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9 | [서평]
텍스트 속에서 길 찾기
『화두』(최인훈.민음사.1994)
글/정철성 전북대 강사 편집위원
(2004-02-03 11:01:27)
내장산 건너 백양사에 들어가려고 쌍계루를 지나 극락교를 건너 왼쪽으로 돌아서면 ꡐ이뭣고ꡑ하고 비석이 눈앞을 가로막는다.ꡐ이 무엇인고ꡑ라는 말이 바로 이천개가 넘는다는 화두의 하나이다. 화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수행자가 품는 뜻 없는 물음이다. 그렇지만 이런 정의가『화두』를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 화두의 묘한 구석이다. 화두(화두)라는 말머리를 치켜드는 사람은 문제의 해결불가능이 명백한 상황에서 문제해결을 회피할 수 없는 절박함 때문에 그렇게 한다. 사람의 일이 어렵지 않은 것이 없지만 화두를 드는 일만큼 힘드는 일이 없다고 하는 까닭은 처음 화두를 잡는 뜻이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화두』는 자전적 소설이다. 자서전과 자전적 소설을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같다. 자서전에서는 심각하게 소설에서는 재미있게 왜곡시킬 뿐이다. 보통의 자전적 소설은 어린시절을 재구성하여 작가자신의 성장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쓰여진다.『화두』에도 어린시절 최초의 기억 몇 개를 떠올리는 부분이 있지만 중요한 동기는 W시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의 경험이다. 최인훈이 서술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처음은 해방 후 북한 W시의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읽은 조명희의『낙동강』이다. 소설이 다른 소설을 인용하는 것이 특이하게 보이지 않는 시대이지만 다른 소설의 첫머리를 그대로 첫머리에 베껴놓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ꡒ낙동강 칠백리,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 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ꡓ 이것이『낙동강』의 시작이고 또『화두』의 시작이다. 『화두』의 시작은 이 작품이 텍스트의 범주 안에서 문제를 서술할 뿐 현실의 역사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인훈의『화두』는 작가 최인훈의 문학적 화두이다. 그는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 독자에게 제기한다. 오래전에 우리는 『광장』을 읽었다. 그리고 고쳐 쓴 『광장』을 또 읽었다. 비참하지 않은 전쟁은 없다. 그런 전쟁의 결과만을 그린 소설이 대부분이던 시절 『광장』은 전쟁의 인과관계를 포괄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 충격을 그가 광장과 밀실을 오가며 이명준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결국 벵갈만의 바다위에서 포기해 버렸을 때의 서운함과 함께 아직도 남아있다. 이명준이 이제 ꡐ나ꡑ라는 화자로『화두』에 등장한다. 최인훈은 적어도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비켜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 대하여 솔직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명시하고 그것의 한계를 묘사하려고 노력한다.
독서의 재미를 즐기는 독자에게 『화두』는 몇 가지 흥미 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화두』]는 구조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두』1부는 북한과 미국을, 2부는 남한과 소련을 배경으로 한다. 각각의 배경은 도시의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북한이 W시와 H읍으로-왜 원산과 회령임이 분명한 두 도시는 알파벳으로 표기될까? 갈 수 없음을 강조하는 낯설게하기의 수법으로 보는 것은 뒤에 등장하는 K대학과 P씨라는 이름의 익명성을 해결하지 못하여 불만이다-나타나는 것처럼, 남한은 서울과 의정부로 등장한다. 미국이 뉴욕을 중심으로 아이오와, 버지니아, 콜로라도 등의 모습으로 그려지면 러시아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로 압축된다. 미국과 남한을 다룬 분량이 북한과 러시아 부분을 압도하는 것은 자본주의 일변도로 세계가 재편되는 현실과 유사하다. 또 서술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어울리는 분배이다. 작품의 ꡐ나ꡑ는 북에서 탈출하여 이후 서울에 살고 있다. 그는 미국에 세 번에 걸쳐 상당기간 거주하지만 러시아에는 관광차 잠시 다녀온다. 처음과 끝에 배치한 북한과 러시아는 사회주의의 양극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술자는 북한이 해방 후 시도한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을 강요된 자아비판이라는 서술자 자신의 경험 속에서 완곡하게 비판한다. 또 그는 소련 붕괴의 과정을 더듬는 여정을 통하여 현실사회주의의 모순점도 지적한다. 그러나 서술자는 미국에 대하여도 같은 거리를 유지한다. 독자는 그가 그리는 미국은 누구에게나 풍요로운 땅이 아니다. 그는 미국을 로마제국에 비유하면서 자신을 어느 속령의 노예철학자에 비유한다. 그가 남한사회를 식민지로 보는 것이 수사학적 비유 이상의 철학적 근거를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미관계에 대한 진단으로서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자본론』을 미국에 와서야 영역본으로 읽게 된 뒤집힌 현실의 상황을 가감 없이 지적한다.
