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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8 | [특집]
고목(古木)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랴? -문화-
문병학/시인, 전북청년문학회 회장 (2004-02-03 10:43:56)
‘연목구어’(緣木求魚) 참 의미심장한 말이다. 1992년 말 문민정부의 출범 이후 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변화와 개혁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비중 있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금융실명제니 관료사회에 대한 사정작업이니 군부개혁이니 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었고, 시위나 집회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달리 대단히 유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94년에 들어선 이후 문민정부는 확실히(?) 달라졌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에 대한 극렬한 탄압, 뭔가 석연치 않는 공안사건의 돌출, 문화예술단체나 작품에 대한 어이없는 침탈, 전쟁위기감 조성,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격으로 전쟁위기감 조성에 따른 원색적인 반공논리의 종횡무진 등에서 소위 문민정부의 태도가 1,2년 전과는 확실히 돌변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돌변한 상황에 대하여 사람들은 ‘신공안정국’이라거나 ‘보수로의 회귀’라고 말하고 있다. 틀림없는 말이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이 정세인식에 나 또한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보다 생각을 진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세에 대한 이해나 인식의 차원에서 멈춰 버리면 천만부당한 신공안정국과 보수에로의 회귀를 막아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들이 나아가야할 길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얻어내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생각을 진전시켜야 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최근 들어 노골화 되고 포악해진 김영삼 정권의 반민주적인 제형태를 단순히 성토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수로의 회귀를 막아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문민정부 자체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1,2년 전에 취했던 소위 문민정부의 개혁과 변화의 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김영삼정권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한계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여겨지며, 바로 그 때가 지금인 것 같다. 그래야 최근에 빚어지고 있는 제반의 시대착오적인 행태를 막아내고 우리들의 앞길을 밝게 열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김영삼 정권의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면 그 한계는 무엇이고 그 한계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를 얘기하는 것은 당면하게 제기되고 있는 신공안정국이네 보수로의 회귀이네 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오히려 이러한 본질적인 접근이 전제되어야 보다 분명하게 작금의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에서 소위 문민정부가 출범하게 된 국내외적 배경과 그 후 오늘에 이르게 되는 상황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우선 국내적으로 문민정부의 출범배경을 살펴보자.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더 이상 군부독재를 용인하려 들지 않았던 80년대 민중들의 의식발전과 정치적 진출을 비중 있게 전제하여 논의하여야 하겠지만 지면상 그 점은 접어두고 당시의 객관적 정치 상황으로써의 배경만을 검토해 보자. ‘보수로의 회귀’라는 말 속에는 소위 문민정부가 취했던 그동안의 변화와 개혁을 상당히 긍정적인 것으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부정적이다. 작금의 반동적인 정세의 출현을 결코 돌출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김영삼 정권의 근본적 한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나간 일들을 너무 쉽게 잊어먹거나 잊어먹기를 강요당하곤 한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자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라!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 이 세 사람이 손에 손잡고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하였던 이른바 3당 합당. 그 이후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3당 합당이 구국의 결단은 아니었어도 대단히 노련한 정치술이었다고 생각해버렸었다. 하여, 정치판 속에서의 변절은 때에 따라 필요한 것이라는 지극히 온당치 못한 생각들이 자리함으로써 3당합당 과정에서 보여준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이며 음모적인 정치적 대변절을 우리는 금세 잊어버리거나 묵인해준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을 다시 한번 곰곰 되짚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3당 합당 속에 이미 1994년 오늘의 ‘신공안정국’과 ‘보수로의 회귀’가 잉태되어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판단일까? 여하튼, 우리는 김영삼 정권을 군부독재와는 다른 문민정부라고 일컬으면서 변화와 개혁을 기대하였고, 겨우 2년이 지난 지금 그 기대가 얼마나 허황된 뜬구름 잡기이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되돌아보면 작금의 이 ‘보수로의 회귀’는 예견된 당연한 귀결이다. 군부독재 정권 때 비민주적이고 야수적으로 민족민주 인사들을 토끼몰이 하던 자가 소위 문민정부의 실세로 아직도 최고위직에 떠억 버티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정권에게 근본적인 민주적 개혁과 변화를 개대했으니...... 이것을 어찌 ‘연목구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소위 문민정부의 출범을 가능케 했던 국외적인 배경과 1994년 ‘신공안정국’과 ‘보수로의 회귀’의 국외적 배경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소위 문민정부가 출범하게 된 국외적 배경을 살펴보면, 미국의 주도에 의해서 진행되었던 평화이행전략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새로운 미국중심의 평화이행전략은 소련이나 동구권의 몰락을 촉진시켰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세계적인 추세가 반영되어 소위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위 평화이행전략, 즉 미국 중심의 세계재편전략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요구받았다. 