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1 | [문화저널]
선사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윤덕향의 한국미술사 서설
윤덕향(2004-02-03 14:19:32)
1. 선사시대의 미술
오늘은 미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정착되었는가.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형성이 되고 그 과정은 어떤가, 즉 미술의 성립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먼저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이 땅에서 미술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미술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미를 추구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선사시대의 미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대체로 예술 또는 그림이라는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몇 가지 다른 이론이 있다. 왜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가. 그리고 조각이나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죽 인간은 진선미를 추구하는 본능적인 속성이 있고 그중에서도 미를 추구하려는 의식이 그림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앞선 미술이라고 하면 대체로 유럽에 있는 얄타미라 동굴이라든지 라스코라든가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의 경우에 그림이 있는 곳은 보통 사람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그런 경우 그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횃불이나 등잔 같은 것을 사용한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표현하고 공유하려면 좀더 밝은 곳에 그리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데 일부러 그곳을 찾아서 그린 것을 보면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진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신앙과 같은 일정한 관념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ꡐ동물을 잘 잡게 해달라ꡑ 혹은 ꡐ어떤 동물을 잡는데 내가 해를 입지 않게 해달라ꡑ라는 기! 원이나 바람으로 그런 으슥한 장소를 택했던 것이다. 그런다면 여기서의 그림은 인간의 미의식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기록으로서의 그림이다. 즉 사하라 사막 같은 그림에서는 고대인들이 스스로 경험했던 사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이런 기록화로서의 그림은 대체로 후대에 등장한다. 그림의 발생을 약 3만년을 전후한 시기로 본다면 그 경우 기록화로써의 그림은 빨리 봐야 일만년을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대인들이 동굴과 같은 어두운 곳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좀더 잘 그려보려고 연습을 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동굴벽화 옆에는 연습한 그림이 같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잘 그려보려는 의식이 미술을 탄생시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선사시대 초기에 나타난 미술은 동굴벽화, 모비라트, 실제생활을 하면서 사용하는 도구에 장식을 한 것으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가장 시기가 빠른 그림은 생활도구를 장식한 것과 또 하나는 조형물이라든가 장신구 등에 표현된 미술이다. 가장 오랜 형태가 돌에 점을 찍을 것과 뼈에 점을 찍을 것으로 구석기시대 예술로 보고 되었다. 그렇지! 만 이 시대의 유물로 등장하는 고래조각과 개조각은 원시적인 형태의 농경문화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 평가될 수 있는 소지가 또한 있다. 따라서 적어도 현재까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구석기 시대 예술품은 없다. 신석기 미술은 인간이 어떤 정형성을 가지고 만든 최초의 형태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토기가 된다. 구석기 시대석기는 정형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신석기 시대는 장식을 넣는 등 정형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체로 신석기 시대 미술을 한국미술의 시초로 보는 관점이 유력하다.
