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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 | [문화저널]
동화에 상처 입는 동심
여성문학연구모임 (2004-02-03 14:12:00)
우리 아이들이 제일 많이 즐겨 읽는 동화는 어떤 것들일까? 또 어른들이 권장하는 동화책은 무엇무엇인가?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들의 고사리 손에 가장 먼저 끝이 너덜너덜해지는 책들은 아마도『백설공주』『신데렐라』『헨델과 그레텔』『피노키오』『피터팬』… 등일 것이다. 이는 여러 출판사에서 찍어내는 세계 명작 시리즈에 위의 것들이 거의 빠지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른바 동화의 정전(canon)이다. 훌륭한 작가가 쓴 훌륭한 교훈이 담긴 책이라는 얘긴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그 교훈이다. 동화가 의도하는 교육적 내용은 대개 정직과 성실, 착한 마음씨, 지혜, 모험심 같은 것으로 어린이들의 곧은 성장을 위해 무엇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훌륭한 교훈을 전달하는 데 있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오류나 어느 때는 거의 악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틀에 박힌 사고방식의 답습을 언제까지나 방관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ꡒ동화니까…ꡓ하고 그냥 눈감아 버리기에는 어른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이 너무 눈부신 까닭이다. 무엇이 그렇게 어른들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게 하고 다급한 심정이 되게 하는가? 우선 맨 먼저 걸리는 것은 왜 동화 속에는 나쁜 새 엄마만 사는가 하는 점이다.『백설공주』『신데렐라』『헨델과 그레텔』이외에도『백조왕자』『콩쥐팥쥐』『장화홍련』『달아가씨 별아가씨』등이 증명하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착한 새엄마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처소생의 자식들을 못살게 구는 마녀 아니면 악녀들이다. 미모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딸을 죽이려 하는가 하면, 마술을 걸어 아들들을 새로 둔갑시키기도 하고, 온갖 궂은일을 시키며 구박하거나 가난을 핑계로 아이들을! 내다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착하고 지혜로운 아이들은 역경을 딛고 행복을 찾는다. 그동안 새엄마는 벌을 받아 죽거나 아니면 죄를 뉘우치고 용서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온당한 구도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권선징악의 교훈을 떠받치고 있는 ꡐ새엄마=맘씨 나쁜 여자/전처소생 = 착한 아이들ꡑ의 골격이다. 이처럼 도식적인 상황설정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새엄마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입장에 대한 무비판적 시각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재혼이 불가피하다고 해도 사람을 잘못 선택한 아버지의 책임은 전혀 문제되지 않고 있다. 자식들의 불행의 원인 제공자인 아버지는 끝까지 무력한 존재로 남아 있으면서 선악의 대립구도에서 슬며시 빠져나가 버린다. 그런가 하면 착한 마음씨를 지닌 딸들에게 찾아오는 행복이란 곧 왕자님과의 결혼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예쁜 딸들이다. 마음이 착하면 얼굴도 예뻐진다는 것인지, 얼굴이 예쁜 사람이 마음도 착하다는 것인지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지만 딸의 경우 ꡐ행복=결혼ꡑ이라는 한결 같은 귀결은 훨씬 심각하다. 성공적인 결혼의 결과가 행복이라면 공주 혼자 그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닐 텐데 마치 왕자가 공주의 착한 마음씨에 내리는 은덕인 양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끔찍한 야수의 볼모가 되기를 자청하는 벨(미녀와 야수)의 효성은 그 자체로 눈물겹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야수가 잘생긴 왕자님이었다는 결말은 간담이 서늘한 보상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프랑스판 심청이인 셈인데, 두 딸에게 주어지는 화려한 결혼이란 선물은 효도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고 만다. 언제든지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희생정신의 소유자로 여성을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여성을 피해자로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그 여성이 받는 보상이 처음 만난 남자와의 결혼이라는 건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그 결혼은 운명적인 동시에 강제적이다. 생각해보라. 열다섯 살에 잠들어 백 년 만에 깨어난 소녀에게 맞닥뜨린 일이 자신을 깨워준 남자와의 결혼이라니(『잠자는 숲 속의 미녀』), 어느 누가 감히 그들이 행복할 거라고 장담한단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결혼이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잣대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결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헌데, 동화 속에서 배우자를 선택할 권한이 주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자를 택한 인어공주는 예외지만 그 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면 동화 속에는 왕자와 공주의 결혼 이야기만 있는가? 