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0 | [문화와사람]
명고수 김 동 준 (1)
이쁜 소리 명창, 길 바꾼 고수
최동현․군산대교수․판소리 연구가
(2004-02-03 11:52:12)
판소리 용어에ꡐ일 고수 이 명창ꡑ이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ꡐ첫째가 고수요 둘째가 명창ꡑ이라는 뜻, 그러니까 고수가 명창보다 중요하고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정말로 고수의 역할이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라면 그에 걸맞는 사회적, 경제적 대우가 있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소리를 할 일이 있어 길을 가게 되면, 명창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도, 고수는 북을 짊어지고 걸어가야만 했다. 보수도 소리꾼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자료가 없어서 과거에 어찌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요즈음 고수들을 보면, 소리꾼과 고수가 비슷한 명성을 얻고 있을 경우, 소리꾼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보수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고수들의 불만이 쌓일 만도 하다. 말로는ꡐ일 고수 이 명창ꡑ이라고 하면서 현실은 그에 따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까ꡐ일 고수 이 명창ꡑ이라는 말은 혹 고수들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러고 보니, 본래 고수로 출발했다가도 소리꾼으로 전환하여 각고면려 끝에 명창이 된 사람들을 판소리사의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가왕 송흥록의 동생이었던 송광록, 모흥갑의 수행고수였던 주덕기, 광주 소리의 시조로 박만수의 고수노릇을 했던 이날치, 송만갑의 수행고수였던 남원의 김정문과 순창의 장판개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정확히는 20세기 접어들면서부터) 고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수를 명창의 부속물쯤으로 여기던 경향이 사라지고, 고수도 독자적인 예술가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수많은 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 곧 북장단을 예술의 경지까지 승화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근세 5명창 시대 이후에는 소리와 상관없이 북으로만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북으로 유명했던 한성준, 정원섭, 해방 후에 이름을 날린 이정업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마침내 처음부터 북만을 치거나, 판소리를 하다가 고수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더 이상 고수는 마지못해 하는 일이 아니라 일생을 걸고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요사이는 대학의 국악과에서 북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을 처음부터 선발하고 있다.
김동준은 판소리를 하다가 고수로 전환한 사람이다. 그것도 판소리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판소리 창자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 고수의 역할에 더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고수로 전환하여 대성한 사람이다. 김동준은 소리를 하던 시절에는ꡐ퍽 예쁘게 소리를 한다ꡑ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김연수를 따라다니며, 대개 김연수의 앞소리(김연수가 나오기 전에 하는 소리, 대개 기량이나 연배가 낮은 사람이 앞에 나오는 것이 소리판의 판례임)를 했는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내게 김동준이 한일섭의 북에 맞춰 적벽가를 완창한 테잎이 있는데, 요즈음의 소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겁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소리이다. 이 소리는 곧 음반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명창이 되었다가 길을 바꾸어 고수로 대성한 사람으로는 김동준이 아마도 유일무이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만큼 김동준은 자기 예술에 대한 자부심이나 실제 기량에 있어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김동준이 살아 있을 때는 소리꾼 치고 김동준을 고수로 모시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큰 상이 걸린 대회에 출전할 사람들은 김동준을 고수로 모시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만큼 김동준의 기량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김동준은 요청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골라 고수를 맡았고, 김동준이 북을 맡은 사람이 1등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김동준이 누구의 묵을 치느냐하는 것만 보아도 이번에는 누가 장원을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보수도 많았다. 큰 대회에 출전할 경우 김동준은 상당히 많은 고수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리꾼뿐만 아니라 청중들도 김동준이 고수를 맡기를 좋아했다. 김동준이 북을 치면 소리꾼이 마음 놓고 충분히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동준이 고수로서 펼쳐 보이는 기량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창자와 주고받는 능숙한 재담이나, 소리에 어울리게 쳐내는 멋진 북가락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냥 저절로 추임새가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김동준은 1928년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외아리에서 출생하였다. 화순은 예부터 명창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공창식, 공기남, 조몽실, 성우향, 박초선, 박송이, 김일구 등이 화순 출신인 것을 보면, 화순 지방의 판소리 전통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공창식 공기남으로 이어지는 공씨집안의 판소리 전통은 유명하였다.
화순이 판소리 전통이 강한 곳이었으니, 김동준도 자연히 판소리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김동준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해서, 소리를 해보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곤 했다 한다. 그래서 소리를 해볼까 하고 맨 처음 만난 소리 선생이 장판개였다. 장판개는 송만갑의 제자로, 본래 고수를 하다가 명창이 된 만큼 후에 김동준이 고수로 대성하는 데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김동준이 장판개에게 배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장판개는 1937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에게 배웠다는 김동준이나 전라북도 문화재 성운선의 증언에 의하면 그보다 훨씬 오래 산 듯하다. 이는 앞으로 확인이 요구된다.) 김동준이 본격적으로 판소리 수업을 쌓은 것은 박동실을 만난 뒤였다. 박동실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를 대표하는 소리꾼으로, 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로 이어지는 이른바 광주소리의 대표적인 전승자였다. 박동실은 성대가 나빠 공연은 별로 하지 않았으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대가로서 주로 작곡과 교육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박동실의 음반은 최근에 한 장이 발견되었으나, 상태가 너무 나빠 구체적인 소리 기량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박동실이 만든 것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열사가」이다. 1993년에 이성근과 정순임에 의해 복원되어 음반으로도 제작된 바 있는 이 소리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한 이준,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과 이순신의 전기를 노래한 것인데,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널리 애창되었던 소리였다. 또 박동실은 담양군 창평면 지곡리에서 담양의 부호 박석기의 후원을 받아 소리꾼을 교육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박동실은 8.25 직후 그를 추종하던 소리꾼들과 함께 월북을 하여 그곳에서 인민배우까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동준은 박동실을 통해 이른바 광주소리로 알려진 정통 서편소리를 배운 것이다. 김동준의 초기 판소리 수업은 이렇게 해서 대체로 20대 초반에 가닥이 잡힌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