신석기에서 시작된 고대미술은 청동기를 거쳐 삼국시대로 발전하게 홱? 경상남도 울주 대공리 단구대라고 하는 곳에 있는 바위그림이 잇는 절벽을 보자. 이 그림은 국보로 정해져 있고 바위의 그림은 사람과 그 사람들이 손으로 그려놓은 고래그림이 있고 이 바위는 여러 시기의 그림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같은 바위에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이다. 단구대에서 2킬로미터쯤 아래쪽에 있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선전리의 그림을 보면 이전과 달리 묘하게 생긴 무늬들이 나온다. 바로 마름모꼴이 그것이다. 마름모꼴을 이어서 붙이기도 하고, 이쪽은 원형이고, 이쪽 은 마름모에 원을 그려 넣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동물이라든가 하는 것을 새겨 넣은 게 아니고, 소위 말하는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등장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역시 경북 고령 양전동의 바위인데 사람들에게는 ꡐ얄터바위ꡑ로 불리는 곳이다. 여기서의 모티브는 ꡐ동심원ꡑ으로 여러 개의 동심원을 겹쳐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이 제작된 시기는 대체로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지역은 오랜 기간동안 신성지역으로 인식되어 왔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유물을 보기로 하자. 먼저 돌무늬 토기인데 이런 유의 토기는 몇 가지 형태가 있으나 기본적인 모양은 Z자를 옆으로 눕힌 것, N자 모양, W자 모양이 기본이다. 무늬를 점체해 놓는 것이 아니고 아가리 윗부분에 주로 놓고 있다. 일본보다는 북쪽의 어느 지역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하지만 정확하게 기원을 잡지는 못하고 있다. 일본과는 상당한 모양의 차이가 있다. 다음은 주로 함경동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소위 번개무늬 토기, 밀물토기가 나타난다. 그 기본적인 모습은 마름모꼴에다가 안에 적당히 장식한 모양이다. Z모양에서 마름모꼴로 한문 모양으로 발전했다. 다음에는 우리가 흔히 빗살무늬토기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토기가 바로 우리나라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유물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바위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보았던 단구대 선전리, 양양 등지 그리고 동심원을 위주로 그려진 남원 대산면의 바위그림과 최근에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보고 된 경주 동국대 앞산의 바위에서도 팔주경과 검파도식이 새겨진 바위그림이 보고 되었다. 금산의 바위에서는 ꡐ서시화체ꡑ라는 문자가 새겨진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육당 최남선은 이 문자가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 명을 받은 중국인들이 이곳에서 불로초를 발견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지나간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남선에 의하면 이 문자는 한문이 생성하기 이전 즉 갑골문자보다 약간 이전 글의 형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경우 글자라기보다는 바위그림이 아닐까 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남해와 상주리, 벽련리, 양화리에서 발견된 바위그림에는 역시 동심원이 발견되는데 바위에 흠만 파놓은 흔적들이 남겨져 있다. 그런 형태의 그림은 이 지역의 실상사탑이나 미륵사탑에서도 발견되어지는데 이것을 그 동네에선 장군 말 발자국이라고 부른다. 시기가 조금 늦은 것으로 보여지지만 신라형성기 신라육촌 가운데 박을 깨고 나왔다는 이씨에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다. 바로 이 박을 깬 바위가 경주에서 보고 되었는데 이것 역시 동심원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흠은 남. 여를 구분하기 위해 여성을 상징하는 의미로 팠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대체로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는 아들을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변질했다. 이런 그림에서 발견되는 원은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왜 바위그림에 가람이 들어갔는가, 특히 왜 여자를 동그랗게 그렸는가, 흥미 있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여성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풍요롭게 하는 신비한 존재라는 인식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남아 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고대미술에서 남자의 역할이 인식되는 시기는 청동기 시대다. 이 시기의 바위그림에 비로소 암수의 개념이 등장한다. 여기서 남자의 형상은 사냥이나 고기잡이를 위해 기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바위글밑에서 나타나는 동심원은 또 추상화된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더 시대가 지나면서 그림에는 고래나 바다거북 또는 사슴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런 동물들은 주된 식량자원이었으며 따라서 기운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동물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한 지식을 갖추었으며, 자신들의 생활에 중요한 것들을 나름대로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멧돼지는 그들에게 생명의 강인함을 의미했고, 사슴은 하늘과 통하는 힘을 의미했다. 사슴을 통해 계절의 운행을 관찰했고 뱀은 당의 생명력을 상징했다. 이런 동물들과 함께 햇빛이 등장한다. 햇빛은 어둠을 쫓는 존재이며 동심원으로도 표현되었다.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우리미술은 북방아시아와 관련이 있다. 초기 미술은 사실적이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추상화되어 가는 특징을 보여준다.
