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9 | [문화칼럼]
운동권,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랴
유제호 전북대학교 교수 불어불문과
(2004-02-03 10:58:40)
내 출근길에는 인도가 없다. 언제부턴가 도로 전체가 차도로 변해버렸다. 하수구 덮개에 코를 처박고 걸어야 한다. 그것만이라면 다행이다. 여기저기 주정차해 있는 차량 때문에 이따금 담벼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거나 때로는 아예 도로 안쪽으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차들이 들이덤빈다. 뒤에서도 차들이 들이닥친다. 앞에서 빵빵! 뒤에서 빵빵! 앞뒤에서 빵빵거린다. 아, 하루에도 몇 번씩, 시쳇말로, 애떨어지는 맛이다.
아침 출근길의 이같은 위중위태한 순간들이 내 삶의 질을 상당 정도 대변한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자본주의의 속성인 무한경쟁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고,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제화와 국가경쟁력 강화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현 정부의 정책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내가 일상적으로 채감하는 삶의 질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비약하자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중간 어느 형태이든 모든 사회체제의 기본 목표가 민중의 일상적 삶의 질을 높이는데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같은 견해 아래 나는 현 정부가 나라의 장래와 통일 문제에 대해 좀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대처해 줄 것을 정중하게 당부하고자 한다. 그리고 최근에 불어닥치고 있는 공안의 회오리바람에 관련하여 이른바 ‘주사파’를 포함한 운동권 학생들의 사회운동을 대체적으로 옹호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물론 북한도 그동안의 대남 전략과 내부적 시행착오를 반성하고 우리측의 변화에 상응하는 점진적인 개방과 화해의 길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래서, 남과 북이 상호견제하는 가운데 서로의 장점만 공유하는 날을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남북의 정권이 ‘상호주의적으로’ 민중을 옭아매고 역시 ‘상호주의적’으로 상대방의 위협을 핑계 삼아 지금껏 버텨 왔다는 것, 그 정도는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상호주의’를 내세워 언제까지 난형난제의 이간질과 선동질로 버틸 것인가. 남이든 북이든, 어느 한 편이 먼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남북이 이제라도 체제상의 일방적인 우월감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상호 존중의 미덕을 발휘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화해의 물꼬를 트는데 있어 우리 정부가 좀더 여유있는 태도를 가지고 앞장설 필요가 있다.
백번 양보해서 현 정부를 ‘문민정부’로 인정한다고 치자. ‘정부의 문민화’, 고작 그것이 항일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4.19의거, 광주민중항쟁을 계승하는 길이란 말인가. 아니다. 현 대통령이 3당합당 당시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고 했듯이 그리고 취임 당시 무엇보다 ‘민족 존엄’을 강조했듯이 민족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다방면에 걸쳐 과거를 청산하고 꾸준히 미래의 청사진을 설계함으로써, 남북 민중의 삶의 질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문민정부에 주어진 과업이다.
지난 광복절에 나온 ‘민족 공동 발전계획’과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얼핏 보기에 우리 정부 입장의 획기적인 전환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탈이념 시대’를 앞세우면서도 일방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전제하고 ‘민족 존엄’을 앞세우면서도 순전히 경제발전 중심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세계관 및 통일관이 아직도 모순과 한계투성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선 시급한 것이 사회주의니 마르크스이론이니 주체사상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정부의 올바른 인식이다.
사회주의라는 것을 두고 더 이상 국민들의 눈을 사팔뜨기로 만들지 말기로 하자. 어린이 무료입장, 경로우대증, 극빈자 생계보호, 의료보험 등등이 과연 자본주의적 산물인가. 서구유럽 곳곳에서 지향되고 있는 ‘복지국가’라는 개념이 과연 자본주의의 속성인가. 그것들이 설령 자본주의 사회의 자력갱생 형태로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결과론적으로 사회주의가 지니고 있는 타당성과 잠재력의 일면을 변호해 주고 있는 것 아닌가. 절대 자본주의도 절대 공산주의도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 주고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이론을 두고도 이제는 제발 거기에 담긴 과학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말기로 하자. 기나긴 세월에 걸쳐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반공소년으로 키워진 나는, 지금 내 스스로 절름발이 교수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마르크스이론을 포함한 사회주의권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인용되는 상위권의 수많은 서구학자들이 아예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적어도 의존하고 있거늘, 마르크스이론 없이 어떻게 학문의 ‘국제화’가 가능하고 학문의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마르크스의「공산당선언」을 성경과 나란히 교양도서로 부과 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하여 온 세계가 웃을 일이다.
