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1 | [서평]
ꡐ원칙의 확인ꡑ으로 만나는 김 선생
『붕어』(1994.서정인 지음. 서울)
글/정철성 전북대 강사 편집위원
(2004-02-03 12:09:42)
『붕어』의 작가가 소설가일 뿐 아니라 영문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독자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비밀이 그렇듯이 이 역시 알려진 비밀이고, 누설죄란 비밀을 털어놓아서는 안 될 사람에게 털어놓아 적용되는 것이지 단지 털어놓았다는 사실만으로 벌 받는 죄가 아니지 않은가? 이런 허두를 덧붙이는 까닭은 필자가 선생에게 배웠고 아직은 배우고 있는 도중인지라 일언반구도 함부로 두드릴 수 없는 처지임을 미리 알리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도울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선생의 소설에 한마디 하겠다고 덤빈 짓거리가 처음부터 사양했어야 당연하고 말았어야 편안한 일임에도 말려들게 된 사유야 말해 무엇 하랴. 전전긍긍 여리박빙. 그저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조심할 밖에 묘수가 없다.
『달궁』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된 전라도말로 소설쓰기가『붕어』에 오면 하나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소설에서 사투리를 사용하는 경우에 묘사는 표준말로, 따옴표 안에 들어가는 대화는 이따금 사투리를 섞어 쓰는 것이 보통이다.『붕어』에는 이런 경계가 없다. 전라도말의 어조가 묘사에까지 끼어든다. 사실 표준어로 쓴 묘사란 것이 서울말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 다르지 않으니 사투리가 묘사의 자리에 들어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한편 서울말이 서술의 도구인 경우에도 서울말이 변형 없이 그대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화기 이후 근대문학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서울말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그 말은 소설의 도구로 가공된 것이다. 선생은 사투리를 이용하겠다고 남부시장에 나가 사투리를 녹음 해다 써봐야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붕어』의 사투리는 전라도의 말이지만 그러나 처리과정을 거친 것이다.
언어의 가공이라는 면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는 것은 외래어를 토착어로 바꾸어놓기이다. 이전에도 등산용 버너가 불통으로 바뀔 것에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무더기로 나온다. 몇 개만 예를 들어보자. (1)시내 승합차, (2)주파수변조 입체음악, (3)쇠뭉치 비틀이, (4)장엄, 탁월, 긍지, 수도, 왕자, 공작, 망아지. 네 번째 예들은 국산차의 이름들이다. 따로 떼어놓고 보니 별것도 아닌 듯이 보이지만 문맥에 끼어들 때 이 낱말들을 일상적인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며 단어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ꡐ낯설게 하기ꡑ를 연상시키는 수법이다. 그러나 형식주의자들이 기법에 치중한다면 선생은 한국어의 오염이라는 현상을 함께 문제 삼는다.『붕어』에는 미국말 식으로 노래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작중인물 김 선생은 물이 오염되었고 말이 오염되었음을 개탄한다.
사람의 글에 체취가 묻어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이번『붕어』처럼 선생의 일상이 드러난 경우가 없었다.『해바라기』와『국경수비대』를 제외한『기우』,『망상』,『광상』,『환상』,『붕어』에 등장하는 김 선생은 선생의 분신이다. 여기에 선생의 가족에다 강아지와 승용차까지 등장한다. 넝쿨글씨를 가르치는 영어선생이 외래어를 홀대하는 것이 웬일이냐고 물을 독자도 있겠지만 오히려 넝쿨글씨를 아는 까닭에 무분별한 외래어의 남용을 직시하는 것이다 .김 선생의 분통 터뜨리기는 시대를 향한 외침이다. 시대가 탈골이 되었다. 아, 저주받은 심술이여, 내가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태어나다니. 이 인용구는 셰익스피어의『햄릿』 일 막 오장이 나온다. 뼈마디가 어긋나버렸다는 탈골의 뜻을 음미해보라. 영문을 번역하면서 적절한 한자어로 함축적인 의미까지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붕어』에는 상당수의 한자어구가 등장한다. 때로 긴 발의 발전의 예처럼 한자어를 파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쓰지 않는 한자어구가 스스럼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한자어가 한자로 등장하는 법은 없다. 따라서 독자는 한글의 자모로 표현된 단어의 이면에서 영어와 한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알아서 나쁠 것은 없지만 라틴어를 모른다고 영문을 읽지 못할 이유가 없음과 마찬가지로 독자가『붕어』를 읽기 위해 영어와 한자를 새로 익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탈골과 같은 단어의 함축적인 의미를 최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연속적인 사건과 사고에 비추어 보면 절묘한 일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선생이 정 여사로부터 원칙주의자, 이상주의자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원칙을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여사가 현실주의자일지언정 적당주의자는 아닌 까닭에, 그리고 발언의 주도권을 김 선생이 쥐고 있는 까닭에『붕어』의 시각은 다분히 원칙론에 기울어 있다. 원칙의 확인이라는 면에서 우리는 김 선생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소설을 김 선생의 성장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원칙이 번번이 무시당한 경험의 기록이다. 월급쟁이 영어선생이라는 직업의 이 인물을 통하여 한 시민이 무너진 사회 규범을 개혁할 수도 없지만 그 책임을 회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 재현된다. 개인적 경험이 체제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음은 구십 년대에 들어 남들 다 새삼스럽게 들먹이지 않는 고아주의 체험이『해바라기』와『국경수비대』라는 두 편의 단편에 실려 이번 작품집의 첫머리를 채우고 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붕어』는 단순한 중단편집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직된 작품집이다. 소설의 재미가 줄거리에 있던 행복한 시절은 지나갔다.『붕어』는 독서행위 자체의 반성을 강요한다. 이런 소설에 친숙해지려면 독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덤벼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번 맛을 들이면 예전에 보던 소설들이 심심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감수성이란 증폭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방향을 바꾸는 법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