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1 | [문화와사람]
명고수 김 동 준 (2)
소리꾼의 길 포기하고 고수로 대성
최동현․군산대교수․판소리 연구가
(2004-02-03 14:18:35)
박동실로부터 소리를 배워 20대 초반에 자신의 소리의 가닥을 잡은 김동준은, 정읍군 감곡에 살던 정악 대금의 명인 신달용의 딸과 결혼하면서, 활동 무대를 전주로 옮기게 된다. 작고한 명고수 송영주의 증언에 의하면, 김동준의 소리를 하러 다니던 무렵 태인의 판소리 애호가들이 김동준을 눈여겨 봐 두었다가 신달용의 딸과 혼인을 권해서, 혼인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1952년에 김동준은 김연수의「우리국악단」에 입단을 해서 김연수와 공연에 나서게 된다. 김동준이 김연수의 앞소리를 해서 칭찬을 들었다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1955년부터 1980년까지는 전주의 전동국악원에서 소리선생을 하면서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김동준은 명창으로 이름이 났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김동준에게 박동실 바디의 소리들을 배웠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전라북도 문화재로 있는 정미옥(적벽가)과 이성근(고법)이다. 전주에 광주소리로 알려진 박동실 바디의 소리가 퍼진 것은 이때 김동준에 의해서였다.
김동준의 전주 체류 시절은 김동준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다. 김동준이 전주 사람들을 말하면, 늘ꡐ고향사람ꡑ이라고 했던 것은 그만큼 그에게 전주 시절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김동준은 전주 시절을 중요하고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전주에서 비로소 판소리 창자로서 활동다운 활동을 시작했고 명창으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제자를 두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후에 장기로 삼았던「적벽가」를 배우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김동준의「적벽가」는 박봉술에게 배운 것으로, 전통적인 동편제「적벽가」이다. 김동준이 박봉술에게 언제「적벽가」를 배웠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제자이면서 역시 박봉술의「적벽가」를 장기로 삼고 있는 이성근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대 후반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근에 의하면, 김동준이 1950년대 후반 쯤 제자들과 함께 박봉술 선생을 모시고 금산사에 들어가「적벽가」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미 판소리의 모든 것을 다 익힌 후「적벽가」를 배운 것이다. 그러나 그가「적벽가」를 배운 이후 판소리 창자로 활동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가 소리보다는 북에 더 전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에 김동준은 전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잠시 국악원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실패하였고, 1982년 국립창극단에 전속 고수로 입단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김동준은 소리꾼의 길을 포기하고 고수의 길을 걷게 되었고, 고수로 대성하여, 마침내 1989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적벽가」녹음은 아마 이 무렵, 그러니까 김동준의 서울살이 초기의 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뒤에는 공식적으로는 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동준은 1990년 타계하기까지 김명환, 김득수와 함께 명고수 3인방시대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김명환, 김동수 보다 나이는 적었고, 또 무형문화재도 늦게 되었지만, 오히려 고수로서의 능력은 더 낫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김동준은 이처럼 명고수로 더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소리꾼으로서는 별다른 조명을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리꾼으로 대부분의 인생을 살았고, 업적이나 능력에 있어서도 고수로서의 그것보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한 예술가의 예술세계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예술가의 모든 업적과 공과를 함께 고려해야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김동준의 판소리 또한 응분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김동준의「적벽가」는 박봉술에게 배운 것이다. 박봉술은 자기 형인 박봉래로부터 대부분의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박봉래는 1932년 별세했는데, 이 때 박봉술의 나이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아무리 어려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고 하더라도 열세 살 소년이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다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봉술은 후에 이선우와 유성준에게 판소리의 지침을 받았다고 했다. 지침을 받았다는 것은 수업을 받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지침을 받았다는 것은 가벼운 지도, 대강 윤곽만을 배우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때로는 직접 소리를 따라 부르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목의 소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로 설명하는 것만 듣고 배우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박봉술이 이선유와 유성준에게 지침을 받았다는 것은, 박봉술이 자기 형에게 배운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박봉래는 송만갑의 제자이고, 이선유와 유성준은 송만갑의 아버지인 송우룡에게 배운 사람들이다. 송만갑은 자기 아버지인 송우룡에게 배웠지만, 후에 자기 나름의 창법을 개척했기 때문에, 아버지 송우룡에게 독살당할 뻔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이선유는 김세종이나 김창환, 박기홍 등의 명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유성준도 정춘풍과 김세종 등의 지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선유, 송만갑, 유성준의 소리는 조금씩 틀리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자료만을 토대로 해서 본다면, 송만갑과 유성준의 소리는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이선유의 소리는 이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박봉술이 이선유나 유성준으로부터 지침을 받은 내용이 박봉래로부터 배운 것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일단 박봉술의 소리는 송만갑 소리의 충실한 계승자로 보아서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거나 확인할 수 없는「적벽가」중에서 송만갑 바디「적벽가」와 가장 유사한「적벽가」는 유성준 바디라고 할 수 있다. 유성준 바디「적벽가」는 현재 정광수씨가 부를 수 있으며, 임방울이 불렀던「적벽가」도 음반으로 남아있다. 유성준 바디의 원형(사설 면에서)을 잘 간직하고 있는「적벽가」는 임방울의「적벽가」인데, 이「적벽가」에는 도원결의, 삼고초려, 박망파 전투 대목이 없고, 앞에 길게 그간의 줄거리가 요약된 뒤, 바로 적벽대전으로 들어가 조조 군사 설움타령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정광수 씨도 자신이 펴낸 사설집에서 본래 유성준 바디에는 도원결의, 삼고초려, 박망파 전투 대목이 없었고, 자신은 이동백으로부터 삼고초려와 박망파 전투 대목을 배워 부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로 보아 동편제「적벽가」는 곧바로 적벽대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광수 씨는 이런「적벽가」를「민적벽가」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박봉술의「적벽가」는「민적벽가」가 아니다. 앞부분에 도원결의, 삼고초려, 박망파 전투, 장판교 대전, 공명과 동오의 여러 선비와의 설전 대목이 길게 부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앞부분은 박봉술이 다른 곳에서 배워 첨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창본을 검토해보면, 이 첨가된 부분은 한승호(현재 김채만 바디「적벽가」무형문화재임)의 것과 거의 같다. 정광수의 증언에 의하면, 박봉술은 이 부분을 박동실의 사설로 채웠다고 하는데, 이 증언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 박동실은 김채만의 제자로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남도 지역을 대표하는 소리꾼이었다. 목이 나빠 소리는 별로 하지 않았으나, 곡을 만들거나 제자를 가르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8.25 중에 월북을 한 사람이다. 한승호는 이날치-김채만-박종원으로 이어진 소리를 이었고, 박동실 또한 김채만의 제자이기 때문에, 박동실을 통해서 이어받은 박봉술「적벽가」의 앞부분이 한승호의「적벽가」와 동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