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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 | [문화칼럼]
토착문화의 순정한 정신, 그 소중함
글/김흥수 국민대학교 교수 국문학과 (2004-02-03 12:05:01)
살기 좋아졌다고들 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긴 것인지 문화의 양태 또한 풍성하고 다채로워 보인다. 어지러우리만큼 많은 문화행사, 은행 한쪽의 아담한 전시공간, 지하철 벽의 그림과 시, 서점의 인파와 골목의 자동차 행렬, 컴퓨터와 비디오 등 문화영역이 넓어지고 빛깔이 새로워지면서 우리의 선택 폭도 더 커지고 감각도 더 섬세해진 성싶다. 전통문화나 민중문화의 기맥, 소재들도 꾸준히 생활 속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굿판에서의 장단이니 춤사위에도 익숙해졌고 동양 고전과 우리말 어원, 수지침에 대한 관심도 열기가 더해 간다. 이렇게 크게 벌어진 문화마당의 개방적이고 열띤 분위기는 그 숨 가빴던 민주화의 큰 흐름이 빚어낸 파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막히고 눌렸던 욕구와 감성이 분출되면서 자유를 맘껏 체험하고 자신의 존재를 한껏 표현하고자 하는 몸짓들이 뒤엉키고 어우러지게 된 것이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파생되는 부작용과 역기능 또한 민주화 과정의 한 체험이자 보상으로 여기고 민주화의 장정(長程)에 대한 믿음과 기대로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의 혼란과 무분별, 파문과 소란은 민주적 문화의 다음 단계를 위한 충격과 갈등이라고,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소화력과 갱신력(更新力)을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다. 과연 양적 팽창이나 겉모습의 현란함 속에서도 질적 변화는 꾸준하고 주체적 목소리도 조금씩 뚜렷해지고 있지 않은가. 이내 거품과 찌꺼기를 걷어내고 걸러내 제자리를 찾고 채울 것이라 기대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조심스런 낙관론으로도 마음은 편치 않다. 본질적이고 사상적인 문제에서 금기, 부자유, 고정관념이 여전하고 각계의 심층에는 구조적 비리와 폐습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러면 민주화는 아직도 표면적 국부에서 맴돌고 있을 뿐 근본적인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일까. 지금의 문화적 열기도 표면에서 일시적, 즉흥적으로 나타난 돌출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혹시 답보하는 민주화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나 과대 포장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더욱이, 계속되는 폭력, 환락, 패륜 앞에서는 말세적 증상을 개탄하며 문화의 절박한 위기와 한계상황을 역설하는 이들의 묵시적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뒤집히고 뒤틀린 형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냄새가 단순히 표면현상이 아니라 본질에서 소외되고 뿌리에서부터 병든 우리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은 아닌지, 같이 맞물려 정작 뒤바뀌어야 할 비문화적 독소들은 요지부동인 채, 지켜야 할 문화자산들은 쉬이 변질되고 뿌리 뽑히고 있는 것인지, 요즘의 문화 상황이야말로 거대한 장애에 부딪쳐 주춤거리는 민주화에 대한 적신호일지 모른다. 이제 불안한 기대와 회의가 엇갈리는 가운데 문화계를 지켜보면서 이미 고질이 된 몇 가지 문제를 특히 짚어 두고자 한다. 오늘의 문화는 문명에 길들여져서 물질적 충족과 실용적 편의를 미덕으로 삼는다. 문명 의 힘이나 물질적 풍요가 문화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고 명분을 세워 보지만 문화가 그들을 견제하기는커녕 그들에 지배되기 쉬운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더해 자본주의의 경제 윤리와 고도의 기법은 첨단의 문명을 동반자로 삼아 문화를 움직이고 사용하고자 한다. 정신적 가치와 창작물은 수량으로 확산되고 정보와 상품으로 변신하여 시장에 나온다. 문화의 생산과 유통은 팔리는 물건의 비법을 찾고 인기 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되고 대중매체는 소비자의 욕구를 부추기고 부풀리는 데 참여한다. 이로써 거대한 문화 시장이 형성되고 그 쉬임 없는 수요공급의 순환 속에서 작가는 대중의 소비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산자로, 우리는 단순 소비자로 전락할 처지에 놓인다. 언뜻 풍성하고 다양한 듯 보이지만 화려한 꾸밈과 기교적인 모방, 일회적 착상과 재치만 넘칠 뿐 참으로 깊은 공감과 깨우침을 자아내는 목소리, 독창적이고 고유한 세계는 만나기 어렵다. 이 즉물적인 시장경제의 논리 앞에서, 감각과 자극과 충격의 난무 속에서 정신문화는 그 존엄성과 가치를 지키고 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문화는 삶의 다양한 양태를 두루 다 포괄할 수 있다. 