2.고구려 고분
다음으로 고구려 고분을 보기로 하자. 초기 고구려 고분의 주된 주제는 동심원이나 사람 또는 연꽃이다. 동심원은 대체로 태양을 상징한 것이며 그 자체만으로 모든 걸 표현한다. 그리고 연꽃은 아마도 불교에 대한 신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동물들은 주작(기린처럼 보이는)이나 호랑이, 강서대묘의 호랑이 , 힘센 역사, 뱀의 형태를 띤 칼리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동물들을 고분에 그려놓은 것은 이른바 수호신과 같은 것이거나 생명력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고분에는 이밖에도 다양한 모티브가 등장한다. 세속의 아들과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별,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는 옥녀의 모습. 천왕시총에 나타난 학을 탄 신선, 용을 통해 상징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 수렵하는 장면,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 보여지는 연꽃 등이 등장한다. 또한 북한의 덕화리 유효분에는 북두칠성이 있고 그 아래 별 여섯 개가 있는 그림도 나타나는데, 바로 남두육성으로 이 경우 고구려인들이 나름대로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포괄되어 있지만 샤먼적인 요소와 불교적 요소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초기의 그림들은 상당히 경직되었지만 나중엔 그것을 보충하려는 노력이 나타난다. 초기에 비해 후기의 고분벽화는 상당히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처음엔 사람 중심으로, 나중엔 사신도로 주제가 바뀐다. 사신도는 강서대묘 등에서 쓰이는데 그 그림을 보면 사신도 자체가 타락된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는 노력이 보인다. 엉성하게 보였던 주작 같은 것이 제법 괜찮은 그림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강서대묘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연개소문과 관련된 보좌왕의 아버지 대양왕의 무덤인 것 같다.
고구려 말기 사신도 무덤에서 타락한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매너리즘도 보이지 않으며, 계속해서 새롭게 그리려는 욕구가 보이고 있다. 벽화를 통해 볼 때 고구려는 적어도 망할 수 없는 나라였다. 어떤 요인에 의해서 활기 있는 나라가 갑자기 반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현무, 백호, 청룡 등을 볼 때 힘찬 기상이 보여 그 시대의 사회상이 나라가 망할 만큼 어지럽지 않았고 힘찬 기상이 살아있었다고 보여진다.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망할 수 없는 나라이다.
우리는 고구려 그림을 볼 때 맨 처음 고분 안에 그림을 그린 의도가 죽은 사람이 생전에 했던 일들을 사후에도 현세와 같은 세상을 누리길 바라며 장식했다고 본다. 나중에는 그런 목적 외에 스스로 미적 감각을 드러내고자 한 욕고가 강하게 반영된다. 주제도 나름대로 바뀐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생활 속의 주인공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사신도가 등장하고 나중에는 주인공을 무시하고 사신도를 표현하기 위해 주위 배경을 간결하게 처리하기도 한다. 그림 수법 자체도 처음에는 세습기법으로 본떠서 그리지만 나중에는 돌 위에 직접 그리고 간결하게 그린다. 사신을 그리면 그것만 간단히 그리고 끝내며 깔끔하고 간결해진다. 별면, 천정은 화려한 인동무늬 등은 여러 가지를 그리지 않고 그것만 깔끔하게 그린다. 대체로 인동문, 당초문 등을 써서 간결하게 그린다. 고구려 그림의 정리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대한 것은 여기까지 하겠다.
3.백제의 고분벽화와 고려, 조선의 벽화
이제 백제의 고분벽화를 보기로 하자. 아시다시피 백제시대는 몇 개의 벽화만이 전해진다. 본래 백제의 벽화가 그다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형태도 온전치 않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공주 성산리 고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인데, 이들은 둘 다 왕릉으로 보여진다. 이밖에 서울 장위동에 있는 무덤 중에 벽에 회칠을 한 것이 있는데 흙질이 많이 떨어져서 벽화의 유무는 알 수가 없다. 또 공주 무녕왕릉, 성산리 고분군에도 벽화가 있을 법한데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무녕왕릉의 경우에는 벽돌 자체에 연꽃이 화려하게 세워져 있으므로 따로 장식이 필요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벽돌 벽에 쓸데없는 못이 박혀 있고 그 못은 성산리에서도 발견된다. 이건 아마도 휘장 같은 것이나 걸개그림이 있던 곳이지 않을까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곳에는 비단 천조각도 발견되었고. 그 천조각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조사도 보고 되고 있지만 그러나 이건 추측일 뿐이다.
