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0 | [서평]
무명의 동학군에 대한 애정 어린 진혼곡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1994, 이병천 지음, 문학동네)
글/임명진 문학평론가, 전북대 교수 국문과
(2004-02-03 11:41:28)
좋은, 정말 좋~은 소설을 만나면 늘상 저는 큰 반가움과 더불어 또 그만한 곤혹스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ꡐ좋은ꡑ 작품에 반가워하는 거야 다연지사다 치고, 그 앞에서 곤혹스러워 한다는 것은, 문학평론가라는 꼬리를 달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무래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여 저 스스로 의아해 할 때도 있습니다.
예의 ꡐ곤혹스러움ꡑ은, 이 글의 독자 여러분들로서는 알고 보니 싱겁기 짝이 없다고 웃으실지 모르지만, 이러한 좋은 소설에서 작가가 그러한 것처럼, 나도 평론이라는 틀 안에서 말을 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럴만한 자신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부터 ꡐ그러면 무슨 말을 어떻게 얘기해야 이 작품의 말에 걸맞는 평론이 될 수 있을까?ꡑ 하는 곤혹스러움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병천씨의 신작 『마지막 조선검은명기』(문학동네,1994)는, 독자들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있듯이, 저로 하여금 기쁨/반가움과 두려움/곤혹스러움을 함께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우선 말을 다루는 그의 탁월성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단편집 『사냥』과 『모래내 모래톱』에서도 언어의 조련사(정녕 언어라는 것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따라서 흉악해질 수도 있고, 섬세한 부드러움을 지닐 수도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다루는 사람은 서커스단의 조련사와도 같은 터이므로)로서 솜씨를 발휘한 바 있습니다만, 금번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에 이르러 그 능숙함이 이제 어느 상당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 작품 도처에는 질박하면서도 순수한 속담과 옛말과 방언이 즐비하게 산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도의 어느 들녘 또는 지리산 어느 계곡에서도 쉽게 만나는 들꽃이나 미나리처럼 말입니다. 조금도 꾸밈이 없으면서도 아름답고, 또 알싸하거나 그윽하거나 하는 그 나름의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는 이름모를 야생화를 대하는 것이 즐겁듯이, 우리의 옛스런 말과 방언을 대하는 것 또한 이 작품을 일는 적잖은 즐거움이기도 할 터입니다. 금싸라기 같은 우리의 속담과 방언과 옛말을 대하다 보면, 아연 이 작가가 혹시 차츰 사라져가는 우리말의 질박한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이 작품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도록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 『마지막 조선검…』이 혹시 ꡐ마지막 조선 속담ꡑ, ꡐ마지막 조선 방언ꡑ내지는ꡐ마지막 조선 옛말ꡑ이라는 제목으로 둔갑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작품의 언어적 매력은 단순히 속담이나 방언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상황에 어울리는 비유, 인물의 성격을 생동감 있도록 하는 대화, 옛 풍속과 관련된 민속 어휘, 가끔 선보이는 고풍스런 화자의 지문 등도 이 작가의 탁월한 언어구사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훨씬 짧아진 문장은 작품 전체에 역동적인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게다가 훨씬 짧아진 문장은 작품 전체에 역동적인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전 작품에서 조금 변화된 특징으로서 이 작가의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새로운 면모가 보여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암튼 이 모든 것들이 뭉뚱그려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데는 작가의 예민한 문체 감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언어적 매력은 이 작품의 형식적 틀을 굳게 잡아주는 미덕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장편 대하소설이 자칫 빠질 수 있는 플롯의 허점을 충분히 보완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매력을 옛스런 풍속이나 일화를 군데군데에 끼어 넣어 작품을 기름지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ꡐ문경피천ꡑ이라는 점괘에 대한 설명, 청냉포에서 죽은 단종의 일화, 파자(破字)와 조광조의 죽음과의 관련 얘기, 간악한 아전 최치봉의 일화, 홍상궁이 민비대신 죽은 이야기, 주막거리에 살구나무 심은 까닭, 선운사 검단선사의 비결 얘기, 새 칼에 대하여 치르는 의식 절차, 간장과 막야의 명검에 얽힌 일화, 이용익의 빠른 걸음에 관한 일화, 보부상 패랭이에 목화솜을 달게 된 유래, 김개남이 마당에서 부인에게 큰절한일, 김인배 처의 남편 제삿날 정하기, 소가죽을 이용하여 밥하는 방식, 나주가 목(牧)에서 현(縣)으로 강등된 사연, 최대웅으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도록 한 기축사건의 전말 등의 삽화가 이 작품 전편에 고루 깔려 있는 바, 이는 이 작품의 짜임에 있어 독특한 구실을 맡는 것으로 보입니다.
