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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8 | [교사일기]
여전히 새로운 것은 아이들이다
김미선 무주부남중학교 교사 (2004-02-03 10:37:32)
낡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교무실에서 서너 차례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은 이 선생님이 내게 수화기를 건네준다. 받아보니 올해 졸업한 선아에게서다. 벌써 이과, 문과 선택을 해야 한다고, 어쩌면 좋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 본다. 선아네들하고 인연을 맺은 지 3년4개월, 그러고 보니 3년을 부대꼈던 이들을 전주로, 대전으로 보내 놓고 벌써 4개월이나 흘렀다. 생전 수줍음만 탈 것 같더니 소풍 가선 한바탕 멋들어진 춤솜씨로 모두를 놀래켰던 강희, 가끔씩 제법 입바른 소리로 나를 채찍질하던 화영이, 아직까지도 어리광 가득 담은 편지로 안부를 묻는 희애, 산업체 고등학교를 진학하더니 첫월급 탔다고 전화하던 현정이, 그리고 또.... 첫 사랑은 잊어도 첫 발령지에서 만난 아이들은 잊지 못한다더니 이들의 말투에서부터 특이한 버릇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생각나지 않는 게 없다. 그중에는 특히, 영원히 잊지 못할 교단에서의 나의 첫 시험자였던 아이도 있다. 1991년 3월 11일. 갑작스레 발령통지서를 받고서 직행버스로 2시간 10분을 넘게 달려 도착한 무주, 지금은 리조트다,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지다 해서 잘 나가는 무주가 됐다지만, 그때만 해도 제대로 된 터미널도 없던 말 그대로 깡촌에 다름 아니었던 곳이다. 더욱이 무주라 하면 암행어사 박문수가 어사 출두하던 심심산골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더군다나 전주를 벗어나 단 한번도 생활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무주로의 발령은 하나의 모험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10여일 이상을 담임도 없이 나를 기다리던 42명 아이들 속에 그 아이가 끼어 있었다. 눈에 띨 정도로, 활발한 성격이면서도 정작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던 조금은 특이한 성격을 지닌 채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뚜렷한 교육관도 없이 학급을 운영하려니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우스갯소리로 맨땅에 헤딩하기라고나 할까. 때로는 민주적으로 운영한답시고 천방지축 내버려 두기도 했다가 때로는 이 아이들을 내 한 손에 휘둘러보겠다고 가장 쉬운 대로 사정없이 매를 들이 대기도 했으니 나도 헷갈리는 탓에 아이들의 혼란이야 말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사고를 일으키지 않고 평탄하게 한 해를 마치고 그 아이하고도 그렇게 헤어졌다. 그러다가 3학년 담임으로 다시 그 아이를 만났을 때, 그 아이에게는 이미 요선도(要善導)란 꼬리표가 따라 다니고 있었다. 먼저 한숨부터 나왔다. 3년을 내리 담임을 하게 되다 보니(능력을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딸린 식구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새 난 적당히 게을러지고 적당히 지친 그런 선생이 되어 있었다. 담임을 해야 비로소 선생일 수 있고 또 기왕에 2년 동안 맡았던 아이들이니 졸업까지 시켰으면 하는 욕심도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담임배정에서 제외됐으면 하는 바람도 마음 한 구석에 있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시작이야 어찌됐든, 의외로 순탄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3학년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스스로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저 아이들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드디어 5월이 되었다. 봄바람 살랑대는 사이로 ‘5월은 청소년, 부녀자 가출 예방의 달’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미친 여자 치맛자락 날리듯 펄럭이던 그 5월에 걱정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 아이가 1주일이나 무단결석을 한 것이다. 아이들의 무단결석은 가출과도 직결되는 것이니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퍼뜩 드는 순간이었다. 1주일 만에 학교에 나온 아이를 옆에 앉혀 놓고 다그쳤다. 할머니라고 하면 딱 좋을 만큼 연로한 그 아이의 엄마는 쉰 넘어 낳은 딸이라며 무조건 용서해 달랜다. 어쩔 것인가. 용서해 달라니 용서할 밖에. 마음이 내켰는지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시키지도 않은 맹세까지 하더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방황은 두 달 동안에 무단결석 40여일로 이어졌다가 급기야는 다른 반 아이까지 데리고 집을 나가는 것으로 발전했다. 가출은 했어도 무주를 떠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오락실, 노래방을 뒤지고 다니다가 동네 빈 집에서 자고 있는 두 아이를 찾아냈을 때, 차라리 담담했다. 체포한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경위서(?)’를 쓰게 하고 다른 아이가 쓴 것과 대조해 가면서 사실 여부를 추궁하고, 내 모습은 취조에 이골이 난 형사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겁이 났던지 그 아이는 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순간, 그렇게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니 어떻게든 졸업만 하라고 사정했다. 할머니 같은 엄마를 인질삼아 협박도 했다. 그제서야 겨우 노력은 해본단다. 그것만도 다행이었다. 어릿광대 외줄 타듯 아슬아슬한 날들이 지나고 고교 입시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제 입으로 원서를 써 달라고 했다. 어떻게 설득할까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큰 짐하나를 덜었다 싶었다. 그리고 졸업식. 우여곡절 끝이니 만큼 멋진 졸업사를 하리라 맘먹고 잠까지 설쳐가며 여러 말을 연습해 두었는데 막상 한 마디도 써 먹지 못했다.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마주치게 되면 반갑게 손잡고 인사하자”고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겼다. 그날 저녁, 아이들이 주고 간 편지를 뜯어보고 있을 때, 꽃 한 다발과 함께 그 아이가 찾아 왔다. 그리고는 고등학교는 잘 다니겠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가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법 열심히 사는 모양이다. 그런 아이를 하마터면 길거리로 몰아내려 했다니, 정말이지 큰 죄 지을 뻔했다. 돌이켜보면, 지금 도 고맙고 미안한 것은 제대로 상담 한 번 못하고 졸업시킨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이다. 다행이 제법 철들어 자기 할 몫을 알아서 해내고 가끔은 내 표정을 살펴 힘내라고 격려고 해 주던 그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지금 어떻게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아이들로 해서 때때로 좌절한다. 그러나 또한 아이들로 해 내가 살아 있음을 깨닫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깨달음 은 앞으로 내 교단생활을 지켜주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3년 전, 그저 ‘네, 네’밖에 모르던 새까만 신규에서 이제 제법 목소리 높여 의견을 말할 만큼의 이력이 붙은, 그래서 감히 후배 교사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은 구규가 된 나에게 여전히 새로운 건 역시 아이들이다. 변화무쌍, 예측불허의 아이들, 이 아이들 앞에서 난 언제나 허둥대는 신규일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 영원한 신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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