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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3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사랑이란 오르가즘이 본질에 앞서는 것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김경태 영화평론가(2014-03-03 18:37:05)

<가장 따뜻한 , 블루> 여고생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 가슴 시린 성장 드라마이다. 그리고 성장통의 중심에는 미술을 전공하는 여대생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실패한 사랑의 경험이 있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에게 3시간이라는 상영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해야 말이 장황하게 많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화는 빠른 전개와 생략 속에서 아델을 둘러싼 일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하여 감독은 과묵하지만 배우들은 과감한 제스처와 표정, 눈빛을 통해 너무나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여성 여성이 아닌 

인간 인간으로


아델은 남자와 여자 사이를 오가며 육체적/정서적으로 교감할 있는 상대를 찾는 문제로 갈등을 거듭한다. 그녀에게 사랑의 대상이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침내 첫눈에 반한 엠마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방황은 종지부를 찍는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친구들은 레즈비언이냐며 따져 묻고 그녀는 극구 부인한다. 이는 그녀가 또래 집단으로부터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아델의절친 커밍아웃한 게이로서 다른 학생들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아델의 친구들은 그녀가 레즈비언이라서가 아니라 사실을 숨긴 자신들과 어울렸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에게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부정은 적어도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으며 이성애자냐 동성애자냐의 성정체성은 부차적인 명명의 문제처럼 보인다.  

사실 아델은 엠마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엠마와 달리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도 커밍아웃의 과정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아델은 엠마와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자신이 일하던 유치원 동료인 남자 교사와 바람을 핀다. 엠마를 향한 아델의 욕망은 궁극의 육체적 황홀경으로 이끄는 섹스를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아델이 엠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엠마가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소위속궁합 가장 맞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델과 엠마가 서로의 육체를 열정적으로 탐닉하는 장면을 비교적 시간동안 심혈을 기울이며 보여준다. 어느 순간, 호기심을 유발하던 레즈비언 섹스의 특수성은 휘발되고 격렬한 섹스의 정수만이 남는다. 여성 여성의 섹스는 어느새 인간 인간의 섹스로 승화된다. 


섹슈얼리티를 넘어선 

성적 실천


아델이 엠마와의 섹스 , 실존주의의 명제,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비틀며 농담처럼 던진, ‘오르가즘이 본질에 앞선다 그녀 삶의 모토이다. 아델은 성정체성의 신화로부터 자유롭게 성적 실천을 한다. 성적 대상이 아니라 성행위에 집중된 성적 욕망은 내가 성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치를 둔다. 순간, 규격화된본질로서의 성정체성은 사라지고 섹슈얼리티를 넘어선 성적 실천만이 남는다.  

따라서 영화는 동성애 역시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아름답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엠마처럼 규범적인 가족관계의 성립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할 것이다. 아델과 헤어진 엠마는 자신과 같은 화가이자 싱글맘인 리즈와 함께 살고 있다. 결국 엠마는 자신과 동일한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있는 리즈와의 안정적인 삶을 선택한다. 성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자아실현에도 무관심한 아델은 엠마에게 부담스럽다. 다시 엠마와 조우한 아델은 그녀에게 사랑이 아니라 섹스를 요구지만, 이미 리즈와 사귀고 있는 엠마는 제안을 거절한다. 현실적 층위에서 아델의 욕망은 너무 위험해 보인다. 이제 사랑은 동성애와 이성애가 아니라 현실과 타협하느냐 하느냐로 구분된다. 

아델은 엠마의 초청으로 그녀의 전시회를 방문한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엠마와 리즈가 함께 그려져 있는 그림을 발견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적인 사랑, 그들 셋이 함께 어우러지는완벽한사랑은 엠마의 화폭 속에서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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