얼핏 보면 이러한 삽화들은 이 작품의 플롯 전개에 있어 그다지 필요 없는 군더더기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플롯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서구에서 들어온 내로라하는 플롯 이론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 전통에서 본다면 이런 식의 삽화는 매우 자연스럽게 있어왔던 것일 터입니다. 상당수의 고소설이 그렇고, 판소리의 사설이 그렇고, 우리 소설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홍명희의 『임꺽정』이 그러하니 말입니다.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예술인 판소리에서 대목 대목이 삽화로서 확장되어 있다든지, 조선 말과 풍속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임꺽정』에서 갖가지 전래적인 풍속이나 민담이 삽화로 끼어 있다든지 한 것은, 아무렇게나 생겨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오랜 이야기 전통의 결과일 테니까요.
약 한 세기 전만해도 봉놋방이나 저자거리에서 이야기를 팔면서 살아가는 강담사(講談士)니 전기수(傳奇搜)니 하는 전문적인 이야기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레파토리를 살찌게 하기 위하여 가급적 많은 삽화를 끌어다 덧붙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의 발로이기 이전에 우리 청중들에게도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를 듣는 대중이 오랜 세월 동안 선택해온 자연스러운 방식인 셈입니다.
현대판 전문적인 이야기꾼이라 할 수 있는 소설가들이 이러한 이야기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터입니다. 아니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요? 오히려 그간 우리 소설가들이 근대 이후에 생겨난 서구의 이야기 방식에 너무나 함몰되어 있었다는 자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각이 가만히 앉아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임꺽정』과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를 함께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는 앞에서 말한 언어 형식에, 즉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는 물론이고 이야기 자체에도 그 나름의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재미있게 읽히는 까닭은 아무래도 이야기를 이루는 중요한 두 축, 즉 인물들의 매력적인 성격과 그 성격을 뒷받침하고 있는 파란만장한 사건의 전개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인공 은명기는 개성이 강한 구식군 출신의 마지막 조선 검객으로서 스러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대변하는 전형성을 띰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가 이미 ꡐ임오군란ꡑ, ꡐ동학농민전쟁ꡑ이라는 소용돌이를 거쳐 왔고, 앞으로 항일 의병 투쟁의 현장으로 내달아 갈 것이 암시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전형성을 충분합니다.
그러나 은명기는 이러한 전형성의 테두리 안에 안존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조선검객의 협기와 자존심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써 인간적 매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대의명분을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던지는 또는 검객으로서 치열하게 달인의 경지를 추구하는, 그러면서도 타인에게는 부드러우면서도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한 그에게서 우리는 외경에 가까운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대의보다는 실리에 쉽사리 휩쓸리는, 또는 휩쓸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오늘의 우리들은 그의 의연하고 늠름한 모습 앞에서 더더욱 왜소해짐을 느낄 수밖에 없을 터입니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이러한 공통성 내에서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특히 박시철과 최대웅과 밭산네는 천민 출신이면서도 인간적인 의리에 헌신적으로 순사하는/순사하고자 하는 점에서 인간적 매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또한 그들은 걸찍한 육담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점에서도 개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듯 이 소설의 인물들은 협기나 절박함이나 천진성을 지님으로써 각기 생동감 있게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벌이는 사건은 늘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역동적으로 전개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서 새로운 인물들의 만남은 대체로 한껏 당겨놓은 활시위 같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은 대체로 이른바 ꡐ바다 같은 사나이 은명기ꡑ의 박람강기(박람강기)한 의협심으로 용해되면서 또 다른 긴장을 예비하기 위한 이완의 상태에 이르곤 합니다. 무릇 우리의 삶이 긴장과 이완의 반복일진대, 소설의 사건으로서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전장에 내던져진 그들의 삶으로서야…
