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9 | [특집]
ꡒ쌀,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ꡓ
-94대학생 농촌활동, 그 현장을 찾아서-
원도연 편집장(2004-02-03 11:09:46)
ꡒ그동안 내가 무엇을 얼마나 배웠을까 ? 언젠가 선배언니가 농활을 한번이라도 다녀간 사람을 전대 함부로는 못산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정말 맞다. 고추밭에 줄 하나 대는 것도 허리가 아프고 배추 한포기 파 한 뿌리에도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이번 농활에서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얻어간다. 농민들의 수고와 먹을거리의 소중함을 알았고, 사랑하는 농한대 사람들을 얻었고 사람들의 정을 느꼈으니…ꡓ
<술익는 조개미농활단 1학년-농활신문에서>
ꡒ참 무리한 부탁일수도 있겠는데요. 작년에도 문제가 되고 마찰이 되었던 새참문제에 대해서 당부드리겠습니다… 똥을 옆에 두고는 밥을 먹어도 사람을 옆에 두고는 밥을 먹지 못하신다는 어른들의 말씀이지만 저희들은 절대 새참을 받지 않겠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ꡓ
<정월리 농활단 농활신문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대학생 농활단이 농촌활동을 떠났다. 6월29일부터 7월7일까지 8박9일의 결코 만만치 않은 일정으로 도내 14개 대학에서 약 3천여 명의 대학생들이 전라북도내 7개 군의 곳곳을 찾아 나섰다. 그 3천명의 학생들 가운데 약 40%가 1학년학생들이었다. 요즘 같은 학생운동 불황기(?)에 3천여 명의 대학생들이 움직였다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더 놀라운 일은 농촌활동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8박9일이라는 일정을 무척 짧게 느꼈고 또 내년 농활에 다시 오마고 하는 다짐들이었다.
도내3천명의 대학생이 농촌으로
대학생들의 이번 농활은 크게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진행되었다. 첫째는 힘들고 고된 농사일을 직접 체험하고 그를 통해 단결하여 우리 것의 소중함을 배운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의 목표는 농촌의 현실을 가까이서 겪어보면서 UR재협상과 국회비준반대운동을 농민들에게 선전하고 함께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활을 마치고 나온 그들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선전당 한쪽은 농민들이 아니라 대학생들인 듯 했다. 고된 노동을 통해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UR의 문제를 이제 ꡐ우리ꡑ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고,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신념과 주장을 갖게 되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농촌활동기간동안 대학생들이 특별히 누군가로부터 교육받고 의식화된 것은 아니다. 농활기간동안 대학생들의 하루는 끊임없는 노동의 연속이었다. 5시에 일어나 7시부터 12시 반까지 오전일을 하고 다시 2시 반부터 7시까지 오후일, 8시부터 늦은 12시까지의 시간은 하루일에 대한 평가와 내일일에 대한 준비, 그리고 각종 분반활동과 편지쓰기 등등. 이것이 농활대의 하루 공식일과였다. 피사리를 하고 논두렁을 베고 과수원의 풀을 베고 담배를 묶고 수박밭을 가꾸고 그들이 하는 일들은 각자 달랐지만 그들이 느끼고 배워온 것들은 같은 것들이었다. 그들의 표현을 빌면 ꡐ농활은 사람을 단련시키는 용광로이자,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공간ꡑ이기도 했다. 농활은 더 이상 추억거리가 아니라 원칙을 가지고 수행해야 하는 활동이었다. 농활은 실제로 대학생들을 단련시켰고 그들 삶의 자세를 변화시켰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새참, 뜨거운 감자
적어도 이제 대학생 농활을 일부 운동권 학생들의 연례행사로 보아왔던 분별없는 기성세대의 생각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농활은 충분히 그 존재이유가 있고 그 무엇보다도 대학생들의 건강성을 지켜주는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만하다. 그들이 말하는 새참투쟁(?)은 정말 판단하기 난감한 문제였다. 이름도 생소한 새참투쟁이란 농활단이 현장에서 농민들이 준비해오는 새참을 절대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작년에 처음 시작되어 여름농활의 가장 큰 화제거리가 되었던 새참논쟁이 올해도 가장 난감하고 어려운 문제였다고 한다. 농활단의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 농활단이 농민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민중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신념화하는 과정을 그들은 새참을 사양한다는 색다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거창하게도 사상적 관점을 세우는 일이라고 정의했고, 그래서 이번 농활을 사상농활이라고도 불렀다.
수박밭에서 일하던 농활단은 깨져서 못팔게 된 수박을 새참으로 먹어야 할 것이냐 먹지 말아야 할 것이냐를 놓고 토론을 했고, 길가는 할아버지가 내미는 음료수캔 하나를 받아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를 놓고 또 토론을 했다. 새참을 내온 농민들에게 제발 거두어주시라고 애원하기도 했고 싸우기도 했지만 새참문제는 실제로 농활현장에서의 갈등요인이 되었다. 대부분의 농활참가자들이 가장 커다란 어려움으로 꼽았던 문제였지만 그들이 사상(?)은 확고했다. 요컨대 수박밭에서 깨진 수박을 먹게 되더라고 그것이 어차피 버려질 것이니까 하는 마음으로가 아니라 무엇이 농민들에게 소중한 것이냐를 깨닫고자 하는 기특한 마음이 그 새참논쟁에 배어있다.