필자가『화두』를 네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이해의 수단일 뿐이다. 각각의 부분은 서로 얽혀들어 끊임없이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구의 구실을 한다. 과거는 가족사와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재생을 반복한다. 이러한 과거의 침투는 행동이 배제된 의식의 탐구로 전개된다. 그리고 의식은 서술자의 기억에 담겨있는 동시에 또한 텍스트에 담겨있다. 『화두』에는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이 인용된다. 몇 사람 예를 들자면 조명희, 이용악, 박태원, 이태준, 임화 등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작가 최인훈 자신의 소설과 희곡도 상당수를 언급된다. 미국부분을 끌고가는 텍스트는 『옛날 옛적이래도 좋고 아니래도 좋고, 훠어이 훠어이래도 좋고 아니래도 좋은』이었다. 전문독서인이라면 이런 다양한 텍스트의 간섭에서 지적인 쾌락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사의 전개를 통하여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텍스트 해석의 과정으로 환원된다. 『화두』1부의 노예철학자는 2부에서 ꡒ한 많은 식민지 지식인의 지적인 호기심의 계승자ꡓ를 자처한다. 서술자의 인식은 해방과 전쟁의 시기에서 소련의 붕괴로 건너뛰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남한사회의 변화과정은 간단히 처리되며 변화의 주체도 분명치 않다. 예컨대 서술자는 ꡐ5월 광주ꡑ에 대하여 급진적인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는데 이런 인식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광주항쟁은 일주일이 아니라 팔십년대를 관통하여 진행된 사건이다. 서술자가 허위의식이라는 뜻의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임을 감안하더라도 남한의 변화에 대한 그의 평가는 불거져 나온 혹처럼 거슬린다. 이것은 아마도 칠십년대와 팔십년대를 매개할 텍스트를 서술자가 찾지 못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술자의 세계에 연속성이 부족한 까닭을 첫째, 사건의 시점이 분열된 점과 둘째, 기억의 단편들이 통제되지 않은 채로 작품에 개입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천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의 시점이 위에서 언급한 공간적 배치와 똑같이 네부분으로 나뉜다. 미국부분이 1973,1979,1987년으로 세분되기는 하지만, 북한은 해방 이듬해, 남한은 1989년, 러시아는 1992년으로 고정된다. 서구의 장편소설이 하루를 시점으로 전개되는 예가 없지 않지만 『화두』처럼 상이한 사회구성체를 개인의 의식 속에서 혼합하려면 통일성을 유지할 기초가 미리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매순간 주저 없이 기어드는 과거를 통제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화두』에서는 때로 다듬어지지 않은 기억과 상념의 조각이 나열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런 나열방법이 소설의 미학적 완성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그것이 식민지 지식인의 시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21세기를 맞는 세기말의 정서에 부합할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서술자가 제기하는 관념과 현실의 대립이라는 오래 묵은 주제는 보편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서술자는 이 대립항을 생물과 문화 또는 세월과 역사라는 바꾸어 표현하기도 한다. 관념의 진리에 등을 돌릴 수도 없고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는 개인의 고뇌는 분명히 식민지 지식인에게는 힘겨운 것이었다. 우리가 후세에 있다하여 과거의 문제를 가볍게 볼 권리는 없다. 다만 그런 대립항이 성립한 구체적 현실의 차이를 감안하여 소모적인 되풀이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술자의 고뇌가 화두를 붙들고 천길 낭떠러지에서 주저 없이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용기에 어울리는 품격을 갖추려면 두 대립항이 그만한 높이로 느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명준이 벵갈의 바다에 들어간 것처럼 『화두』의 서술자는 조명희의 『낙동강』에 그리고 『화두』에 몰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