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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 | [문화저널]
억겁을 또 지나도록 내 소리 받아가라 「판소리의 맥을 따라」
글/김미숙 남원여상교사 (2004-02-03 12:05:58)
가을은 수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 …………… 茶兄의「무등 茶」에 나오는 귀절입니다. 저는 지난여름 보성 차밭에서 언니가 만들어다 준 향긋한 차 한 잔을 끓였습니다. 오늘도 하늘은 연한 쪽빛으로 맑고, 포플러가 바람에 반짝이는 기가 막힌 가을날 이었습니다. 기행을 떠나기로 한 주말의 하늘도 오늘과 같았어요. 옥양목에 쪽물을 한번쯤 들인 듯한 하늘에 부드럽고 하얀 그름이 여기에서 저기로 흘러가는 그런 깨끗한 오후였습니다. 눈빛이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우리 일행은 어린이와 어른을 합하여 서른여섯쯤 되었을 거예요. 운봉으로 가는 김에 자기소개를 하는데 모두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어린이와 나이 지긋한 부부의 동반, 그리고 홀로 떠나온 사람들. ꡒ… 열심히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려고 노력합니다.ꡓ 하는 어떤 이의 자기소개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기행의 주제는 「판소리의 맥을 따라」였는데 송흥록으로 시작하는「동편제」와 박유전으로 시작하는「서편제」의 맥을 짚어 보는 일이었습니다.「동편제」는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 곡성, 구례, 흥덕 지방에서 전승된 소리로 우조(羽調-씩씩한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을 절제하며, 대마디 대장단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는데, 발성은 통성을 사용하여 엄하고, 구절 끝마침을 되게 끊어내는 남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 나주, 담양, 화순, 보성지방에서 전승된 소리로 계면조(界面調-슬픈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리고, 소리가 늘어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단의 운용에서는 엇부침이라하여 매우 기교적인 리듬을 구사하고, 널음새(육체적 표현, 동작)가 매우 세련됨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서편제」를 여성적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운봉에 있는 가왕(歌王) 송홍록의 생가였어요. 집터는 남아있지 않고 동네 어귀의 커다란 느티나무 옆에 그가 여기에 있었다는 여기에 새겨 놓은 조그만 돌만이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신 분은 군산대에서 국문학을 지도하시며, 판소리를 연구하시는 최동현교수님이셨는데, 하룻밤과 이틀 낮을 퍽이나 자상하고 성의 있게 판소리의 맥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가왕이라는 칭호는 송흥록의 선배인 모흥갑이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당대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그가 송흥록을 가왕이라고 칭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실력을 짐작 할 수 있겠지요. 그는 극창의 중시조로「변강쇠타령」「춘향옥중가」「적벽가」를 잘 불렀다고 합니다. 송흥록은 운봉 비전리에서 태어났는데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적지로 황산대첩비가 있는 동네이고, 송흥록 이후 여러 명창이 났다고 해요. 운봉이 음악의 고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이 지역의 음악적 전통으로 기악이나 성악할 것 없이 뛰어난 음악가를 배출한 유서 깊은 땅이고 둘째, 넓은 들을 바탕으로 대지주들이 다수 존재하여 음악가들의 충실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지리산을 끼고 있어 음악 수업에 좋은 장소가 많았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판소리사에서 송흥록의 공헌은 진양조의 완성과 산유화조, 경조의 개발이라고 하였어요. 진양조는 그의 매부인 명창 김성옥이 학슬풍으로 누워 지내는 동안 개발한 것을 송흥록이 오랜 기간 연마하여 완성했다고 하는데 판소리 장단 중 가장 느린 대목에 쓰이고, 아주 슬픈 대목에 많으며 양반의 음악인 정악의 특징을 간직한 곳도 많다고 합니다. 산유화조는 경상도 민요의 선율을 지칭하고, 경조는 경기도 민요의 선율을 말하는데 송흥록은 판소리에 경상도 민요와 경기도 민요의 선율을 도입하여 지역적, 계급적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의 음악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하더군요. 