삼국시대 전후 이해할 수 없는 지역 중 하나가 인동, 영주 지방에 있는 벽화 그림이다. 벽화고분이 나오면서 전탑(전으로 만든 탑)은 안동에 집중되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이지만, 그 안에 있는 그림으로 연꽃그림과 여자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여자는 고구려 여자의 치마와 달리 줄이 가는 치마를 입고 있다. 소매 쪽에 색깔이 다른 천을 대고 있다. 얼굴은 대체로 둥글고 산만하다. 이건 고구려 여자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중국, 일본, 우리나라 사이의 쟁점은 우리나라는 고구려 고분벽화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고구려 영향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중국에서 끌어와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녀와 현무가 그려진 벽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현무는 원형에 가까우며 따라서 중국과 연결하기는 어렵고 고구려와 관련 있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달이나 아버지와 아들의 그림 등의 소재는 중국에서 온 것이겠지만, 중국만을 도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당시의 보편적인 전설일 가능성이 있다. 도교나 불교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임이 확실하나, 중국은 육조 넘어가면서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 7세기를 넘어가면서 고구려만이 고분 벽화를 그렸는데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가 고분 벽을 장식하는 회화를 이끌어간 주체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그림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거창 둔마리 그림에는 천녀도가 있다. 여자가 피리를 불고 있고 한편에서는 복숭아가 있다. 고구려인과는 큰 차이가 있다. 고려 말 공민왕은 고분에 그림을 그리게 했고, 자신이 미래에 들어갈 무덤에도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 솜씨는 비교적 수준이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벽화의 그림은 사람 머리에 토끼가 있고 십이지신상을 사람을 그린 후 그가 쓴 관에 십이지 동물을 그렸다. 그래서 고려에서 뒤를 이은 조선의 경우 천정에 해, 달 그리고 사벽에 사신을 그렸다. 조선중기 선조의 무덤 벽화에서 볼 수 있다. 그 전통은 상당히 오래 갔으나 역시 변동시기는 고구려로 보인다.
4.금속공예, 그 찬연함의 신비
이제 신라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금속공예를 보기로 하자. 고구려와 백제의 금속공예는 금으로 된 것이 없고 신라에만 있다. 가야는 신락로 편입시켜 생각하겠다. 가야도 따로 생각해야 하겠지만 따로 뽑아낼 만큼 연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국 고분 부장품 중 고구려가 가장 빈약하게 나타난다. 고구려는 많은 고분이 있으나 유물이랄 것이 없다. 백제도 부장품이 별로 없으며 그 이유는 첫째 장법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고구려는 장례를 지내고 지장이라고 해서 바로 매장을 하지 않고 육개월 이상을 지체한 후 매장하면서 고인의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장례 참석자들이 기념으로 가져간 후 남은 것을 함께 매장하였다. 백제는 사후 임지장을 하고 2-3년 후 본 매장을 했다. 둘째 이유로 문화의 차이를 들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가 위세를 떨쳤다. 도교도 작용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와 신라의 불교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문화수용 능력의 차이라 볼 수 있는데 신라는 문화 수용능력에서 토착적 성격이 강했고, 고구려 백제는 문화수용 능력이 뛰어나 빨리 ? 옴??되었다는 것이다. 불교가 유행하면 고분에 물건을 넣지 않고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의 5-6세기 무덤에서 부장품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신라는 그때까지도 부장품을 많이 넣어 권위를 과시했다. 신라의 번성기였던 진흥왕 이후 불교가 성행하면서 이후 부장품이 적어졌다는 가설이 있다. 세 번째 이유로는 지배계층의 출신을 들 수 있다. 신라 지배계층은 금을 좋아했다 .신라쪽 금이 월등히 많은 이유는 고구려 백제와의 국력의 차이가 아니라 신라 지배계층이 금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제 금동관이나 금관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경남 쪽을 보기로 하자 .신라 금관의 경우 대단히 화려하고 복잡하게 보이지만 기본형은 산(山) 또는 출(出)자를 세 개 세우고 뒤켠에 사슴뿔을 상징하는 것을 두개 세운 것이다. 