따라서 절대적이고 규범적인 잣대로 문화의 수준을 재기보다는 상대적인 질적 차이로 파악하는 것이 문화의 유연한 생리에 맞는다. 학문이나 예술이 특정 이념에 종속되거나 이끌리는 것, 고전과 전통의 기준으로 대중문화나 새로운 사조를 없이 여기는 것들을 경계함은 이와 관련된다. 특히 민주화, 자유화에 따라 각자의 삶과 개성을 내세워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고조되었고 이는 문화의 양적 증대와 다양한 빛깔을 낳은 셈이다. 그런데 문화의 가치중립성, 탈 이념성은 자칫 가치의 혼란과 전도(顚倒), 몰가치, 이념의 공백과 사고의 빈곤, 정신적 방황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불행하게도 지금의 문화는 그런 경향을 보이는 듯싶다. 순수보편성이니 세계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념편향을 감추고 미화하려 했던 이들이 떳떳하게 정체를 드러내는가 하면 이른바 신세대는 새로움과 자기다움 자체가 이념인양 자신감에 차 있고 온갖 가볍고 야릇한 몸짓들이 이념을 대처할 의식(儀式)처럼 성행하고 있다. 여기에 겉멋든 포스트모더니즘류의 이념해체 선언, 언론의 잡화나열식 홍보, 이념적 바탕과 지향이 희미해진 전통, 민중문화 ? 先? 대학과 정치권의 이념의 빈곤은 어떤가. 물질의 힘과 상업주의 밑에서 풍요 속의 결핍, 다양 속의 획일화는 더해 가고 정신적 이념들은 바래고 무력감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 진공과 혼돈의 시기야말로 이 세태를 바로잡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이념이 오히려 절실할 때가 아닌가. 경직되고 정치 지향적인 이념을 경계하면서 미래에 적응하고 대비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와 전망을 모색하고 세워나가는 일, 이를 위한 사상, 이념적 시각의 다양화, 논의의 개방과 대중화 생활화가 새롭게 시작될 시점이다. 문화에는 이성과 논리에 바탕을 둔 학문, 사색, 토론의 영역이 있는가 하면 감정과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예술, 심미, 공감의 영역이 있다. 두 영역은 서로 맞서고 밀어내기보다 넘나들고 조화와 균형을 이룸으로써 성숙한 문화를 가꾸어낸다. 우리의 경우 종종 인정에 이끌려 공적인 일을 이성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르치는 예도 있었는데 서구 합리주의의 영향 속에서 이제는 합리적 사고가 널리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한편 민족적 정서와 민중적 공감대는 무력이 이성을 침묵시킨 현대사의 가파른 고비에서 시련을 이겨내고 억압에 대항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한(恨)의 승화와 시민적 공? ㉯?응집력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과 문화를 돌아보면 곧잘 정서에 이끌려 이성의 영역이 흐려지기도 하고 정서가 의식을 압도하여 의식이 무디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 편향은 흔히 틀에 박힌 고정관념이나 논리의 결핍과 맞물린다. 학파. 유파간의 비생산적인 대립, 국수적 자기방어와 과장, 감정에 흐르는 편협한 지역애나 전통문화 예찬, 막연한 이성과 논리로 문화의 저력과 생산력을 기르는 데 장애가 된다. 반면에 토론문화가 자기과시나 소비적 논쟁의 장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의식의 미숙과 결함은 접어둔 채 메마르고 생경한 형식논리만을 고집하기도 한다. 이성과 감성의 행복한 결합, 논리의 육화, 감정의 의식화와 승화는 윤택하고 조화로운 문화의 조건이다. 우리는 사(私)적인 인연이나 공적인 명분과 목적에 따라 어떤 모임, 단체,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이들 모임은 문화의 비중 있는 단위로서 특히 학문, 예술, 이념 등을 지향하는 경우는 문화 창조와 전파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역사를 움직여 온 이론, 사조, 이념들이 순수한 뜻으로 모인 이들의 공동의 노력과 열정, 유대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보아 왔다. 그러나 이들 모임은 사사로운 인연이나 정서와 맞물려 자칫 공공성을 해치 는 분파, 파당, 이익단체, 사조직, 세력으로 변질 될 수 있다. 그때 그 구성원들은 독자적 주체됨보다 동아리의식에 사로잡혀 폐쇄적, 배타적, 획일적인 성향을 띤다. 몰개성과 전체성, 자기 방어적 공격성, 집단이기성 속에서 건강하고 성숙한 문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공동선(善)을 향한 서로서로 의식은 문화의 촉매, 끈끈한 끼리끼리 의식은 분열을 조장하는 사(私)문화임을 유념할 일이다. 이러한 문화의 심층의 고질들은 우리의 속성과 의식에 닿아 있기도 하지만 또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다. 우리 시대의 부끄럽지 않은 문화를 위하여 자기쇄신의 노력과 현실의 정체를 바로 보려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이때 토착문화의 순정(純正)한 정신과 지역현실을 든든한 기반이자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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