이제, 이 작품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나미 대장은 당시 조선을 노리는 외세를 대변할만하고, 그래서 그가 이끄는 군사력은 당시 우리 농민들의 죽창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의 야욕을 포상할 만합니다. 그래서 조선의 무인들을 골라 오이따와 대결토록 하고 그걸 지켜보며 은밀한 쾌감을 만끽하는 그의 잔악상은,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력을 확인하면서 쾌재를 올리는 일본정한론자의 그것에 비견할 만합니다. 또 토포사나 고부군수나 나주목사는 외세의 개입을 가능케 하고 그 개입을 합리화시켜준 당시 도탄에 빠진 조정을 대변할 만합니다. 한편으로 은명기는 구식군 출신이라는 점에서 조선 역사의 정통성의 뿌리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관군 신분의 신일균이 차츰 은명기에 매료되어 가는 것이라든지, 천민 박시철, 최대웅이 그를 추종하고, 당시 지도적 인물 손화중, 이사경이 그를 신임하는 것 등은 그 역사적 정통성을 더욱 정당화시켜 주는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은명기의 조선검은 그 역사적 정통성을 집약적으로 표상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은명기의 검에 대한 작가의 배려가 얼마나 세심한가를 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 따라서 그가 ꡐ지고한 조선검의 소명을ꡑ 다하고자 하는 것은 그 정통성을 조금이라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지고의 노력에 다름 아닐 터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오이따의 일본도를 물리치는데서 어떤 치열한 정점에 이른 듯합니다. 이 정점을 넘어선 다음에는 그 노력이 어떻게 전개될지 자못 궁금하지만 말입니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의 화두는 그 정통성을 가급적 훼손시키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역사의 반석위에 안존하게 자리 잡게 하느냐에 있을 터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화두와 함께 이 소설은 우리 독자들에게 오늘의 상황에서 정확하게 ꡐ동학농민전쟁ꡑ의 들불이 이 땅 전라도에서 번진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의 상황에서 동해를 ꡐ일본해ꡑ운운하는 요즘의 상황에서 우리 주변을 냉정하게 되돌이켜 볼 것을 은연중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 년 전의 외세의 그림자는 아직도 드리워져 있는 셈입니다. 역사 저편에 안존해 있는 그 정통성을 오늘 우리가 새로이 정당화시켜 나갈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 이병천씨는 백년 저편의 역사의 언저리를 때로는 숨 가쁘게 달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유유자적 노닐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얘기는 어쩌다가는 폭포수처럼 급박하게 쏟아져 나오기도 하며, 또 어쩌다가는 강물 속의 흐름처럼 웅숭깊게 흐르기도 합니다. 진양조로 한껏 여유를 부리다 휘모리로 ꡐ서대면서ꡑ엮어 나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술화자로 개입하여 친절한 아니리로 차분하게 그 완급을 조정하면서도 때로는 엇박자로 그 조정에 파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ꡐ장단ꡑ의 조정은, 이야기 자체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담론의 조화로운 해조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을 터입니다. 이 양자의 어울림, 이 양자의 ꡐ짱짜란한ꡑ조화, 이것이 이 『마지막 조선검』의 미덕이라고 이제 저는 ꡐ기쁘게/곤혹스럽게ꡑ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미덕은 이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저는 문학평론가라는 꼬리를 달고 있는 이상 감히 또 ꡐ기쁘게/곤혹스럽게ꡑ 말하건대, 우리들은 이 작품을 통해, ꡐ조선검ꡑ으로 표상된 조선의 역사적 정통성을 죽음을 무릅쓰고 지키려는 당시의 상민 천민들의 눈물겨운 분투를 이제 한 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바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스러져간 그 전통성이 이 작품으로 해서 다시 역사의 햇빛을 쐴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이제 저는 예의 ꡐ곤혹스러움ꡑ을 떨치는 기분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작가 이병천씨의 그 찬찬하면서도 애정 어린 발굴 작업에 박수를 보내면서, 아울러, 원하건대, 이 작품이 백 년 전 이 땅 전라도의 어느 밭고랑, 어느 산비탈에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동학군들의 넋을 위무하는 진혼곡이 되어 이 땅 전라도의 어느 밭고랑, 어느 산비탈까지 퍼져 나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