입식이 다섯 개인 셈이고 가지가 두개냐 세 개냐, 사슴뿔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시기의 차이가 난다. 여기에 붙이는 나뭇잎 금판은 비슷하다. 다만 신분에 따라 재료가 제한이 되는데 성골의 경우 금관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진골의 경우에는 금동관을 쓰는데 곡옥을 쓰지 못한다는 제약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백제와 신라의 금관 금동관을 보았는데 여기에 표현된 주된 모티 브는 나무, 새, 사슴 등이었다. 사슴뿔이 계절의 순환과 맞아떨어지고 또 사슴은 아무리 잡아먹어도 그대로 있다는 사실 등에서 사슴에게 영혼불멸 또는 불사의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높은 나무는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스 시대에도 신탁을 받는 신전 주위에는 숲이 있었다.) 당산나무나 당숲은 하늘의 사자가 내려오는 곳으로 신성시되었다. 나무에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인정하려고 노력했고, 그 힘을 빌어 실제로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던 사람은 당숲의 주인인 샤먼이었을 것이다. 당숲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고 이런 샤먼의 세력이 커져서 다른 정치적인 힘까지 아우르게 된다면 왕으로 등장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신라의 왕들이 쓰고 나오는 관은 사슴뿔하고 나무인데, 그렇다면 그들이 샤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라 두 번째 왕의 칭호가 차차웅인데 무당을 의미한다.
그러면 새는 무엇인가. 새는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하늘에서 인간에게 전하려는 내용이 있을 때 새는 가장 훌륭한 전달자인 셈이다. 새가 신의 뜻을 인간에게, 도 인간의 뜻을 다시 신에게 전하는 사자의 역할을 한다고 믿고 상당히 높은 격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미술은 보통 힘차고 남성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 문화 자체는 하나에 얽매인 문화는 아니다. 가령 불교가 들어와도 무조건 심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분벽화에서도 중이 손님으로 대접을 받는 장면이 있고 연화문이며 인동문도 나오지만 달속의 두꺼비나 삼족오 같은 토착적인 요소도 나타나고 있다. 또 도교가 들어오고 나중에는 도교 일색인 사신도만으로 벽화가 그려지지만 이전의 연화문이나 인동문은 계속된다. 쳥룡, 백호, 주작, 현무도 중국식의 사신이 아니라 고구려 식으로 변화한 사신이다. 나름대로 소화한 셈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문화수용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경우는 앞에서 무덤의 종류를 보았듯이 통일된 요소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용봉문향로나 벽돌무늬, 또 기와의 연꽃무늬가 그러하듯이 하나로 통일된 예를 볼 수가 없다. 가까운 미륵사지의 석등을 보더라도 자세히 보면 두개의 꽃 모양이 상당히 다른데 시기가 달라서라기보다는 변화를 주는 것 같다. 백제의 가람배치는 단순하다고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또 부여가 아니라 나주에서 금동관이 나왔는데 대체로 5세기 경 의 것으로 보고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전라남도의 해안을 장악한 것이 4세기 중반인데 어떻게 독자적으로 금동관을 가질 수 있었을까? 또 익산 입점리에서는 금동신발이 나왔고, 그것이 수리를 했거나 닳은 흔적이 있다는 것을 보면 실제로 그 신을 신고 생활한 존재가 익산에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들은 누구일까? 나주라면 거리가 멀어 그 지역의 실력자가 몰래 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익산이라면 바로 코앞이다. 아마도 백제 자체가 왕이 전권을 휘두른 나라가 아니라 각 지역이 가진 독자성이나 특성을 인정해주는 나라, 정치적으로는 예속시키더라도 문화적으로는 독자성을 허용한 집단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백제의 문화는 제각각이다. 전라북도의 토기만 하더라도 가야권이라는 산간지역을 제외시켜도 익산, 부안, 고창이 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백제에 복속되기 전에 마한 54국이었던 것이 나름대로 인정받고 성장한 결과로 보이기도 하며, 또 이런 것들을 하나로 합치지 못한 것에서 백제가 망한 한 가지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합치지 못한 원인은 이쪽 지역의 높은 경제생산력에 있다는 것이 추측가능하다. 신라문화에 대한! 정리는 앞서의 정리를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