물론 아니다. 어린이들이 가져봄직한 호기심과 모험심을 충족시켜주는 상상의 세계야말로 동화의 백미라 할 것이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피터팬』의 나라는 얼마나 신선하며 거짓말 잘하는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기까지 겪어내야 하는 숱한 난관들은 얼마나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가? 이 때 그 위기의 극적 효과는 교훈의 크기를 배가시킬 것이다. 또 공부하기 싫어하는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펼치는 모험은 그 리얼리티에 힘입어 아이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걸리버나 로빈슨 크루소의 여행기가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준다는 사실을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런 진취적인 기상을 모두 남자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어 있다. 위의 주인공들이 남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다 간혹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해도 그 역할은 미비하며 부정적 이기조차 하다. 피터와 웬디가 처음 만났을 때 웬디의 할 일은 바느질(피터의 찢어진 그림자를 꿰매주는)이었다. 따라서 어린이들의 나라에 웬디를 데리고 간 피터가 아이들에게 ꡒ엄마를 데려왔다ꡓ고 말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어른을 거부하는 피터팬이 엄마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인가? 여자아이에게는 모험보다는 가사일이 어울린다는, 또는 여자들은 꾀도 없고 힘도 없으니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발현이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들에게는 호기심도 모험심도 아예 없다는 말인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재미있는 모험의 세계가 없지 않다.『오즈의 마법사』나『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어린이들에게 모험이란 집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도로시나 앨리스는 끝내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신기한 탐험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집을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한다. 또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가 함께 떠나는 여행에서조차 그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역할분담이 주어진다.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에게 요술할머니가 건네주는 초록 모자는 ꡐ사내아이만 쓸 수 있ꡑ는 것이다. 그 결과 용감하게 역경을 헤쳐 나가는 치르치르와 대조적으로 미치르는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는 나약한 ꡐ여자ꡑ의 전형으로 붙박힌다.(『파랑새』).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주신 빨간모자를 쓴 여자아이가 있었다(『빨간 두건』). 허나, 그 아이는 어느 날 엄마 심부름으로 할머니 댁에 문병을 가다가 이리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앞만 보고 곧장 가라는 엄마 말씀을 어기고 이리의 꾐에 빠져 숲 속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때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빨간 모자는 여행길의 길잡이가 아니라 이리의 사냥감이 되는데 한 몫을 하는 눈에 띄는 표식이자 일탈을 억제하는 금기의 상징이다. 할머니가 빨리 낫기를 바라는 아이의 고운 심성은 엄마 말 안 듣고 숲으로 꽃을 꺾으러 들어 간 죄에 가려 완전히 빛을 잃는다. 그만큼 여자아이에게 채워진 족쇄가 단단하다는 얘기다. 제페토 할아버지를 죽음직전의 위기로 몰고 간 피노키오의 상습적 일탈행동과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잠깐 동안 한눈 판 대가로는 지나치지 않는가. 여기서 잠깐 알아둘 게 있다. 페로의 원작은 빨간 모자가 이리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끝나지만, 우리나라의 번역서들은 사냥꾼의 도움으로 이리의 뱃속에 있던 할머니와 빨간 모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얘기가 덧붙여져 있다. 과도한 처벌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말미를 장식하는 빨간 모자의 반성은 이 동화의 의도를 재확인시켜 움직일 수 없는 지침으로 못 박는 결과를 가져온다. ꡒ엄마 말을 안 들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지. 앞으로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될 테야.ꡓ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자. 