1994년 현재 미국은 이 새로운 단계전환을 철저하게 ‘힘의 논리’로 밀고 나가되 직접적인 힘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유화책을 강구하여 서서히 굴복시키는 음흉한 양면전략을 수립한 것 같다. 하여, 우리는 현재 조성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고위급회담 등으로 잠시 유보된 우리나라에서의 긴장완화가 장마철 햇빛과도 같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의 평화적인 분위기는 미국의 진짜 본심이라고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자본주의라는 체제 속에서 막대한 실리를 추구하고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무력충돌에서 끝없이 부를 축적해 온 미국이 진정으로 평화를 바라리라고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중심국인 미국의 역사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국의 국제정책에서 평화를 찾는다는 것’은 ‘고목나무 위에서 고등어를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봤을 때 미국은 현재로써는 우리 한반도에서 평화적 방법으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처럼 행동을 취하고 있으나 결국 북한이 지금까지 보여 왔던 강한 민족적 자주성에 기초한 외교활동을 염두에 둘 때 민족적 자존심을 쉬이 저버리려하지 않을 것이고, 이에 미국은 북한을 대하는데 있어서 곤란함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 미국은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려 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하여, 미국은 우리 남한에서 민중의 역량이 강력하게 재정비 되는 것을 바랄 리 없다. 남한은 아직 반공의식으로 튼튼히 무장된 채로 남아있어야 한다. 남한 내에서의 민중역량이 강력하게 정비되어 있으면 미국이 북한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할 필요가 제기되었을 때 대단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남한에서 강력한 친미정권이 붕괴된다는 것은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패권 장악을 위한 전진기지의 커다란 약화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막대한 손실을 미국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최근에 우리 정부가 보여주는 태도를 미국의 국제 전략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여, 우리 정부가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얼마 전 미국이 한반도에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킬 때 ‘안보불감증’ 운운하다가 불과 며칠 뒤 미국이 대화국면으로 방향을 선회하자 금세 미국의 입장변화에 따라 ‘평화’니 ‘긴장해소’니 하면서 무원하게 정책을 선회시키던 우리 정부의 모습을 상기해 줄 것을 나는 요청한다. 이렇듯 소위 문민정부가 미국의 국제 전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최근의 우리 정부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학생운동에 가하는 극렬한 대응, 나라를 백번이든 천 번이든 망쳐먹고도 남을 원색적인 반공사상의 조장은 단순히 7월 국회에서 쌀 수입개방을 날치기 통과시키고, 문민정부의 그간의 실정을 무마하기 위한 단순한 전술적 차원의 행동이라고 결코, 여겨지지 않는다. 최근 민중진출에 대한 전에 없던 문민정부의 극렬한 대응으로의 돌변에는 확실히 보다 근본적인 측면에 뿌리를 둔 탄압일 거라는 생각이 짙게 든다. 다시말해서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정부도 문화예술행위와 그 창작품에 대한 의식의 전환을 꾀하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미국의 새로운 ‘힘에 의거한 야수적 세계재편음모’의 전략적 일환으로 우리 정부의 반민족적 반민중적인 각계운동의 극렬한 탄압과 시대착오적인 분별없는 반공사상 유포를 배후하과 있으며, 이러한 미국의 방향전환에 따른 우리 정부의 개혁노선의 포기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여하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허심하게 그 분야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이 무식한 탄압을 우리는 대단히 우려해야 한다고 본다.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슨 나라 망쳐먹을 일로 매도하고 탄압을 한다든가 농민들이 생존권 투쟁을 북한의 사주 운운하면서 원색적인 반공의식으로 가위질하는 어이없는 사태를 우리는 하루빨리 걷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던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잊혀져서는 결코 안 된다. 더욱이 2000년대를 코앞에 둔 지금에야 두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문화예술행위는 시대정신의 표현이며, 그 민족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마련이다. 하여, 일찍이 일제치하 우리민족의 혼과 빛나는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민족문화예술을 금지시켰으며, 창작자나 창작품에 대하여 극심한 검열과 탄압을 일삼질 않았던가. 그런데 1994년 문화예술 창작자와 창작품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으니 이것을 도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1980년대 수만의 대중들에게 애독되고 오늘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탄압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또한, 최근 들어서 자행되는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침탈을 정말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예의주시 해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행위는 곧 우리들의 정신생활의 중심이며, 따라서 문화예술행위에 대한 탄압은 우리의 정신과 생활에 대한 직접적이 탄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늦었지만 이제 우리정부도 문화예술행위와 그 창작품에 대한 의식의 전환을 꾀해야 할 것이다. ‘지적소유권’이네 뭐네 ‘외국문화수입’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이 마당에 유구한 우리의 민족문화예술분야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책이 강구되어도 시원찮을 판에 탄압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논쟁으로 문화예술행위를 탄압하는 시대는 정말 마감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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