주체사상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것을 왜 까딱하면 김일성주의에 결부시켜 용공, 이적으로만 몰아붙이는가. 사실 주체사상은 국제화 내지는 제국화에 휩쓸리고 있는 우리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자생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왕에 북한에 뿌리내린 ‘주체사상’을 어느 정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자체가 용공, 이적일 수는 없다. 더군다나 북한의 ‘주체사상’과 거기에 동원되는 정치상의 자주, 경제상의 자립, 국방상의 자위, 공동체 단위상의 민족과 같은 개념들은 미국 뿐만 아니라 소련이나 중공을 비롯한 모든 강대국들을 겨냥하고 있다. 자, 사정이 이렇다면, 국제화 내지는 제국화의 위기에 처해 우리 또한 우리 나름이 주체사상을 논의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외국에서는 별의별 하찮은 것들까지 다 들여오면서 북한에서는 왜 아무것도 들여올 수 없다는 말인가.
박홍총장의 발언과 뒤따른 지지 성명, 조문 건의 및 애도 집회 파동,「한국사회의 이해」라는 경상대의 교재 사태, 범민족대회 강제 해산 등등 최근에 잇따라 불어닥치고 있는 공안의 회오리바람은, 이렇게 볼 때, ‘이적’을 발본색원하겠다는 명분 아래 우리 사회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북한이기에 앞서, 앞서 말한 민족 존엄, 민족공동체 의식, 과거청산, 미래 청사진을 저해하는 그 어떤 다른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북한이 앞으로도 꾸준히 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탓할 수도 없고 막을 권리도 없다. 오히려 북한이 그 나름의 사회주의적 잠재력을 바탕으로 북한 민중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이제라도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 남한과 북한이 50년 가까이 상반된 체제 아래 각기 제 나름의 자생력을 획득한 지금에 와서 섣부른 통일, 더군다나 흡수통일을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바로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북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49년만에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그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그 소중한 합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뚝 떨어졌는가? 정부가 자력으로 획득했는가? 물론 아니다. 이른바 ‘문민정부’를 있게 한 그 엄청난 소모전과 숱한 희생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 군부독재와 분단상황을 상대로 벌인 그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염원이 한편으로는 남녘에 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녘에 스미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을 주춤케 했기에, 그 연장선에서 이른바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마침내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아주 최근에는 여대생 임수경, 작고한 문익환 목사, 그리고 지금도 터무니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작가 황석영이 과감하게 남북을 ‘휘저어’놓은 덕분에 어렵사리 만남의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문민정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소중한 것을 왜 섣불리 처분하려고 드는가. 내가 볼 때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조문 건의는 얼마든지 선의로 해석될 수 잇는 것이었다. 그것이 남북 화해를 위해 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나아가서, 최근에 공안당국이 가장 큰 문제로 부각시키고 있는 극소수 대학생들의 애도 집회를 나는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김일성 장군의 서거에 경건하게 애도의 뜻을 표합시다”라며 고개를 숙인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그들이 ‘주석’도 아니고 ‘수령’도 아니고 ‘장군’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점에 주목한다.
나는 1953년생이다. 그 무렵 태어난 아이들은 유별난 반공소년들이다. 아무도 제대로 일러주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빴다. 그저 북한은 가해자였고 남한은 피해자였다. 그저 미국은 우방이고 소련은 적이었다. 그저 남한은 자유와 번영의 이상향이었고 북한은 공포와 굶주림의 생지옥이었다. 반공이야말로 진리이자 정의였다. 북한에 대한 적애족, 통일, 민족중흥, 선진조국, 인류공영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쩔 때는 마구 야단을 쳤다.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하지만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오히려 제대로 아는 것이 죄였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는 것이 곧 두려움이었다.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다.
