과 소련은 자기들의 관할 지역에 자국의 국익에 부합되는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그 결과 해방후 3년이 지난후 남에서는 친미적인 이승만 정권이 북에서는 친소적인 김일성 체제가 수립되면서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한반도내에서 이질적인 두 개의 정부가 대두됨으로써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같은 민족끼리 적대적 관계로 변해 버리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해방후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우리의 역사는 크게 왜곡 굴절되면서 해방후 한국사는 애초 민족 지도자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해방후 한국사가 전민족의 뜻과는 달리 빗나갔는지를 여기서는 남한의 미군정을 중심으로 살펴 보자.
미군정은 8월 15일 건국동맹이 중심이 되어 발족시킨 건국준비 위원회와 9월 6일 좌익계의 조선 공산당, 인민당은 물론 3.1운동이래 꾸준히 독립운동을 펼쳐온 임정을 불법화하고 일제통치하 국내에서 언론, 교육, 문화 사업에 있던 친일파들이 가담한 한국 민주당 계열의 인사들과 제휴하여 남한을 통치 하였다.
1947년 트루만 독트린을 발표한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사회주의를 봉쇄하는 정책을 추구하면서 한반도를 만공의 보류로 만들기 위해 친미, 반공주의자인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세우고 미군정에 반발했던 민족주의적 좌, 우익 계열의 독립운동 인사를 배격함으로써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반공과 독재정권 유지의 정당화라는 명분아래 온갖 정치적 부패와 부정이 은폐, 정당화됨으로써 장기간의 군사독재 정권의 출현 발판을 만들어 주었고 한국 현대사의 오점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사회전반에 뿌리박게 만들었다.
해방후 전개된 한국사를 위와 같이 관찰해 볼 때 1945년 8.15해방은 우리의 민족사에서 전민족 기대와는 어긋나는 역사적 원점이며 동시에 민족의 비극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은 8.15해방후 3년간의 역사를 통해 남북한에 상이한 성격의 체제를 갖는 분단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해방 40년의 역사를 흔히 분단시대라 이름 붙이고 있으며 해방 3년사는 분단국가 형성기를 규정한다고 했을떄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정의와 행복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불행의 전주곡이 되고만 것은 바로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전승국에 의해 타율적으로 주어진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3.새로운 사회 건설로서의 출발점
이상과 같이 해방후 한국사의 전개를 비교적 단기적인 안목에서 조감해 볼 때 8.15해방은 부정적 의미가 더욱더 우리 현대사에 가아하게 나타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8.15 해방은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사회 건설의 출발점인 것이다.
1988년부터 서구지향성의 개화운동은 기존의 조선사회 즉, 봉건사회로부터 시민사회로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개화운동이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방향과 목표가 표류하게 되었으나 기층민중과 민족적 지식인들은 이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엿다.
1910년 농업 중심의 양반계급사회에서 상공업 중심으로 사회가 전환하기 위한 시점에서 사.농.공.상의 전통적 사회구조와 사상을 해소시키려는 과정에서 일본 군국주의 침략으로 일본의 지배 구도에 강제 편입 및 강점을 당함으로 인해 주춤 거렸으나 8.15해방은 봉건적 계급구조의 타파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공간이 우리 민족 스스로에게 주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조국 건설의 계기를 부여한 것이다.
8.15해방은 우리 민족이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잃어 버렸던 주권과 민족ㅈ다결권을 회복시킴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유전 당했던 전민족 구성원의 민족적 공동운명체의 인식을 더욱더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혹독한 경제적 착취와 수탈로부터 벗어나 민족경제 즉 민족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일제에 의해 우리 민족의 주권과 정치적 자유를 박탈당함으로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정치적 설계를 차단당했으나 8.15해방을 통해 우리 민족 전구성원에게 주어진 정치적 자유를 통해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설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또한 민족문화를 바로잡고 민족정기를 키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이와같이 간단하게 살펴본 바로는 8.15해당은 결국 반제 반봉건의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공간을 부여한 것이다.
4. 맺음말
해방이란 일차적으로 우리 민족이 35년간의 일제의 폭악한 식민통치의 굴제로부터 문자 그대로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해방된 순간 우리나라는 미.소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을 통해 남북한의 대결 구조의 고착, 심화를 야기시킨 현대 한국 사회의 비극의 원천이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해방은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한민족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즉 전민족의 평등과 자유를 구가 할 수 있는 국가 건설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단든 것이 현대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8.15해방이 주는 교훈은 현재 분단국가를 극복하기 위한 통일지향적 및 한국사회의 불평등 및 모순 구조를 타파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