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9 | [문화저널]
엄마는 여자가 아니다?
여성문학연구모임
(2004-02-03 11:03:35)
며칠 전 한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지방에 직장을 가지고 있는 남편과 다섯 살 난 아들, 그리고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직장에 나가는 친구는 친정어머니의 도움으로 직장생활과 육아를 별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아이는 낮 동안의 엄마의 부재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아이는 엄마도 밖에 나가 일을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때문에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면서 고통 받고 있던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 그러던 친구가 그 날은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할머니와 생활을 해서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매사에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걱정한 친구는 아이를 동네 유치원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가 엄마가 출근하려고 하면 신경질을 부리며, 엄마는 집에서 맛있는 것을 만드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사람인데 왜 나가냐며 투정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물어보니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친구는 몹시 당황해하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아교육 프로그램에 어머니의 역할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궁금해졌다.
나의 친구처럼 유아교육 기관에 아이를 맡긴 것을 후회하는 사람도 간혹 있기는 하겠지만, 유아교육기관의 사회적 필요성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증가하고 있고, 또 자아실현의 측면을 떠나서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 직장에 나가는 엄마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와 발을 맞추어 유아 위탁교육기관도 증가하고 있다. 아가방, 유아원, 유치원 등. 유아교육기관의 일차적인 의의는 아이들이란 집에서 엄마에 의해 키워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공동체 속에서 사회화 되어야 할 필요성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집안에서 엄마와 놀며 자란 아이와 유아교육기관에서 위탁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사회적응력, 상황 판단력, 자기표현력 등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수요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고 또한 경제적 부담 때문에 위탁교육기관에 맡기지 못하는 엄마들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정부보조의 교육기관의 증가가 요청되고 또 절실히 필요한 형편이다.
그러나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위에 제시한 경우와 같이 유아교육기관이 성차별의 재생산 역할을 담당한다면, 여성, 즉 직장여성 혹은 전업주부들은 또 다른 족쇄를 차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교부 제정 「유아교육지도자료집」을 텍스트로 하여 현행 유아교육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성역할 교육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몰론 유아교육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협동심, 독립심을 길러주고, 사회 제반 문제들을 아이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여러 전문가들의 노력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유아교육 프로그램을 검토하면서 느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문제점은 여자와 엄마는 각기 다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아들은 나와 엄마, 아빠의 세계에서 사회로 던져지면 자신들의 다름, 즉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의 다름과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들과의 다름에 가장 큰 혼란을 겪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를 이해시키기 위해 유아교육프로그램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ꡐ모든 사람은 성별을 갖게 됨을 인식시키고, 성역할의 차이점 및 공통점을 알게 한다ꡑ라는 목표 아래 성역할 교육이 진행되고, 나아가 신체적 차이가 성역할의 우열을 규정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그에 따라 여자 아이도 자라서 의사, 선생님, 아나운서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할 수 있고, 남자아이도 또한 여자와 같이 의사, 선생님 등의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교육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아교육은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인 차이가 있을 뿐 동등하다고 역설하면서도 여자와 엄마는 일치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유아교육프로그램에서 ꡐ엄마ꡑ와 ꡐ아빠ꡑ는 전형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 먼저 동요를 살펴보면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이라는 동요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ꡐ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될까/아빠처럼 넥타이 메고 있을까/엄마처럼 행주치마 입고 있을까… 「심부름」이라는 동요에는 ꡐ엄마는 콩나물, 아빠는 수건, 엄마 아빠 심부름합시다…ꡑ 등등. ꡐ점심상을 차려도/먹을 사람 없는데/분이는/엄마/눈 큰 인형 아기 업고/바쁘기만 하지요ꡑ(「엄마가 되어」-동시). 또 동화에서도 엄마는 아기를 돌보고 아이와 놀아주는 사람, 그리고 집안에서 살림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따뜻한 엄마의 손」,「할 일을 바꾼 할아버지」등)
동요나 동시, 동화에서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 영역에서도 엄마의 전형화를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라이터, 앞치마, 자동차, 요리기구 등을 늘어놓고 엄마가 쓰는 물건 아빠가 쓰는 물건을 고르게 한다든지, 엄마가 하시는 일-요리, 청소, 빨래 등-아빠가 하시는 일-운전, 회사 등-을 이야기하게 하는 것 등이 바로 그렇다. 이 외에도 엄마나 아빠의 모습을 집 안과 집 밖으로 전형화 시킨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엄마 혹은 아빠의 전형화는 여자의 역할 교육과 모순 된다. 즉 여자의 역할은 남자와 동등하지만 엄마의 역할은 남자와 차별을 두고 제시되어 진다. 그렇다면 엄마는 여자가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물론 이런 것들이 단순하게 아이들에게 여자의 역할과 남자의 역할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유아들에게 엄마를 이해시키고, 가족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보편화된 현상을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유아교육 이론에서 아무리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 차이만 있을 뿐 동등하며, 모두 사회의 한 일꾼으로 자라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부르는 노래 속에, 그리고 자신들의 놀이영역에 내재한 이러한 전형화된 여자 = 엄마의 모습, 혹은 아빠의 모습이 제시된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엄마의 전형 혹은 아빠의 전형을 만들고 현실세계 속에서 접하는 엄마의 다른 모습(즉 일하는 엄마)에서 많은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은 필연적 결과이다. 이것을 세뇌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결국 일하는 엄마, 공부하는 엄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아이들도 권위를 갖고 있는 책. 대중매체, 선생님의 입을 통해 제시된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을 바람직한 정격 엄마, KS마크가 찍힌 엄마로 내면화하게 된다.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가 사회인으로서의 엄마를 구속하는 또 하나의 굴레로서 작용하게 된다. TV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직장여성의 문제(즉 아내의 직장생활을 마지못해 봐주던 남편이 아이의 이런 투정을 빌미로 아내에게 전업주부를 강요한다)는 허구만은 아닐 것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와 같이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이끌어 나갈 미래 사회의 모습이다. 집 안에서 일하는 엄마, 아빠보다 작고 약하며 의존적인 엄마의 모습을 배운 아이들은 스스로의 성에 대해서도 남자=아빠=사회활동=권위적/여자=엄마=전업주부=순종적으로 규정짓고, 성역할을 자연스럽게 재생산하게 된다. 그렇다면 유아교육기관이 성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우리의 판단이 공허하거나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는 변하고 있다. 여자도 변하고 남자도 변한다 .엄마의 역할과 아빠의 역할도 변화되고 있다.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자라나게 될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좀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만이 아이들을 위하고 더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작은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