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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8 | [저널초점]
걸러지지 않은 역사는 다시 재현된다.
윤덕향/발행인 (2004-02-03 10:36:56)
참으로 무더운 날들이다. 한달 남짓 계속될 것이라던 장마는 불볕더위를 퍼부어 남부지방의 논과 밭을 거북등으로 갈라놓았다. 바닥을 들어낸 저수지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물고기들이 타는 냄새가 날 법한 날들이었다. 언젠가부터 떠들어대는 전력예비율에 아랑곳없이 선풍기, 에어콘이 날개 돋듯 팔린다는 보도도 있다. 전기가 남아돌아 전기의 사용을 권하던 것이 어제만 같은데 제한송전이 자연스럽게 얘기되고 새삼 전기를 절약하자는 말이 들먹여진다. 전력예비율이니 제한송전이란 말은 예상보다 빨리 더위가 몰려든 탓이라고 한다. 그건 그렇다하고 전기만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논밭작물은 차차하고 먹는 물의 공급조차 시원치 않은 것은 무슨 탓인지 모르겠다. 이 더운 날들 속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터져 나온 김일성 사망은 일시 혼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거짓처럼 전해진 김일성의 죽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물 건너가고 그로인하여 꿈에 부풀었던 이산가족들은 다시 한번 씁쓸한 실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마치 김일성이 살아있어 정상회담이 이루어 졌다면 획기적인 조치가 있었을 것처럼. 철저하게 밀폐된 북한의 특성상 어떤 변화가 있을지 전문가마다 진단이 한창이지만 암중모색인 것처럼만 보인다. 이런 판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날씨만큼이나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단순한 느낌만으로도 김일성이 살아 있었어야만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그의 죽음으로 남북관계의 개선이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즉 북한이 남북관계를 개선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면 김일성의 죽음과는 큰 관계없이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애초부터 김일성이 남북관계 개선을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인물이고 그만이 그 일에 적극적인 인물인 것처럼 그의 죽음 직후 각종 언론매체에 드러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돌이켜볼 때, 극우보수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의 한 당사자로서 민족분단, 국토분단 또는 현재까지 지속되어온 남북 긴장관계에 책임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세기동안 지속해온 긴장상태를 일시에 풀어버릴 특단의 조치나 양보를 할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를 일시나마 남북관계를 개선해줄 선봉장처럼 치켜세운 것은, 핵문제를 둘러싸고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듯한 분위기임에도 사재기의 기미조차 없는 무감각한 상황을 비난하다가 또 곧이어 일시 일어난 사재기를 비난하던 사람들이다. 금세기 들어 우리 민족은 두 차례의 전쟁을 경험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국권강탈과 그에서 비롯된 소위 대동아 전쟁과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이제 김일성의 죽음으로 그 전쟁의 당사자들은 모두 땅에 잠들게 되었다. 대동아전쟁의 한 원흉이었던 소화천황도 죽고 한국전쟁의 김일성도 죽은 지금 때아니게 장계식의 조문문제가 한바탕의 더위를 몰고 왔다. 진보적이라는 야당의 몇몇 의원들이 제기한 조문단 파견문제는 우리 사회에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켰고 북한은 대남비방을 부추기기에 이르렀다. 근신, 또 근신을 하여도 부족하다는 상갓집에서 조문오지 않는 것을 두고 비난을 하는 것도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한편으로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평가와 입장일 수 있지만 민족과 국토분단의 한 당사자를 마치 민족적 영웅시하여 조문한다는 움직임도 오지랖 넓은 여편네 나대는 것만 같다. 보다 더 시덥잖은 것은 신공안정국이라는 용어와 때맞추어 터진 조문단 문제에 얼씨구나 일시 잠든 것 같던 매카시의 악령을 무덤으로부터 불러낼 듯한 상황이다. 사재기 조짐이 보일 때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던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이제 논의조차 붉게만 보려한다. 참으로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 조문단 논의를 붉게 몰아가려 열을 올리는 분들이 소화천황이 죽었을 때 조문단을 파견하는 문제를 지금처럼 목청높혀 비난하거나 그 조문의 문제점을 깊이 생각해본 일이 있는지 묻고 싶은 기분이다. 36년 동안의 국권강탈기간 중 20여년을 통치하고 대동아전쟁중 이 땅의 젊음을 징용, 징병이란 이름 아래 죽음으로 내몰고도 부족하여 가녀린 아녀자까지 정신대란 이름아래 살해한 일본 천황의 죽음을 조문할 일이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조문단 파견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때 지난 지금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동일한 역사는 돌아오지 않으나 걸러지지 않은 역사는 비슷한 모습으로 다시 재현되는 법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일본천황이 김일성보다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일본 천황의 죽음은 조문하면서 김일성을 조문하는 것을 반대한 것은 무엇에 기초한 것인가? 한쪽은 공산주의자이고 다른 쪽은 적어도 형식상 공산주의자가 아니라서였는가? 한족은 같은 민족의 가슴에 총을 겨눈 집단의 괴수였고 다른 쪽은 다른 민족의 가슴에 총을 겨눈 이민족집단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한쪽은 전혀 사과의 말이 없고 다른 쪽은 ‘통석의 념’을 입에 담았기 때문인가? 소박하게 생각해도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근본적으로 국가의 이익을 바탕에 깔고 국교가 정상화된 집단과 국교정상화란 말조차 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차이에 바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제 다시 북한에 들어선 통치세력과 대화가 운위되고 좋든 싫든 지긋지긋한 남북대립과 긴장을 완화하기 위하여 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어쩌면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얼마 전 법석을 떤 것처럼 금방이라도 남북한 관계가 개선될 것 같은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느라 입 모아 떠들지도 모른다. 그때 아직은 동양문화권에 속한 우리의 처지에서 김정일이던 그 아닌 다른 누구던간에 상중에 있을 북한의 통치세력과의 회담서두를 어떻게 이끌어낼지 궁금한 것이다. 아니 근본적으로 북한의 핵문제에서 비롯된 긴장에서부터 최근이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떤 입장이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것이다. 대동아 전쟁이 끝나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달, 뜻밖에 등장한 공산세력으로 인하여 민족과 국토 분단의 비극이 비롯된 이 8월, 어지럽게 오가는 설왕설래를 꼼꼼히 지켜보기에는 용광로처럼 들끓는 더위만으로도 지쳐 늘어져버렸다. 그저 전력예비율, 물고기 죽어 자빠진 저수지바닥, 제한 급수나 송전을 듣지 않는 내년 여름이기를 공상 아닌 환상처럼 선풍기 바람 대신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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