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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 | [문화시평]
사유(思惟)의 여백인가, 관념(觀念)의 과잉인가! 연희단 백제후예 [태](7월20일~21일, 전북예술회관)
글/김길수 순천대학교 교수 연극평론가 (2004-02-03 10:55:12)
오태석 연극 미학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태] 공연. 88년 제 6회 전국연극제 때 대전시민회관을 꽉 메운 관객들, 굿 보러 왔던 이들의 상투적 감상 의식과 정서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박병도 연출의 [태] 공연과 그 다이나믹한 에너지는 섬세한 조명술, 배우술, 음향 미학의 앙상블과 더불어 전국연극인들의 가슴에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의 설레임을 다시 떠올려 보며 전주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태]공연의 예술성은 오태석의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이지만 유독 무대 위의 실험작업이나 재창조 작업이 다양하다는 데에 있다. 오태석이 열어 놓은 빈 공간을 과연 박병도는 어떻게 메꾸고 있을까? 이번 [연희단 백제후예]의 신진 팀들과 94년 박병도의 새로운 해석 작업은 기존 오태석 무대의 모방 시비를 완전 불식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름의 독특한 실험 방향을 구체화시켜 주었음을 예고하고 있다. 단종으로 하여금 죽은 사육신들의 군주가 되도록 하기 위해 벌이는 각종 해프닝들은 연출의 새로운 해석 의지와 재창조의 열정을 확인시켜 준다. 이 공연에서 드러낸 사육신들과 세조 간의 관계나 사육신과 단종의 관계는 단순한 이분법적 해석을 배척한다. 역사적 인물들의 상투적 대립이나 삶과 죽음의 단순한 경계는 일찌감치 무너지고 만다. 철저히 반역사적이고 반현실적인 작가 오태석의 사고를 지배자 위주의 역사 서술 행위를 송두리째 거부하고 이를 새롭게 통찰하려는 실존 의식에 기인한다. 오태석의 이 같은 반역사성은 반현실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초현실적이고 표현주의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작가의 주관이 일상의 시공을 뛰어넘어 종횡무진 다양한 환영의 세계를 창출한다. 일반적으로 산 장르의 의식이나 환영 속에 죽은 자들이 자리하여 왔다. 그러나 박병도 연출의 이 공연에선 죽은 자들이 현실 속에 직접 나타나 산자들의 애환과 고통의 문제를 간섭하고 제어하려 든다. 이전의 [태] 공연에서 죽은 자들의 모습은 어둠침침한 무대 조명의 지원 하에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경우에 따라 미친 자들의 환상이나 비현실 영역 속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들의 연행이 부분적으론 현장적이고 일상적인 인상을 띠기도 하였지만 대체적으론 검정 실루엣 형상으로 등장함으로써 현실 이면에 숨어있는 편이었다. 이번 박병도의 재해석 작업에서 사육신들의 연행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비현실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육신들의 연행은 현실 상황을 간섭하고 제어할 정도로 무대 전면을 장식한다. 죽은 자들의 허밍 하는 소리가 ꡐ단종을 내놓아!ꡑ와 같은 절규하는 듯한 무겁고 어두운 색조와 뒤섞여 나올 때 산자들(세조나 신숙주)의 정신분열이나 갈등은 최고조로 증폭된다. 단종을 죽은 자기 자신들의 군주로 삼고자하는 사육신들의 염원은 강약고저의 싸이클에 맞추어 경우에 따라선 느린 동작으로 어떤 경우엔 빠른 락 음악풍의 율동으로 형상화된다. 락 음악 선율과 스타카토식 율동의 집단 움직임은 죽은 자들의 염원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를 일깨우기 위한 장치라고 출연 배우 장명철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의상은 말할 것도 없이 반형식적인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검정 그물 같은 옷을 걸침으로써 죽음의 세계상 안에서 몸부림치는 이미지를 일깨워 주기도 하고 어느 땐 하얀 종이옷에다 망건을 쓰고 등장함으로써 또 다른 초현실적인 색채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한편 단종의 죽음을 결사반대하는 세조의 몸부림이 드셀수록 사육신들의 몸부림 역시 강하여 진다. 