그들에게 우리의 내일이 있다.
이른바 신세대가 운위되고 대학생들의 문화에 기성세대가 조바심칠 때 그들을 그렇듯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농활을 다녀왔다. 그들이 목표했던 또 하나의 과제는 농민회를 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각 마을에서 농민회활동을 하고 있는 농민들의 위신을 세워 그들이 마을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일할 수 있도록 농활대가 돕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농활대는 한 눈 팔 수 없었고 일하는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가장 열심히 사는 농민과 농민회를 일치시키는 것이 농민회를 강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농민 운동에 대한 대학생들의 식견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대학생 농활대의 건강성을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뚱띵이 농활대, 토방농활대, 깔다구 농활단, 황토바람 농활대, 마당쇠 농활대, 녹동이 농활단, 녹두농활대, 갯땅농활대, 달구지 농활대, 조개미 농활대, 새세대농활단, 쌈닭농활대… 각 농활대의 이름에는 농민들과 더 가까이 가고자하는 그들의 발랄함과 열정이 녹아 있었고, 우리말에 대한 그들대로의 애정이 담긴 것이었다.
대학생 농활에 대하나 농촌의 인식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대학생농활을 경계하고 또는 적극적으로 막아왔던 당국의 태도가 이전보다 훨씬 유화적으로 변했고, 늘 막는 일에 앞장서왔던 동네 이장들의 태도변화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다. 많은 지역에서 동네 이장들이 학생들의 활동에 가장 호의적이었고 때로 있을 수 있는 의혹의 눈초리들을 앞장서 막아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에서는 막고 강행하는 구태들도 재현되었다. 완주군 밀파리에 들어갔던 농활대는 철거 예정된 학교관사를 농활숙소로 쓰려고 이미 사전준비까지 다했지만 막상 당일에 가서 학교 측의 태도변화로 큰 곤란을 겪어야 했다. 농활에 대한 농촌의 한 가닥 불안이 한켠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농활대학생들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동력이 대학생들의 화려한 언변이나 세련됨이 아니라 8박9일 동안 원칙을 지켜가면서 죽어라고 일했던 노동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농활의 마지막 날 마을잔치는 대학생들과 마을주민 모두에게 가장 큰 잔치가 되었다. 마을잔치는 대학생들과 농민들이 어우러져 우리만의 문화를 찾는 소중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다음은 한 농활단의 마을잔치 체험기의 한 대목이다.. 풍물이 한 몫을 한 것은 마을잔치때였다. 예전의 마을 잔치는 오디오기를 설치하여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뽕짝을 부르며 아줌마와 춤을 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번 마을 잔치 때는 학생들이 치는 풍물소리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마을 회관에서 잠자고 있던 악기와 잊혀져 있던 마을 어른들의 솜씨가 어우러져 큰 판을 이루었다. 오랜만에 악기를 잡은 어른들끼리 장단을 맞추며 치는 모습에서 옛날 우리 조상들의 모습은 저랬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서로에게 호흡을 맞추며 하나 되는 모습. 이것은 진정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한 모습인 것이다. 다시 학생들이 풍물을 잡고 어른들은 막걸리를 한 잔 하면 쉬고, 한쪽에서는 3일밖에 안 배운 솜씨로 어른에게 장단을 가르쳐주고 있었다…ꡓ
농민에게 희망을 농활대에게 자신감을
마을잔치가 끝나면서 대학생농활은 이제 마무리된다. ꡐ농민들의 패배의식에 희망을, 농활대에게 자신감을ꡑ이라는 그들의 목표가 거의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눈에 비친 농촌도 한편에서는 서서히 변화해가고 있다. 농촌의 훈훈한 인심과 여유를 기대했다는 한 1학년 농활대는 막상 농촌이 그다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UR문제에 대해서 학생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ꡐ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ꡑ는 체념과 패배의식에 할 말을 잃었다는 농활대도 있었다. UR에 대한 농활대의 주장은 UR재협상과 국회비준거부에 맞추어져 있었다. ꡒ쌀수입개방은 물 건너간 것이 아니며 UR버스는 아직 떠나지 않았습니다ꡓ. 라는 것이 농활대의 구호였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뿌리 깊은 불신과 좌절을 이겨내기에는 대학생들의 노력만으로는 너무나 역부족인 듯 느껴졌다.
정부와 제도언론이 한국의 대학생 집단 전체를 좌경용공으로 몰아붙이고 큼직한 공안사건들을 터뜨리면서 이른바 신공안정국으로 몰아가고 남총련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며 마치 학생운동을 끝장낼 것처럼 총공세를 펴던 그 엄혹한 시기에 대학생들은 농활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대학생들은 민족의 미래를 몸으로 느끼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뜨고 있었다. 전북대학교 신방과 1학년의 한 학생은 농활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ꡒ여름농활이 있었기에 올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따뜻한 배려와 친자식 같은 정속에서 많은 것 배우고 돌아갑니다. 쌀!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ꡓ <원도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