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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 | [문화와사람]
역작 남긴 무명화가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
글/이철량 전북대학교 교수 미술교육과 (2004-02-03 11:00:11)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본격적이고 뛰어난 인물화가로 알려지고 있는 채용신은 1850년 2월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서울에서 나고 상당기간동안 서울과 각지에서 살았으나 적어도 52세 이후 92세에 세상을 뜨기까지는 전북에서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한 예로 당시 채용신은 전라도 지방에서만 활동하였고 서울에서는 2류화가로 보여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채용신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전북에서 보내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를 따랐던 제자가 없고 그의 화풍도 전해지지 않았다.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으나 실상 채용신 자신도 우리화단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는 70년대 이후라 할 것이다. 여기에 소개되는 [운랑자27세상(雲琅子二十七歲像)]이 학계에서 국보로 지정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될 만큼 역작으로 남겨져 있으나 오랫동안 무명의 화가로 지내왔다. 당시 채용신이 살았던 구한말의 한국사회는 대단히 혼란한 시기였다. 세도정치로 사회는 부패했고 대재적으로는 동학농민혁명 등으로 국정이 불안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강화조약, 청일전쟁 등으로 외세가 밀려들어 급기야는 한일합방과 함께 국권이 상실되는 격변의 시대상황이었다. 이렇듯 불안정한 시대환경속에서는 문예활동이 위축되고 작가들의 의식이 발전적으로 개방되지 못하는 점이 있다. 실제로 이 시대를 대표하였던 소림 조석진이나 심전 안중식 같은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전통회귀와 현실안주의 경향을 엿볼 수 있으며 화단 전반적인 시대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수묵에 바탕을 둔 문인화풍의 산수나 화조화가 널리 유행하였는데 이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필묵에 의탁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넘기고자 하였던 연유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채용신은 대단히 색다른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그림공부를 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통정대부(通政大父)등을 역임한 무장(武將)출신 채권영(蔡權永)의 장남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1948년(현종14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으나 1850(철종원년)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는 호를 석지(石芝), 정산(定山), 석강(石江)등으로 썼으며 본래의 이름은 동근(東根)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상에는 용신이란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채용신은 나이 37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39세에 가과(可果)에 보임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44세에는 부산진수군검절제사(釜山鎭水軍儉節制使)가 되었고 이때 그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1899년 돌산진(突山鎭)에 있을 때 고종의 부름으로 태조대왕의 영정을 비롯해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등의 영정을 그렸다. 또한 이 무렵 고종황제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그렸고 고종으로부터 석강(石江)이라는 호를 받았다. 그 후 그 공으로 칠곡도호부사(漆谷都護府使)로 임명되었다. 이렇듯 그는 각종 무관벼슬을 지내면서 인물화 공부를 하여 종국에는 임금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운군의 초상도 그렸는데 이는 그의 부친이 대원군과 친교가 있었고 그러한 연고로 하여 궁중출입이 가능하여 그의 재능을 활용할 기회로 삼았던 듯하다. 이렇듯 고종과 대원군 등을 중심으로 한 초상화 제작과 궁중출입은 그가 화원(畵員)화가로 알려진 배경이 되지 않았나 한다. 실제 여러 기록등에서 그를 화원화가로 쓰고 있으나 그가 화원이었다는 근거는 전혀 없으며 이무렵의 화단을 비교적 가장 정확히 기억해낼 수 있는 김문호 화백은 그가 절대 화원이 아니었다고 증언하였다. 채용신은 1901년에 부친이 별세하자 전북 금마에 모시고, 관직을 물러나 금마에서 3년 동안 상(喪)을 입었다. 기록을 통한 이들의 정황으로 보면 그의 부친이 필시 한양에서 살았을 것이나 금마에 장지를 마련한 것을 보면 그의 가계가 어떤 연고로든지 금마와 연계되어 있음을 추정케 하며 혹 부친 채권영은 말년에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연고가 있는 금마에서 지내다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채용신을 그 후 잠시 완산군수를 지내나 조국이 일제에 강점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벗어나 그림에 몰입하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후 그의 행적은 자세하게 전하고 있지 않으나 그는 1910년경 칠보면 무성리 김직술(金直述)의 집에 유숙하면서 김직술의 초상화와 여타의 그림을 그렸고, 1917년에는 일본에 초대되어 (고종의 초상화를 통해 일본인들에 알려졌다고 함) 일본 여행과 일본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일정한 정착이 없이 유람생활을 하다가 1941년 6월4일 92세의 나이로 신태인 장군리에서 사망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그는 적어도 50세 무렵 이후에는 전북에서 활동하면서 여생을 보냈던 것 같으며 줄곧 작품은 제작되었으나 중앙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에 소개되는 [운랑자 27세상]은 매우 이례적인 인물화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을 매우 평범한 일상적 소재에서도 조선조의전통속에서 보면 독특한 것일 뿐만 아니라, 채색기법을 통한 화면처리에 있어서도 색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조선조에 있어서 인물화는 산수 속에 인물이 들어가는 소위 점경인물에서부터 초상화까지 많이 그려졌고 역사도 짧지 않다. 또한 대상인물이 수묵을 통한 선비나 신선, 그리고 김홍도 그림과 같은 서민에까지 이르며 또한 채색으로 그려진 초상인물화 등등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 그림은 지금까지의 인물상황과는 판이하게 다른 정감어린 모자의 모습을 통해 한국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채용신이 64세 때 운낭자 최홍련(崔紅連)을 그린 이 그림은 그녀의 얼굴에서 전형적인 한국여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신의 몸무게를 오른발에 싣고 왼발을 약간 뻗어 왼편으로 내비친 모습에서 안정되고 변화 있는 자세를 보게 한다. 약간 살집이 있는 몸매와 계란형의 둥근 얼굴이 조선조의 미인상을 잘 보여주며 이렇게 전체적인 온후한 모습과 양어깨로 흘러내린 두 팔의 원형, 짧은 저고리 안으로 살짝 내비친 젖가슴과 함께 보름 달덩어리처럼 밝게 그려진 벌거숭이 아이 등이 사랑스럽고 풍만하며 생기 넘치는 그림이 되고 있다. 모자간의 따뜻한 정과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작품이다. 전통 채색기법으로 처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얼굴이 평면적으로 처리된 점이 종래 다른 그림과 다르며, 옷과 아기의 표현에서 음영(陰影)법을 쓰고 엷은 담묵의 윤곽선에 담백한 채색처리가 마치 서양회화에 있어서 수채를 보는 듯 하다. 풍부한 옷주름을 통해 화면의 변화를 이루었고 농담(濃淡)을 이용한 음영처리로 입체적 효과와 풍만한 양감(量感)효과를 내고 있다. 이 작품은 일제 때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란 책에 실렸을 만큼 당시에도 유명하였던 작품이며 채용신의 명성을 얻게 해준 걸작이다. 이러한 화풍이 지속적으로 발전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이 아쉬울 뿐이다. 다음에는 그의 걸출한 초상화와 함께 그의 인물화에 대해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채용신의 생애에 대하여는 전혜원의 석사논문을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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