마침내 세조가 단종의 죽음을 인정할 때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방황해야 하는 사육신들의 몸부림 역시 끝이 난다. 이점은 오태석 특유의 유미 주의적 시각이다. 짝두의 등장, 짝두의 소리는 신선한 무대 기호로서의 효능을 십분 발휘한다. 소름끼치는 짝두의 칼날이 조명 빛에 의해 번뜩이고 (이점이 좀 약했지만) 두 손에 들려진 짝두가 공중을 향해 ꡐ찰카닥ꡑ 소리를 울린다. ꡐ찰카닥ꡑ소리와 더불어 사육신들의 방황은 끝을 맺는다. 그들의 죽음은 이로써 완성된다. 불완전한 죽음, 원통한 죽음은 완전한 죽음으로 새롭게 변용된다. 작가가 부여한 실존의 영역은 진정 완성되는 것일까? 죽은 단종과 사육신들 간의 의로운 관계 역시 비로소 실현되는 것일까? 사유의 미학은 관객의 몫이고 그 여백을 열어 주는 장치는 연출의 몫이다. 바로 이 여백을 이번 공연에서 연출의 새로운 관념으로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연출은 ꡐ의ꡑ와 ꡐ탯줄의 흐름ꡑ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대신 새로운 해법을 실험적으로 가미한다. 그 포인트가 자식을 죽여 받쳐야 했던 남종과 여종의 고뇌 상황이다. 씻김굿, 미친 여종과 남종의 정사, 여종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탯줄의 선정, 사육신의 혼백들이 벌이는 탯줄 유희, 이는 산자와 죽은 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연출자 박병도의 실험적 시도이자 자의적 관념이다. 산자와 죽은 자 간의 춤과 각종 제의 형태가 연출의 실험적 해법에 의해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씻김굿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처방이다(연출자의 주장에 의하면). 사육신, 여종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탯줄로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을 강렬하게 하나로 묶어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혈통을 잃지 않으려하는 종들의 몸부림은 탯줄을 가지고 벌이는 사육신들의 마지막 군무를 통해 새롭게 치유되기 시작한다. 탯줄의 유희는 산자와 죽은 자 유희이지만 그 외형을 뚫고 들어가면 산자들의 아픔과 고뇌를 같이 나누고자하는 죽은 자들의 강렬한 염원이다. 이 춤은 삶과 죽음, 정상과 비정상, 지배와 피지배의 경계를 뛰어 넘어 서로의 응어리를 하나로 용해시켜 놓는다. 이 같은 자의적 해법들은 실험적 차원에서 나마 일종의 충격을 던져 준다. 부분적이나마 탯줄 유희는 복잡한 실타래 가닥이 이리 저리 엮어짐으로써 원을 그리며 마음대로 동선을 펼쳐야 할 배우들의 몸동작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 점은 실험의 차원에서 관념의 과잉을 일깨우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관념의 과잉은 연출의 변용과정에서 절제의 수준을 뛰어 넘고 있다. 연극 예술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느끼고 체험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수용의 참맛을 보유한다. 죽은 자들과 산자들이 만나는 과정에서 풍기는 고유한 연극적 아우라, 죽은 자 허밍 소리나 반젤레스 선율이 던지는 현실과 초현실을 관통하는 미적 환타지, 이런 본질적 효능들이 존중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기법들이 연출의 지나친 주관과 자의적 관념 속에 파묻혀 버렸다는 인상이 강하다(비록 프롤로그에서 이를 커버하기 위한 상징적 춤들이 선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참 배우들의 껄끄러운 배우술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오태석 연극 문법을 박병도 특유의 무대 미학과 음향 및 소리 해법으로 풀어 나갔음은 이번 공연의 주요 덕목으로 거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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