할머니 말씀을 안 듣고 빨간 구두를 신고 교회에 갔다가 그 구두가 멈추지 않고 춤을 추는 바람에 망나니에게 두 발목을 잘리우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빨간 구두』). 허영심을 갖지 말라는 교훈이지만, 거실 집 밖으로 싸돌아다닌 여자에게 내리는 섬뜩한 금족령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이르면 온갖 반박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동화를 너무 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 이니냐. 부정적인 여성관이 들어있지 않는 동화도 많지 않느냐, 거기다 한국 전래동화를 보면 슬기로운 여자의 이야기가 꽤 있는데 무슨 소리냐… 사실이다. 남녀의 차별적 역할규정 없이도 훌륭한 동화를 쓸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작품이 없지 않다. 그것들을 일일이 들춰내어 가치를 인정하는 일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지면의 한계를 핑계 삼아 자세한 소개는 미루기로 하자. 대신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에 나타난 문제점을 한 가지 더 들추고, 어떤 것이 바람직한 동화인가 생각해보자. 전래동화에는 바보 같은 남자와 지혜로운 여자가 많이 등장한다. 특히『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를 모태로 한 비슷한 이야기가 많은데, 서구의 ꡐ이성적 남성/감정적 여성ꡑ의 이분법을 뒤엎는 우리나라의 특징적 장점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는 그 여인들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남편의 출세를 위한 밑거름일 뿐 자신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 데 있다. 철저하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것 이상의 의의를 두기 힘들다는 점 때문에 서양의 동화가 지니는 문제의 진정한 극복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의 자리는 없는 셈이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두고 여자의 위치는 고작 한 침대(아버지가 마련해 주신)에서 다른 침대(남편의)로 옮아가는 것일 뿐이라던 한 프랑스 페미니스트의 단언은 대단한 의미심장하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히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너무 일찍 포기하지는 말자. 조금씩만 바꾸면 원래의 의도를 다치지 않고도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키우는 좋은 동화가 될 것이다. 근래에 활발해진 우리나라 창작동화 작가들의 노력은 바로 그런 의식의 소산일 터이다. 동화는 결코 쉽게 쓰여지지 않는다. 치밀한 구성과 알맞은 배치, 지나치지 않는 압축, 거기에 동심을 대변하는 재미… 이런 것들을 두루 갖추자면 어느 글쓰기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창작 동화 중에서 손꼽히는 수작 한 편을 소개하면서 동화가 나아갈 길을 함께 모색할 것을 청한다. 권정생의『몽실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흔치 않을 줄 안다. 그 몇 가지 돋보이는 작가의 의식적 노력을 추려내보면, 우선 새엄마에 대한 고정관념의 파기를 들 수 있다. 무능한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는 엄마에 대한 몽실의 인식이 조심스럽게 변화되는 것도 새엄마의 새로운 가치를 깨달아가는 과정과 함께이다. 새엄마의 역할이 특히 의미를 지니는 것은 몽실에게 ꡐ여자도 배워야 한다ꡑ 고 가르치며, 우는 건 못난 짓이니 이를 악물고 살아낼 것을 당부하는 데에서부터 드러난다. 이에 몽실은 세상과 인간을 다시 보게 되고 ꡐ남편과 자식을 버린 화냥년ꡑ이라 비난 받는 생모를 이해할 수 잇게 된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흑인 혼혈의 신생아를 품에 안고 뛰어가는 몽실의 항변은 엄마를 비롯한 모든 이 땅의 불행한 여인들의 절규를 대변하는 것이다. ꡒ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여요.ꡓ 이렇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된 몽실이기에 ꡒ왜 여자는 남자한테 매달려 살아야 하는 걸까?ꡓ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어린애답지 않게 시집 안가고 혼자 살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이 작품에서 몽실이로 하여금 착하나 공비도 있고 나쁜 국군도 있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깨닫게 만든 것은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는 교과서적 시각을 탈피하려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지의 발현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올바른 여성관은 단지 여성을 위하는 소박한 마음이나 성급한 여성우월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세계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런 작가들의 노력이 그치지 않는 한 상처받은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조금씩 치유될 것이며 그 투명함을 훨씬 오래 간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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