예를들어 1953년생인 내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들은 대로라면, 김일성 장군은 티끌만큼도 항일 투사가 아니었다. 소련의 앞잡이, 파렴치한 매국노, 동족상잔의 원흉, 일당독재의 우두머리, 무자비한 숙청을 일삼은 살인마, 자기 신격화에 혈안이 된 미치광이, 주체사상이라는 허무맹랑한 사교(邪敎)의 교주, 전대미문의 새빨간 거짓말쟁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언제부턴가 각종 언론매체마저 김일성 장군(?)의 항일운동 전력(前歷)만은 슬그머니 인정하고 있다. 비록 중국공산당 소속이었지만 알고 보니 그가 항일 투사는 항일투사였다. 그가 25세인 1937년에 벌인 보천보(普天保)전투는 당시에 동아일보가 대서특필할 정도로 뜻깊은 항일투쟁이었다. 또다른 예를 들어 28세인 1940년에는 안도현(安圖顯)의 홍치허(紅旗河)에서 일본 특경대장 마에다 다케시를 비롯한 일경 58명과 부역노무자 17명을 사살하고 13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때려잡자 김일성’을 외치며 숱하게 김일성 화형식을 치렀던 반공소년으로서는 이것만으로도 우울하다. 김일성 주석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줄곧 나쁜 일만 골라 했다고 치자. 한국전쟁의 원흉인 그가 상이군인들과 전쟁미망인들과 이산가족들에게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죽었다는 것 자체가 두고두고 분통 터질 일이라고 치자. 그렇더라도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항일투쟁이야말로 민족 공동체의 차원에서 누구나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큰 미덕이기에 그렇다. 적어도 이 점에 관련해서는 우리 어른들이 떳떳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극소수 대학생들의 애도 집회도 내가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이는 이같은 미안한 마음과 엇비슷하지 않았을까?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열사들을 추모하는 데 길들여진 그들이 항일투쟁이라는 민족공동체 차원의 미덕을 기리며 김일성 ‘장군’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달게 벌을 받겠다. 하지만 그 죄는 절대 내 탓이 아니다. 나를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반공소년으로 키운 어른들 탓이다.
나는 어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학생들의 사회운동을 한편으로는 견제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자고. 우리 현대사에서 줄곧 그래 왔듯이,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그들이 해내고 잇다는 믿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을 어른들이 지금 와서야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듯이 통일을 위한 그들 나름의 투쟁 또한 언젠가는 정당하게 평가되리라는 믿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북한을 어느 정도 참조하고 북한대학들과의 자매결연을 시도하는 것도 무작정 위태롭게만 여기지는 말기로 하자. 그것이 ‘상호주의적’ 이간질로 점철된 분단의 역사를 ‘휘저을’ 수밖에 없는, 그래서 어떻게든 화해의 물꼬를 트고자 하는, 그들 나름의 ‘신세대’ 전략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황금 시간대에 편성된 ‘뉴스 데스크’, ‘뉴스 비전’, ‘스포츠뉴스’, ‘드라마’, ‘미니시리즈’ 등등으로 온 국민을 텔레비전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우리 사회가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것인가. 외국어 일색의 그 무수한 상품 광고 앞에서 뭔가 위기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가. 만약 조금이라도 위기 의식이 느껴진다면, 이른바 ‘주사파’를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에게도 그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하자. 온 국민에게 한번쯤 그들이 생각, 그들의 언어, 그들의 노래를 있는 그대로 들려 줄 수 있도록 하자. 우리 국민에게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 낼 역량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터무니 없는 선동을 일삼는 경우 아무도 그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계를 지적해준다면,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이롭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고꾸라지고 짓밟히고 할복하고 투신하고 분신할 때 정작 정치권의 어른들은 어디 있었는가? 학생들이 빈사 상태에 놓인 우리 문화, 우리 언어, 우리 음악을 부활시키고자 안간힘을 기울일 때 정작 그 분야의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학생들이 농민, 노동자의 사회적 통찰력과 비판력을 키우는 데 앞장설 때 정작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문민정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남북 민중이 골고루 체감할 수 있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만큼 근원적으로, 순수하게, 거시적으로, 장기적으로, 어떤 치유책과 청사진을 마련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 시대의 학생들이 죄다 학업에만 전념하거나 아예 텅 빈 머리로 거리를 싸다녀도 우리 사회에 아무 탈이 없겠는가?
내 출근길의 그 위중위태한 순간들에 비추어 내 삶의 질을 다시 한 번 저울질 해 보며, 내가 겪어 온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반공’의 세월을 돌이켜보며, 도처에 난무하는 미국어, 미국잡지, 미국노래, 미국영화 앞에서 절망하며, 방금 열거한 질문들과 더불어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주사파’를 포함한 운동권.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