하여 가왕 송흥록의 소리는 남원, 구례, 순창, 고창으로 퍼져「동편제」라는 큰 가락을 형성하였고,「동편제」 소리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송흥록의 생가에서 그분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는 그 바로 옆에 있는 황산대첩비를 둘러보았습니다. 황산에서 아지도발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귀영이 비문을 짓고 송인이 글을 써 1577년(선조 10년에 구상 수립식으로 세운 석비였는데 일제 때 파괴되어서 지금은 파편만 남아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파편을 보니 비석을 무엇으로인가 갈아서 글씨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성숙한 사람대한 그리움을 다시금 일깨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새 황산대첩비가 거기에 서있었는데 그 비석은 비문이 세로로 쓰여 있지 않고 가로로 쓰여 있는 모양이 처음 보는 것으로 특이했습니다. 남원으로 오는 길은 해가 뉘엿해져서 억새가 참으로 아름다웠고, 잠시 서서 바라다본 육모정의 뒷산이 동양화처럼 펼쳐져 눈을 맑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밤. 우리는「동편제」를 만났습니다. 엇부침을 거의 쓰지 않는 대마디 대장단 가락을. 그것은 저에게 행복한 경험이 되어 주었습니다.「동편제」계보에서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바디)-김정문-강도근-안숙선으로 이어지는 계보 중, 강도근의 남자 제자로는 한 사람밖에 없다는 전인삼씨를 모셔「흥보가」를 감상했습니다. 북 장단은 우리를 안내해 주시던 최동현 교수님께서 하셨는데 고수 또한 일품이었어요. 우리 일행에게 들려주는 박타는 대목은 목이 쉰 듯한 소리이면서 기교보다는 목으로 우기는 뱃속 깊은데서 우러나오는 통성으로 우리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흥보가 되기도 하고, 흥보처가 되기도 하고, 놀부가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 음색과 몸짓에서. 저는 이곳 남원에 살면서 다행중의 하나로 국악 감상 기회가 많음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국립인 남원 국악원에서 여는「국악 감상회」를 일년이면 대여섯 차례나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전인삼씨의 소리를 몇 번인가 들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그 양반 소리를 듣고는 ꡒ툭아리보다 장맛이다ꡓ하셨어요. 그 사람의 소리는 어딘가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며칠 전 ꡐ문화의 달 기념공연ꡑ에서도 그는 소리를 했는데「수궁가」중에서 별주부가 호랑이와 토끼를 만나는 한 대목을 했어요. 모다들 좋아 했지요. 소리가 그저 좋아 18년 동안 공부했다는 그는 우리에게「농부가」중에서 후렴을 가르쳐 주었고 우리 모두는 흥겨웁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둘러앉은 이들의 소리에 대한 애정으로 이야기는 밤과 함께 깊어 갔습니다. 일요일 아침. 지천으로 가득한 안개에 휩싸여 우리 일행은 출발했습니다. 1982년 4월20일 구례읍 냉촌리 화엄사 가는 길에 세워진「국창 송만갑 선생 추모비」를 향해서 비문을 보니 1865년 구례에서 출생하여 10세에 그의 이름이 날렸고 뒷말 송흥록의 창법체를 받아서 동편제의 거목이 되었다고 합니다. 안내하시는 분의 말씀에 의하면 그의 소리는 철성으로 고음에서 뚝 떨어진다거나, 저음에서 고음으로 갑자기 솟구치면서 음색의 변화를 주는 창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철저하게 배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통성을 사용하여 슬픈 대목에서도 슬픈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지 않고, 강한 감정의 절제를 보여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술에는 무섭도록 치열한 의식의 소유자였으나, 인간적으로는 인정이 많고 마음씨가 좋아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제자들 각자의 특성을 고려하여 각기 다르게 가르치고 소리를 할 때는 듣는 이에 따라서 조차도 다르게 소리를 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지요. 다시 하늘은 쪽을 띄웠습니다. 옥양목! 을 세 번쯤 물들인 색조로. 하늘을 보며 생각해 보았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원하는 선에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참으로 지난 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서편제」를 향해서 보성으로 갔어요. 보성 소리는 질과 미감을 즐기는 예술로 성음놀음이라고 하는데 음악성을 중시하여 재담소리로 보는「흥보가」는 부르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하네요. 「서편제」의 맥은 박유전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우리가 가는 길은 정재근-정응민-정권진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 보성 소리「정응민 선생 예적비」에 닿았습니다. 정재근은 보성에서 1960년대 이후 인기가 대단하였는데 보성소리의 개척자라 할 수 있고「서편제」의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답니다. 정응민은 부친 정궈진이 소리를 엄하게 금하여 재능을 키우지 못하다가 열다섯에야 부친의 수제자인 박기채에게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하였다고 하는데 1970년대에는「강산제 판소리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나 아쉽게도 59세에 별세하고 말았습니다. 보성하면 저에게는 소리보다. 차(茶)가 생각나는 곳이에요. 가파른 산을 계단식으로 하여 차나무를 심어 놓은 다원은 인상적입니다. 점심때에는 어느 다원 곁에서 쉬었는데, 찻잎을 따서 꼭꼭 씹어 봤어요. 가을이어서 찻잎은 모두 늙어 있었는데, 더러는 놀랍게도 차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기행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보성의 공원에 세워진「박유전 선생 기념비」와 보성 강산에 있는 생가의「강산제 판소리 예적비」였습니다. 박유전의 호는 강산(江山)인데 대원군이 그의 소리를 듣고는 ꡒ네가 제일강산이다ꡓ라고 극찬한데서 유래했다는군요. 그의 생가에 있는 판소리 예적비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어요. ꡐ듣노라 저 제일 강산 판소리 마디마디 애련하고 한 맺혀 처절한 감칠맛을 어이 한가하여 앞에 서서 듣는 고야. 계면조 소리모아 묻어 들어 번지는데 그 일 그 넋을 위하여 길이 빛날 소리 세우니 억겁(億劫)을 도 지나도록 내 소리 받아가라ꡑ 일요일에는 주로「서편제」의 예적비를 현장 답사 하였는데 오후가 되면서는「서편제」의 소리 한 대목을 들어 봤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몸이 피곤해 졌어요. 그런데 기행을 하는 동안 생각되어 지는 것은 그들의 대부분은 무덤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정도이고, 시대적으로 불우하게 살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소리 하는 사람들은 왜 소리를 끝까지 놓지 않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박유전 같은 이는 대원군에게 사랑은 받아 무과선달의 직첩을 받고 조수경(鳥水鏡)과 금 토시까지 받으며 명성을 날리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소리꾼들을 경제적으로 생활의 발판이 되어 주지 못하였고, 십수 년을 기약하고도 완성하기 어려운 공부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리를 하고 또 누군가가 그 뒤를 잇고, 오늘까지 맥을 이어오는 그것은 그 힘을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내하시는 분은 그 까닭을 엑스터시(ecstasy)즉, 탈혼(脫魂)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황홀경의 강렬한 경험은 소리판을 떠날 수 없게 하고 소리꾼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소리를 안 하고 서는 살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혼인지 모릅니다. 아마 그럴 거예요. 소리 속에서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들로 해서, 소리로 생을 풀어가는 사람들로 해서 판소리는 맥을 이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소리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변에 있었기 때문에도 이어져 왔겠지요.「동편제」와「서편제」의 사람들에게 저는 하나의 바람을 가져 봅니다. 그 계보 속에 용해되어 있는 소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귀한 소리 혼을 간직하여 청출어람으로 발전해 가기를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빛나는 문화가 되어주기를. 저는 판소리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하는 그들의 흐름이 어찌 되어 왔는지도 몰랐었고, 생각조차도 해보지 못하였는데, 이번 기행은 저에게 판소리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 될 성 싶습니다. 그처럼 아름다운 가을 하늘과 주변 풍경이 동행하여준, 하룻밤과 이틀 낮을 눈빛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은 좋았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생의 날줄과 씨줄에 정성을 다하는 직녀가 되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새벽이 다 되었어요. ꡐ시월의 밤은 대리석처럼 차갑다ꡑ고 차형이 읊었지요.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가 보니 밖의 공기가 그렇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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